93화 SS급보다 높으면 뭡니까 (1)
“어리석은 사람 같으니라고.”
“면목이 없습니다, 황 길드장님.”
혀를 차는 황충평 앞에서 허태웅은 고개를 숙였다.
“위세호는 정말로 위험한 노인네야. 그 사람이 직접 한국에 들어오는 걸 막으려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황 길드장님의 뜻을 제가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이미 한국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가가 나온 상태고, 강제로 막을 수도 없어.”
“알고 보니 S급 헌터를 다섯 명이나 들여보냈습니다. S급 헌터는 유운청을 비롯해 두 명밖에 없다고 했었는데…….”
“S급 헌터 다섯 명이면 김진우와 김태호가 없는 크루세이더 정도는 괴멸시킬 수 있겠군.”
현재 크루세이더 길드에서 나설 수 있는 S급 헌터는 은미라를 포함해 세 명 정도밖에 없다. 김진우, 김태호는 해외에 있고 윤혜원은 아직 복귀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SS급 헌터인 위세호도 있으니까 말이야. 물론 웬만해서는 직접 싸우지 않겠지만.”
“그게… 위세호는 서민혁을 먼저 처리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런가.”
의자에 앉은 채 황충평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옳을지도 몰라. 서민혁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황 길드장님, 서민혁에게 연락 좀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위험하다고 말입니다.”
“내가 왜? 자네가 직접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면목이 없어서 말입니다.”
“쯧쯧, 그 태도가 더 꼴사나운 거야, 허 길드장.”
허태웅이 더 고개를 숙였다.
“걱정 말게. 자네 오기 전에 연락해 보니 이미 다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습니까?”
“제갈환하고 조성조가 계속 사해방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제갈환하고 조성조가……!”
그들은 한때 허태웅이나 황충평보다 더 앞서가던 헌터들이다.
“서고관리국 입장에서는 중국 헌터들이 한국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걸 용납할 수 없지. 하지만 서고관리국의 힘으로 사해방을 막는 건 불가능해.”
“네…….”
“그래서 서민혁에게 기대하고 있는 거야.”
“서민혁이 사해방을 막아 줄 거라고 말입니까? 하지만 서민혁 혼자 힘으로 어떻게…….”
“글쎄, 거기까지는 나도 모르지.”
“…차라리 제가 직접 가서 서민혁을 도울까요?”
“그만둬. 위세호한테 털렸다며.”
“윽…….”
“여기서 방해를 하면 위세호도 자네를 살려 두지 않을 거야. 목숨이 아깝다면 관두게.”
그렇게 말한 뒤 황충평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자네 마음은 이해가 되네.”
“황 길드장님…….”
“나도 몸만 멀쩡했다면 서민혁을 도우러 갔을 테니까 말이야.”
“…….”
그동안 황충평은 많이 회복되었다
그래도 아직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일단 지켜보자고. 도움이 필요하면 서민혁이 직접 말하겠지.”
“…알겠습니다.”
“만약 여기서 서민혁이 이긴다면…….”
황충평은 쓴웃음을 지으며 병실 천장을 쳐다봤다.
“한국 헌터계는 새로운 시대에 돌입하게 되겠지.”
“새로운 시대요?”
“조성조, 제갈환, 남궁준 등이 주도하던 시기가 1기, 우리들이나 김진우가 주도하던 시기가 2기였다면…….”
손가락 세 개를 치켜들며 황충평이 말했다.
“이제 서민혁이 주도하는 3기가 시작되는 걸세.”
“…….”
“이 새로운 시대에서… 우리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물론, 서민혁이 패배하면 중국 세력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과연 미래는… 어떻게 될까.
* * *
“방주님!”
“무슨 일이냐.”
위세호의 호텔방에 도착한 유운청은 고개를 숙이며 다급히 말했다.
“연소청을 발견했습니다!”
“뭐라고?”
연소청은 사해방의 배신자다.
막야를 훔쳐서 한국으로 도망갔는데, 지금은 서고관리국의 보호를 받고 있을 터였다.
“결국, 서고관리국에서도 나온 모양입니다.”
“지금 어디 있지?”
“무한서고 안에 있나 봅니다.”
“무한서고 안에?”
