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폭군을 사냥하라 (1)
“서민혁 씨!”
은미라가 크루세이더 길드의 헌터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한편 아수라 길드의 헌터들은 아직도 좀비들을 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까 시커먼 불꽃이 솟구치는 게 보였었는데, 대체 뭐였던 건가요?”
“비밀입니다.”
이미 서민혁은 막야를 인벤토리에 수납한 상태였다.
서민혁이 검은 불꽃을 뿜어내는 칼을 휘둘렀다는 소문이 퍼져도 그게 막야라는 걸 눈치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막야에 그런 기능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은미라 씨.”
“네?”
“저 시체 거인, 크루세이더 길드의 힘으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
그레이트 플레시 골렘은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조종하던 네크로맨서가 죽어서 움직임을 멈출 줄 알았는데, 좀비들처럼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모양이다.
다만 네크로맨서가 조종할 때마다 움직임이 둔해 보였다. 그리고 폭주하고 있는 건지 마구잡이로 주변을 파괴하고 있었다.
아마 회복 능력이나 포식 능력 등도 약화되어 있을 것이다.
“저런 놈을 아수라 길드에게 빼앗기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아……!”
“크루세이더 길드가 저놈을 잡는다면 큰 화제가 되겠죠. 양보해 드리겠습니다.”
사냥감은 독점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서민혁은 은미라에게 그레이트 플레시 골렘을 맡기기로 했다.
이미 오크 네크로맨서는 쓰러뜨렸고, 저놈은 더 이상 서민혁의 사냥감이 아니다.
“그러면 서민혁 씨는 어떻게…….”
“안쪽을 정찰하고 오겠습니다.”
“앗, 서민혁 씨!”
서민혁은 무너진 성벽을 넘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은미라가 다급히 서민혁을 불렀지만, 그레이트 플레시 골렘 때문에 결국 쫓아오지는 못했다.
물론, 서민혁의 목적은 정찰이 아니다.
‘보스 퀘스트를 공략해야 돼. 각성 퀘스트도 있으니까.’
데이모스가 부여해 주는 퀘스트는 24시간 제한의 5연속 퀘스트만 있는 게 아니다.
현재 서민혁은 ‘계약자의 각성’ 퀘스트도 진행 중인 상태였다.
[계약자의 각성 (3)]
* 퀘스트 랭크: EX
* 퀘스트 내용: 53번 무한서고의 보스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특별 보상을 획득하라.
* 클리어 보상: 마력 보너스 +50 부여, ‘데이모스의 광휘’ 획득.
# 240시간 내에 클리어하지 못할 경우 페널티가 주어짐.
지금까지와는 달리 마도서를 획득하라는 문구가 없다.
특별 보상을 획득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보스를 쓰러뜨리는 것만으로는 클리어할 수 없을 것이다.
한편 보상으로는 마력 보너스 +50과 ‘데이모스의 광휘’라는 아이템이 준비되어 있다.
마력 보너스 +50은 파격적인 보상이었지만, 그것보다 데이모스의 광휘 쪽이 신경 쓰였다.
‘대체 어떤 효과일까.’
기대감을 품은 채 서민혁은 성 내부를 질주했다.
바깥에 있던 오크들하고는 다른 장비를 갖춘 오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켜라.”
안쪽 깊숙이 들어왔고, 이제 남들 눈치를 살필 이유도 없다.
서민혁은 샐러맨더에게 명령을 내려 화염을 생성시켰다.
‘플레시 골렘을 쓰러뜨려 보겠다고 공격마법을 난사했다면 마력이 부족했겠지.’
아직 마력에는 여유가 있었다.
서민혁은 파이어 볼을 주위에 흩뿌렸고, 폭발에 휘말린 오크들이 비명을 질렀다.
“계속 가자.”
주머니에서 고개를 내민 샐러맨더, 어깨 위를 맴도는 실프에게 말을 걸면서 서민혁은 계속 전진했다.
이 성 깊숙한 곳에 숨어 있을 보스를 잡기 위해.
* * *
“뭐라고? 또?”
전화를 받은 허태웅은 인상을 찡그렸다.
오늘도 서민혁과 크루세이더 길드의 활약 때문에 아수라 길드가 들러리가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체 뭣들 하고 있는 거야!”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곧바로 흠칫하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일단 최선을 다해. 뭔가 실적을 올리라고!”
허태웅은 입술을 깨물며 통화를 끝냈다.
그러자 옆에서 중국말이 들려왔다.
“일이 잘 안 풀리는 것 같군, 허태웅 길드장.”
“아닙니다, 방주님.”
지금 허태웅은 고급 리무진에 앉아 있는 중이었다.
함께 앉아 있는 건… 사해방의 위세호 방주였다.
“허태웅 길드장, 이번 무한서고 공략에는 우리 사해방이 많은 지원을 해 줬어.”
“네, 알고 있습니다.”
