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이미 30초는 지난 것 같군요 (3)
땅의 정령으로 발을 묶고 날린 기습 공격.
서민혁의 발차기가 유운청의 턱에 정통으로 들어갔다.
보통 사람이라면 단번에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크윽!”
하지만 유운청은 S급 헌터.
휘청대면서도 이를 악물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대단한데?’
유운청의 육체 능력과 무술 실력은 서민혁을 능가한다.
무기 없이 샐러맨더나 암흑마법의 도움을 받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든 해봐야지.’
이미 유운청은 턱에 대미지가 들어갔다.
다시 허를 찌르면서 몰아세운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민혁이 다음 공격을 펼치려 했을 때였다.
“멈춰라.”
갑자기 들려온 중국말.
유운청은 다급히 움직임을 멈췄고, 그걸 확인하고 서민혁도 뒤로 물러섰다.
‘누구지?’
마력 반응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력이 미약한 것하고는 달랐다.
‘어떤 생물이든 최소한의 생체 에너지를 갖고 있어. 그런데 이건…….’
정말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예 무생물이라면 모를까, 살아 있는 인간이 이럴 수는 없었다.
‘자신의 기를 감추고 있는 건가?’
어둠 속에서 남자 하나가 다가왔다.
나이가 많았다. 최소 60대로 보이는데, 황충평보다 많은 것 같기도 했다.
체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다만, 나이에 비해 자세가 꼿꼿했다.
“유운청, 이게 무슨 추태냐.”
“죄송합니다!”
유운청이 곧장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걸로 그치지 않고 이마를 흙바닥에 내려찍었다.
‘뭐야?’
중국 최대의 길드인 사해방에서 간부 자리를 맡고 있는 유운청이 머리를 박고 사죄하고 있다.
이것은… 저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의미하고 있었다.
‘유운청이 황충평한테 저러고 사죄하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저 노인은 사해방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유운청이 머리 박고 사죄할 만큼, 까마득한 높이에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설마…….’
노인의 시선이 서민혁에게 향했다.
그리고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참 유감스럽게 됐군, 서민혁.”
부드러운 중국어였다.
“자네를 만나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내 부하가 조금 오해를 한 모양이야.”
“…….”
“내 말이 틀린가, 유운청?”
“맞습니다! 저희가 오해하여 실수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땅에 머리를 박으며 소리치는 유운청을 보고 서민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유운청이 무단으로 이런 짓을 했을 리 없다.
노인이 서민혁을 이런 방식으로 납치해 오라고 일일이 명령하지는 않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지시가 있었을 것이다.
“유운청, 나한테 사과를 하면 어떻게 하나?”
“죄송합니다!”
유운청이 벌떡 일어나더니 다시 서민혁 앞에서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게 대체 뭡니까?”
서민혁은 불쾌감을 느꼈다.
“이런 식의 사과를 받아 봤자 기분 나쁘기만 합니다.”
“흠, 금전적인 사과를 바라는가?”
노인이 왼쪽 소매를 걷었다.
그 손에는 라이브러리 건틀릿이 장착되어 있었다.
“내가 바로 크레딧을 보내 주지. 고유번호를 알려 주게.”
“죄송하지만 아직 견적을 안 내 봤습니다. 보상금은 보험사와 얘기해 본 뒤 말씀드리죠.”
“허허,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사과를 하면 좋을까?”
“제대로 사과를 하십시오.”
“뭐라고?”
“이게 유운청 씨가 멋대로 저지른 일이라고 하더라도, 처음에 지시를 내린 건 당신입니다.”
서민혁은 노인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책임자로서 사과하시죠. 유감 같은 완곡한 표현을 쓰지 말고, 똑바로 말입니다.”
“…….”
“서, 서민혁 씨!”
유운청이 고개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제가 실수한 거라고 사과드렸지 않습니까!”
“유운청 씨 단독으로 저지른 잘못이라면, 왜 저 어르신이 저한테 크레딧을 보내 줍니까?”
“……!”
“저 어르신 본인도 알고 계십니다. 자기한테 책임이 있다는 걸 말이죠.”
서민혁의 말을 듣고 노인 쪽도 혀를 찼다.
“정말 당돌한 젊은이로군.”
“서, 서민혁 씨, 자중하십시오. 저분이 누구신지 몰라서 이러는 것 같은데…….”
“알고 있습니다.”