“네, 바깥으로 나오지 않고 무한서고 안에서 침식을 해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경계하고 있는 거군.”
몬스터가 우글대는 무한서고 안에 숨어 있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외부에서는 찾기 힘들다.
“그 정보는 어디서 나왔지?”
“그게… 서민혁이 소속된 CS컴퍼니를 조사하던 도중에 입수한 정보입니다.”
“뭐라고?”
“아무래도 CS컴퍼니가 연소청을 숨겨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연소청이 숨어있는 무한서고에 서민혁이 들락거리는 모습도 포착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방주님, 혹시… 연소청을 숨겨 주고 막야를 빼돌린 게 서민혁 아닐까요.”
유운청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서민혁을 의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서민혁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것이…….”
“지난번에 제가 크루세이더 길드의 공략3팀과 충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서민혁의 계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
“서민혁이 혼자서 53번 무한서고를 싹쓸이한 것도, 막야의 힘을 빌렸다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유운청은 서민혁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대단한 인재라고는 생각했지만, 딱히 수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서민혁의 모든 행적이 의문스러워졌다.
“그래도 방주님, 이건 좋은 기회인 것 같습니다.”
“좋은 기회?”
“서민혁과 연소청을 동시에 잡는 게 어떻겠습니까.”
서민혁은 위세호가 1순위 타깃으로 삼은 남자.
연소청도 사해방 입장에서 반드시 잡아야 하는 배신자다.
“서민혁을 미행한 뒤 연소청과 접촉하는 순간을 노려 습격하는 겁니다.”
“…….”
“한국에 들어온 길드원들을 전부 동원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수라 길드에도 협력을 요청하고요.”
골칫덩이 둘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다.
전력을 집중시켜서 단번에 해치워야 한다.
“멍청한 놈.”
그때 갑자기 위세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함정이다.”
“네?”
“네 말대로 모든 게 서민혁의 계획대로 진행된 거라고 치자.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꼬리를 잡힌 거지?”
“앗…….”
“내가 서민혁이라면 연소청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을 거다. 철저히 숨기겠지.”
유운청은 입을 떡 벌렸다.
“서민혁은 우리를 유인하고 있는 거야. 연소청을 미끼로 삼아서 말이지.”
“그, 그러면…….”
“아마 무한서고 안에서도 조용하고 외진 곳으로 우리를 유인하겠지. 그곳에는 서민혁에게 협력하는 헌터들이 매복해 있을 테고.”
“……!”
사해방의 눈을 피해 연소청이 숨어 있는 곳이니, 좀 험준하거나 구석진 구역이어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쫓아갔다가 매복에 당한다면…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그, 그러면… 이 정보는 무시해야 하는 걸까요?”
“아니, 그렇지 않아.”
“네?”
“함정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우리가 역으로 함정을 팔 수 있지.”
위세호가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서민혁은 우리 앞에 낚싯바늘을 던졌어. 우리는 그 낚싯바늘에 걸린 척하면서…….”
“걸린 척하면서…….”
“낚시꾼의 목을 물어뜯어 주면 되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위세호는 손을 치켜들었다.
“유운청, 간장을 준비해라.”
“간장을……!”
간장.
사해방의 보물인 SS랭크 무기.
본래 SS랭크 무기를 들고 다른 나라로 갈 때는 해당 국가에 신고해야 하지만, 사해방은 비밀리에 한국으로 들고 왔다.
아수라의 허태웅도 간장이 벌써 한국에 들어와 있는 줄은 모르고 있다.
“서민혁 그리고 서민혁에게 협력하는 한국 헌터들을 모조리 처단한다.”
“알겠습니다……!”
무한서고 안이라면 한국인을 얼마든지 죽여도 문제없다.
곧 펼쳐질 살육을 기대하며, 위세호가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 * *
“아마 위세호는 이게 함정이라는 걸 눈치챘을 겁니다.”
서고관리국 안에 있는 회의실에서, 서민혁은 6번 무한서고의 지도를 펼쳐놓고 말했다.
“위세호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부러 정보를 흘린 거라고 눈치챘겠죠.”
“그렇겠지요…….”