“지원해준 S급 장비가 수십 개, 각종 소모품도 많이 준비해 줬으니… 당연히 아수라 길드에서 공략을 주도해야지. 아닌가?”
“맞습니다.”
“그렇게 아수라 길드에서 모든 걸 싹쓸이한 뒤…….”
위세호가 허공에다 글씨를 쓰는 시늉을 했다.
“언론마다 도배를 해 버리는 거지. 아수라 길드가 주도해서 새로운 대형 무한서고를 완전 공략했다, 크루세이더 길드는 그냥 들러리였다, 아수라 길드야말로 국내 1위의 길드다, 이제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말이야.”
“…….”
“그렇게 하자고… 약속을 했을 텐데 말이지.”
위세호의 목소리는 그냥 담담했다.
하지만 허태웅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위세호에게서 정체불명의 한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렇게는 못할 것 같군.”
“아, 아닙니다.”
“이러면 여기저기 언론사마다 돈을 뿌려 둔 게 다 헛수고가 되어 버리지 않겠나? 아주 큰 낭비를 하게 되었어.”
“그,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겁니다, 방주님.”
허태웅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서민혁 헌터가 좀 돋보이는 활약을 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크루세이더 길드 단독으로 낸 전과는 아수라 길드보다 못합니다.”
“어쨌든 아수라 길드가 돋보이는 활약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사실 아닌가?”
“그건…….”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헌터들을 풀어서 크루세이더 놈들을 해치울 걸 그랬군.”
“그, 그건 안 됩니다!”
위세호의 말을 듣고, 허태웅은 눈을 크게 떴다.
“방주님,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건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전에도 얘기했지만, 결국은 그렇게 될 걸세.”
“헌터들끼리 서로 싸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최대한… 피를 보지 않고 싶습니다.”
“그건 위선일세, 허태웅 길드장.”
“…….”
허태웅은 할 말이 없었다.
“이미 자네들은 전장에서 크루세이더 길드가 더 많은 피를 흘리도록 작전을 꾸며 놨어. 몬스터가 죽이는 건 상관없고, 헌터가 죽이면 안 된다는 건가?”
“…….”
“걱정 말게. 손을 더럽히는 건 내 부하들이 될 테니까. 자네 부하들한테 같은 한국인 헌터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는 일은 없을 걸세.”
물론 허태웅도 다른 헌터를 죽인 적이 있다.
하지만 상대편이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선제공격을 한 적은 없었다.
지난번에 대룡방의 원무정을 죽였을 때도, 그놈의 부하가 먼저 아수라의 길드원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아수라가 업계 1위를 차지하기 위해 크루세이더의 길드원들을 해치운다는 건 웬만해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방주님.”
“…….”
“내일은 저도 다시 53번 무한서고에 들어갑니다. 제가 보스를 잡으면 됩니다.”
“자네가 보스를 잡겠다고?”
“네, 그러면 아수라 길드가 공략을 주도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위세호와 처리할 일이 있어서 바깥에 나와 있지만, 내일은 다시 무한서고에 들어간다.
그때 서민혁을 능가하는 활약을 하면 되는 것이다.
“흐음, 그렇게 하면 별문제는 없겠지.”
“네. 이미 공략이 꽤 진행된 것 같고, 내일 제가 들어가면 보스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말일세.”
위세호가 손가락으로 좌석을 두들기며 말했다.
“그 전에 서민혁이 보스를 잡을 수도 있지 않나?”
“네?”
“그러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거 아닌가?”
허태웅은 잠시 상상해 봤다.
만약 서민혁이 보스까지 잡아 버리면, 53번 무한서고 공략의 주역은 누가 봐도 서민혁이 된다.
아수라야말로 완전한 들러리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오히려 서민혁과 협력하고 있던 크루세이더 쪽이 더 주목받게 될 것이다.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런가?”
“네, 오늘도 서민혁은 꽤 많은 전투를 치른 것 같습니다. 크루세이더 길드도 많이 지친 것 같다고 하고요.”
“…….”
“내부로 진입해서 보스까지 잡는 건 어려울 겁니다. 안쪽에도 오크들이 꽤 많은 것 같다고 했으니까요.”
허태웅은 자신 있게 말했다.
“서민혁이 오늘 안에 보스를 잡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 * *
‘이 정도면 1시간 안에 보스에 도달할 수 있겠군.’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면서 서민혁은 주위를 살폈다.
이미 서민혁은 여러 개의 성벽을 돌파하고 정중앙에 있는 왕궁 같은 곳에 도달한 상태였다.
‘가까이 갈수록 느껴져. 엄청난 마력이야.’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마력.
오크가 저런 마력을 가질 수 있는 걸까.
‘53번 무한서고의 보스가 어떤 놈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단 말이지.’
회귀하기 전에는 아마 크루세이더 길드가 보스를 잡았을 것이다.