서민혁은 유운청의 말을 끊었다.
“사해방 방주, 위세호 선생이시겠죠.”
위세호.
헌터의 역사에 대해 얘기할 때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는 인물 중 하나다.
그 지명도는 미국의 미스터 도노반에 뒤지지 않는다.
중국 최고의 길드인 사해방의 지배자이자, 중국식 전투술을 정립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는… S급 헌터를 뛰어넘은 존재, SS급 헌터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 최고의 거물이야. 대체 언제 한국에 들어온 거지?’
위세호에게서는 아무런 마력 반응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중국 최고의 헌터 중 한 명.
전설적인 남소림사(南小林寺)의 무술을 계승한 달인이기도 하다.
자기 기척을 숨기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이다.
“그걸 알면서 어떻게……!”
“그만하게, 유운청.”
“네, 넵!”
위세호가 제지하자 유운청이 다시 넙죽 엎드렸다.
“그래, 내 사과를 바란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나 정도 위치에 오르게 되면 행동 하나하나가 큰 의미를 지니게 되지. 설령 내가 사과할 일이 있다고 치더라도, 자네 같은 사람에게 함부로 고개를 숙이는 건 어려운 일이야.”
“결국, 사과는 못 하시겠다는 얘기군요.”
“그 대신, 이렇게 하면 어떤가.”
그렇게 말하며 위세호가 손가락 하나를 치켜들었다.
“자네를 사해방에 간부 대우로 받아들이지.”
“간부?”
“한국 지부장 정도의 직책이면 어떻겠나?”
한국 지부장.
그게 무슨 말을 뜻하는 건지, 서민혁은 바로 이해했다.
“사해방은 지금 당장 한국에 진출할 생각이 없는 것 아니었습니까?"
“상황이 바뀌었네, 서민혁.”
“바뀌었다고요?”
“예전에 갤럭티카 길드를 이끌었던… 크루세이더 길드의 남궁준 부길드장이 사망했지.”
“……!”
“게다가 크루세이더 길드는 공략1팀부터 3팀까지 모조리 마비된 상태야. 한동안 제대로 힘을 못 쓰겠지.”
위세호는 한국 1위의 크루세이더 길드가 어떤 상황인지 다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 사해방이 한국에 진출하기에 딱 좋은 상황인 거지.”
“대룡방의 황충평 길드장의 뜻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오해하지 말게. 나는 황충평과 가까운 사이야. 황충평의 뜻을 무시하고 대룡방을 집어삼킬 생각은 전혀 없으니 안심하게.”
“그렇다면…….”
“그래서.”
위세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한국 2위인 아수라 길드와 손을 잡기로 했지. 아수라 길드는 크루세이더 길드를 밀어내고 한국 헌터계를 평정하는 걸 원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
중국 1위인 사해방과 한국 2위인 아수라가 손을 잡는다?
한국 1위인 크루세이더를 밀어내고 한국을 평정하기 위해?
‘확실히… 그렇게 하면 대룡방을 이용하는 것보다 한국을 집어삼키기 쉬워져.’
회귀하기 전, 사해방은 한국 진출을 위해 대룡방을 이용했다. 그때 대룡방을 장악하고 있던 건 사마윤이었다.
현재 사마윤은 퇴출되었고, 사해방이 쉽게 조종하기 어려운 황충평이 다시 대룡방을 장악했다.
이 상황에서 사해방이 대룡방을 통해 한국에 진출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아수라 길드가 새로운 파트너가 되어 준다면 사해방의 한국 진출은 보다 쉬워진다.
‘설마, 아수라 쪽에서 먼저 제안을 한 건가? 힘을 합치자고?’
허태웅 길드장의 호탕한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 허태웅이 중국 세력을 끌어들이다니…….
‘크루세이더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조급해진 건가?’
허태웅 입장에서는 크루세이더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잠시 외부 세력의 힘을 빌린다는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안이한 생각이다.
사해방이 얼마나 탐욕스러운 길드인지 모르는 건가.
“일단 서민혁… 내가 자네를 만나고 싶었던 건, 자네한테 확인할 게 몇 가지 있어서야.”
막야의 행방을 물어보려는 건 아닐 것이다.
서민혁을 의심하고 있다면 여기서 이런 태도로 나올 리가 없다.
“일단… 자네가 왜 그렇게 갑자기 강해졌는지 물어보고 싶었네. 대체 어떤 기연을 얻은 건지 궁금하더군.”
