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이미 30초는 지난 것 같군요 (2)
정령마법은 원시적인 마법이다.
중급자용 심화 마도서를 입수해 보니 훨씬 더 그렇게 느꼈다.
마법 하나하나가 명확히 정리되어 있는 생체마법과 비교하면 정령마법은 정말로 주먹구구였다.
원래 정령마법이란 초자연적 존재와 교류하여 그 힘을 빌리는 원시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샤머니즘을 조금 더 발전시킨 수준인 것이다.
‘정령을 불러내서 일일이 내 뜻을 전달해야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다만, 장점도 있다.
일단 정령 측에서 마법이 발동하기 때문에, 다른 마법처럼 마법사의 머릿속에서 마법이 처리되지 않는다.
정령이 자체적으로 마법을 처리하므로 마법사의 부담이 적다.
‘물론, 내 마력이 소비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말이야.’
또한 정령과의 유대도가 높아지고 정령마법의 숙련도도 올라가면 일일이 구두로 지시를 내려야 할 필요도 없어진다.
6레벨에 도달한 지금 시점에서는 웬만한 건 눈짓이나 손짓만으로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정령들이 알아서 마법을 써 주면 내 부담이 줄어들지.’
하지만 정령마법의 가장 큰 장점은 따로 있었다.
자연의 힘을 조종하는 마법이기 때문에, 자연의 힘이 강한 곳에서는 마력을 조금만 써도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샐러맨더라면 화산이나 용암 지대, 실프라면 바람이 강하게 부는 고산지대 등에서 그 힘이 더 강해진다.
‘인공적인 구조물로 가득한 현대 한국에서는 이걸 활용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지.’
한강 공원 쪽으로 이동하면서 서민혁은 배후를 살폈다.
“저기다!”
“잡아!”
검은 옷을 입은 괴한들이 어둠 속에 숨어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귀를 기울여 보니…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전부 중국어였다.
‘사해방 놈들이야. 다들 상당한 실력자고.’
직접 붙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중국에서 실력 있는 헌터를 여러 명 데려온 모양이다.
대룡방의 황충평 몰래 말이다.
‘크루세이더와 싸우다가 큰 피해를 입고 중국에 돌아갔으면서, 다시 부하들을 데리고 돌아온 건가?’
서민혁이 막야를 빼앗고, 크루세이더와 싸우도록 계략을 꾸몄다는 걸 눈치챈 걸까.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사해방의 배신자인 연소청뿐이다. 사해방을 증오하는 그 녀석이 정보를 흘렸을 리는 없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너희들 마음대로는 안 될 거다.’
뽑은 지 한 달밖에 안 된 애차가 사고차량이 되었다.
서민혁 입장에서는 평소보다 더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곳이 무한서고 바깥이라는 점.’
무한서고 안에서는 칼부림이 벌어져도 큰 문제가 안 된다. 나라에서는 거의 개입하지 않고, 헌터들 사이에서 처리하게 된다.
하지만 무한서고 바깥에서는 아니다. 시민들의 눈도 있기 때문에 폭행, 상해, 살인 등으로 체포되어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 특히 헌터용 무기를 사용했을 경우에는 훨씬 무거운 처벌이 내려진다.
‘지금 나한테는 아무런 무기가 없어. 저놈들도 헌터용 무기는 안 갖고 온 것 같지만…….’
헌터용 무기에서는 마력을 느낄 수 있다. 높은 랭크의 무기일수록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데, 지금 저놈들한테는 헌터 개인의 미약한 생명 에너지만 느껴진다.
SS랭크 무기인 ‘간장’의 기운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유운청이 간장을 들고 나왔다면 좀 위험했는데… 다행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민혁은 그들을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유인했다.
공원을 뛰어넘어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다.
바로 옆에 강물이 있는 위치였다.
“후우…….”
뛰느라 지친 것처럼 억지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서민혁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중국 헌터들을 제압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 * *
더 이상 도망치기 어렵다는 걸 깨달았는지, 서민혁이 강가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포위해.”
“네, 형님!”
유운청의 지시에 따라 부하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강을 등진 서민혁을 둘러싸고,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제 지친 것인가?”
“더 이상 도망치지 마라.”
“너를 해칠 생각은 없다.”