어떤 보스였는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는 건 딱히 특별할 게 없는 보스였다는 얘기다.
다만… 크루세이더 길드가 거짓으로 발표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크루세이더 길드가 이곳에서 특별한 보스를 잡고 특별한 보상을 얻은 뒤, 그걸 은폐하기 위해 무난한 보스였다고 발표했던 거라면…….’
이곳에는 확실히 뭔가 있다.
그렇게 확신하면서 서민혁은 안쪽으로 들어갔다.
“크르르르!”
“그르르륵!”
다른 놈들과는 확연히 다른 장비를 갖춘 오크들이 나타났다.
오크 가디언보다 훨씬 상위의 존재… 친위대 오크인 오크 로열가드였다.
‘가슴에 훈장 같은 걸 달고 있는 놈도 있고… 그럴 듯하네.’
지휘관으로 보이는 놈이 지시를 내리자, 진형을 갖춘 채 일제히 달려들었다.
서민혁은 파이어 볼과 파이어 웨이브를 동시에 날려 놈들의 진형을 무너뜨린 뒤, 막야를 들고 거침없이 달려 나갔다.
‘내가 생각해도 확실히 많이 나아졌어.’
막야를 사방으로 휘두르면서 서민혁은 다시금 실감했다.
근체민감 합계 +500 스탯은 정말로 대단했다.
생체마법을 쓰지 않아도 이 정도로 움직임이 가능하니 말이다.
‘그리고 생체마법까지 쓰면…….’
근력 강화, 체력 강화, 민첩 강화, 감각 강화를 동시에 사용했다.
그 순간, 폭풍이 몰아쳤다.
“그르륵?!”
“크르르르……!”
살이 튀고 피가 튀었다.
서민혁이 휘두르는 무시무시한 칼날에 오크들을 속수무책이었다.
“그아아악!”
“그르르!!”
친위대들의 공격은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그들이 휘두르는 칼날은 서민혁이 휘두르는 칼날에 튕겨나갔다. 가끔 서민혁의 몸을 스치기도 했지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었다.
호신강기가 서민혁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신강기도 이제는 상시 발동이 가능해졌어.’
이렇게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민혁은 전혀 지치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몰아치면서,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오크 로열가드를 유린한다.
“그르르륵!”
마침내 마지막 친위대의 목이 날아갔다.
수많은 시체들에 둘러싸인 채 서민혁은 숨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서 위저드 로드를 꺼냈다.
‘여기다가…….’
아까 오크 네크로맨서를 쓰러뜨리고 얻었던 보석 형태의 아이템.
사령의 진수를 위저드 로드에 결합시켰다.
그리고…….
“시체병 생성.”
척!
백 마리 이상 있었던 오크 로열가드.
그들의 시체가 모조리… 좀비가 되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면…….”
서민혁은 다시 막야를 뽑아 들고 전진했다.
친위대들이 지키고 있던 ‘문’.
그것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왕을 위한 알현실이었다.
붉은 양탄자가 안쪽으로 쭉 이어져 있고, 그 양옆으로 왕의 신하들이 서 있었다.
‘오크 위저드 하나, 오크 제너럴 하나, 오크 저거너트 하나, 오크 몽크 하나… 이렇게 네 마리인가.’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옥좌.
그곳에는 송곳니가 튀어나온 거구의 오크가 앉아 있었다.
‘오크 킹이 아니야.’
그냥 킹 클래스는 저렇게 육체 능력이 뛰어나지 않다. 전투력보다는 지휘력 등에 특화된 클래스이기 때문이다.
‘저건 왕이 아니라… 폭군.’
오크 타이런트.
킹 클래스를 초월한 상위 클래스의 존재.
그 오크 타이런트와 눈을 마주친 순간, 윈도우가 출현했다.
[오크 폭군 토벌]
* 퀘스트 랭크: S+
* 퀘스트 내용: 신하들을 이끄는 오크 타이런트를 처치하라.
* 클리어 보상: 108억 5,000만 크레딧, 봉인 마도서 획득.
* 특별 보상: 오크 위저드, 오크 제너럴, 오크 저거너트, 오크 몽크를 먼저 쓰러뜨린 뒤 오크 타이런트를 쓰러뜨렸을 경우 ‘????’ 획득.
# 본 퀘스트는 탐색자에 의해 클리어된 시점에서 소멸됨.
‘S+랭크의 보스 퀘스트!’
7번 무한서고에 이어, 두 번째로 경험하는 S+랭크.
하지만 서민혁을 놀라게 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특별 보상이 뭔지 안 알려 줘?’
이런 건 처음이었다.
대체 뭘 주려고 이렇게 숨겨놓은 걸까.
하지만 서민혁에게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그라라라라라라!”
오크 타이런트의 포효와 동시에, 네 명의 신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민혁 또한 백여 마리의 오크 로열가드 좀비를 전진시키며 막야를 치켜들었다.
결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