위세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자네가 움직일 때마다 크루세이더 길드가 큰 피해를 입어왔지. 이게 우연인지 아닌지도 확인하고 싶었네.”
“…….”
“자네와 크루세이더 길드 사이에는 뭔가 있어. 그 정체를 알아내고 싶었던 거지. 앞으로 벌어질 크루세이더 길드와의 싸움에서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사해방이 한국에 진출하려고 하고 있다면, 크루세이더 길드와의 싸움은 필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민혁을 통해 뭔가 얻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또 있습니까?”
“황충평의 갑작스러운 회복.”
“…….”
“우리 중국에서도 황충평 같은 상태가 된 헌터가 있었어. 하지만 회복된 사례는 한 번도 없었지.”
서민혁을 쳐다보면서 위세호가 계속 말했다.
“그런데 황충평이 회복되기 시작한 시점과… 자네와 황충평 사이가 돈독해지기 시작한 시점이 비슷하단 말이지? 이게 무슨 뜻일까?”
“글쎄요. 잘 모르겠군요.”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황충평을 치료해 준 거야.”
위세호의 감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서민혁 입장에서는 시치미를 뗄 수밖에 없었다.
“서민혁, 나는 자네가 매우 가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자네를 끌고 가서 강제로 모든 걸 털어놓게 하는 방법도 있어. 하지만 나는 그건 별로 내키지 않아.”
“…….”
“그러니… 자진해서 우리에게 협력해 주면 좋겠네. 어떤가?”
이건 사실상 협박이었다.
‘이러려고 나를 납치하려고 했던 건가.’
예전에 유운청한테 들은 적이 있다.
사해방의 높으신 분이 서민혁한테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고.
그건 아마 이 위세호 얘기였을 것이다.
‘아수라와 손을 잡고 본격적으로 한국에 진출하기로 하였으니…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나를 붙잡아 놓고 탈탈 털어 보려는 속셈이었겠지.’
그리고 서민혁의 태도를 봐서… 아예 사해방의 하수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기 위해 서민혁을 강제로 데려가려 했던 것이다.
‘하는 짓이 너무 거칠어. 이게 대륙 스타일인가?’
자기네 나라도 아니고 한국의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짓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민혁은 몸을 사릴 생각이 없었다.
“위세호 님,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뭐라고?”
“아까 사과 대신 저를 간부로 받아들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자진해서 따라오라고 협박을 하시는군요. 이게 미안해하는 사람의 태도입니까?
“흐음…….”
위세호가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좋습니다. 사과는 안 하셔도 상관없으니, 이것만 약속해 주시죠.”
“약속?”
“저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마십시오. 물론 자동차 보상은 해 주셔야 합니다.”
“…….”
잠시 동안의 침묵.
위세호는 서민혁을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정말로… 당돌한 젊은이로군.”
“안 되겠습니까?”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그냥 뚫고 가는 수밖에 없겠죠.”
“…….”
위세호가 또다시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뒤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소리를 냈다.
“재미있군, 정말로 재미있어.”
“…….”
“헌터가 된 지 석 달밖에 안 된 A급 헌터가… 이 위세호를 뚫고 도망치겠다고?”
그 순간.
감춰져 있던 위세호의 기운이 드러났다.
‘윽……!’
서민혁이 갖고 있는 마력하고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헌터들하고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지.”
위세호가 미소를 유지한 채 말했다.
“30초 주지.”
“30초?”
“이제부터 내가 자네를 공격하겠네. 30초 동안 쓰러지지 않고 버티면 얌전히 물러나지. 물론, 버티지 못하면 얌전히 나를 따라오는 거고.”
“저한테 별 이득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럼 선물도 하나 주지. 이거면 되겠나?”
선물.
과연 어떤 걸까.
“바, 방주님!”
“끼어들지 마라, 유운청. 안 그래도 나는 이 녀석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
하지만 바로 그때.
위세호가 갑자기 휘청거렸다.
다시 한번 노움에게 명령을 내려, 위세호의 발밑 땅을 무너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위세호는 유운청하고는 수준이 다른 인물이니까, 이거 갖고 빈틈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민혁은 일부러 도발의 말을 던졌다.
“30초 사이에 어르신이 쓰러지면 어떻게 됩니까?”
“이 녀석이……!”
도발이 먹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