맞은편에서 제갈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헌터라면 아무 생각없이 6번 무한서고로 쳐들어올 겁니다. 하지만 위세호는 이게 함정이라는 걸 꿰뚫어 보겠죠.”
“그러면 6번 무한서고로 오지 않을 거란 얘기야?”
옆에서 듣고 있던 조성조가 묻자, 서민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뭐?”
“위세호는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 6번 무한서고에 들어올 거야. 그리고 나를 덮치려 하겠지.”
“아니, 왜?”
“콧대가 높은 노인네니까.”
“아……!”
함정인 것 같으니 조심하자.
일단 물러섰다가 기회를 살피자.
위세호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게 불가능한 인물이다.
“함정이니까 뒤로 물러선다는 건 위세호 입장에서는 매우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 오히려 함정을 역이용해서 적들을 일망타진하자는 생각을 할 가능성이 높아.”
“으음… 그런가.”
“일리 있는 말이군요.”
제갈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위세호는 정말로 전력을 다하겠군요.”
“네, 이번에야말로 저를 확실히 제압하려고 할 테니까요.”
서민혁이 원했던 시추에이션.
위세호가 전력을 다해 자기를 잡으러 오는 상황을 유도해 낸 것이다.
“하지만 서민혁 헌터, 그러면 너무 위험해집니다. 함정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으니 사해방은 결코 방심하지 않을 테고, 위세호도 진지하게 싸움에 임할 겁니다.”
SS급 헌터인 위세호.
그리고 그 부하인 S급 헌터들.
그들이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덤벼든다면, 한국에 있는 어떤 길드든 순식간에 초토화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갈환의 걱정도 당연한 것이었다.
“뭔가… 기상천외한 작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 놈들이 결코 예상할 수 없는 함정이 필요해. 함정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함정 말이야.”
제갈환과 조성조가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서민혁은 그들 앞에서 고개를 저었다.
“함정 없습니다.”
“네?”
“뭔 소리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을 보면서 서민혁은 담담히 말했다.
“굳이 말하자면 함정이 없다는 게 함정이겠죠.”
“서민혁 헌터…….”
“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갈환은 당혹스러워 하는 표정이었고, 조성조는 미친놈을 보는 표정이었다.
“SS급 헌터인 위세호를 상대하는데, 아무런 함정도 준비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돼? 뭔가 작전이 있어야지!”
“저는 서민혁 헌터가 뭔가 생각이 있을 것 같아서 협력해 주고 있는 거였습니다만…….”
“아무런 작전이 없는 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서민혁의 존재 자체가 함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서민혁이 지금 어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함정에 빠지게 되겠지만… 그걸 조성조와 제갈환 앞에서 말할 수는 없다.
“아, 그리고 제갈환 부국장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지요?”
“행방을 알 수 없게 된 SS랭크 무기 막야… 사실 제가 갖고 있었습니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야, 야 이 미친… 그런 건 미리 말했어야지!”
서민혁이 막야를 갖고 있다는 건 연소청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제갈환도 연소청이 어디 비밀스러운 곳에 숨겨놓은 줄만 알고 있었다.
“서, 서민혁 헌터, 그러면 지난번에 크루세이더와 사해방의 무력 충돌이 발생한 것도…….”
“이 자식아, 그럼 네가 사해방한테 선빵 친 거랑 마찬가지네!”
“뭐 그건 이미 다 지나간 일이니 넘어갑시다.”
서민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쨌든 제갈환 부국장님.”
“네…….”
“제가 위세호를 쓰러뜨리고, 막야의 부부검인 간장을 빼앗는다면… 간장과 막야 둘 다 제가 정당하게 입수한 무기로 서고관리국 차원에서 인정해 주십시오.”
“……!”
서고관리국은 중국 세력의 한국 침입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니 서민혁이 그걸 막아 주기만 한다면… 모든 편의를 봐줄 것이다.
“정말로, 진심이신 거군요.”
“네.”
서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을 대표하는 SS급 헌터인 위세호를, 제가 꺾겠습니다.”
“…….”
“…….”
조성조도 제갈환도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서민혁을 쳐다볼 뿐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서민혁의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내 가호를 받으며 싸우면 되겠구나.’
어제부터 질리도록 듣고 있는… 고차원 지성체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