“그냥 따라오기만 해라.”
서민혁은 부하들이 서툰 한국어로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
“음?”
“내 차, 어떻게 배상할 거지?”
서민혁이 갑자기 중국어로 말하자 그들은 눈을 크게 떴다.
“내 첫차였어. 한 달 정도밖에 안 탔다고.”
“지금 차가 중요한가?”
“중요하지.”
“…….”
서민혁의 말을 듣고, 부하들이 유운청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얌전히 항복할 것 같은 분위기는 아니다.
유운청은 그냥 강제로 제압하라고 눈짓을 했다.
‘수적 우세를 이길 수는 없겠지.’
지금까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서민혁의 능력치는 A급 수준이라고 한다.
다만, 특수한 장비를 사용하여 전투력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무한서고 밖이다. 서민혁은 아무 장비도 안 하고 있다. 왼쪽 손에 건틀릿을 끼고 있을 뿐이다.
만약, 서민혁이 인벤토리에서 장비를 꺼낸다고 해도 이쪽 헌터들이 제압하는 게 더 빠르다.
‘지난번에 한번 건드려 봤을 때는 A급답지 않은 힘을 갖고 있었지만… 이렇게 머릿수가 많으면 상대하기 어렵겠지.’
유운청의 부하들이 일제히 서민혁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들 A급 헌터이고, 무술 실력이 뛰어나다. 맨손 싸움으로 서민혁이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
하지만.
갑자기 이변이 발생했다.
유운청의 부하들이… 갑자기 자기 얼굴을 감싸 쥐며 발버둥치기 시작한 것이다.
“우웁!”
“웁! 웁!”
생각지도 못한 사태.
다들 얼굴을 쥐어뜯는 것처럼 버둥거리면서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유운청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유운청이 경계하면서 주춤하고 있는 사이 서민혁이 움직였다.
그는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유운청의 부하들을 차례차례 제압했다. 주먹으로 날려 버리기도 하고 잡아서 던져 버리기도 했다.
한 명씩 강물에 빠지는 걸 보면서도, 유운청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저건…….’
유운청은 알 수 있었다.
부하들은 서민혁의 공격만 받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모종의 힘이 작용하면서 ‘강물 쪽으로’ 끌어당겨지고 있었다.
풍덩 소리와 함께 강물 속에 처박히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면서 유운청은 전율했다.
‘물귀신이라도 있는 건가?’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유운청은 간장을 갖고 오지 않은 걸 후회하기 시작했다.
* * *
‘이 정도면 됐나?’
유운청을 제외한 중국 헌터들을 모조리 물속에 처박은 뒤, 서민혁은 강물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곳에는… 반투명한 소녀 요정이 이쪽을 보면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운디네도 쓸 만하단 말이야.’
운디네.
정령마법으로 불러낼 수 있는 물의 정령이다.
당연히 물을 조종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서민혁은 운디네의 힘을 실전에서 사용한 적이 없었다.
‘물이 없으면 힘을 발휘하기 어렵거든.’
게임 같은 곳에서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물대포를 날리기도 하지만, 정령마법으로 소환할 수 있는 운디네는 물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샐러맨더는 공기 중의 산소를 마력과 반응시켜 불을 만들어 내고, 실프는 공기를 마력으로 조종하여 바람을 만들어 내지만… 운디네 자체적으로 물이라는 물질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소량이면 공기 중의 수증기를 모아서 만들 수 있는 것 같지만, 적을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대량의 물은 만들 수 없어.’
이건 땅의 정령인 노움과 비슷하지만, 땅바닥만 있으면 되는 노움과는 달리 운디네는 사용 조건이 더 빡빡하다.
충분한 양의 물이 없는 곳에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는 엄청난 양의 물이 있지.’
한강은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치고는 매우 큰 규모의 강이다.
무한서고에서도 이 정도로 많은 물이 흐르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한 양의 물을 끌어올 수 있고… 물의 자연력 또한 엄청나게 강하다.
‘A급 헌터 여러 명 질식시키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방금 중국 헌터들이 숨을 못 쉬고 발버둥친 것은, 운디네가 물을 조종하여 그 머리에 물을 뒤집어씌웠기 때문이다.
갑자기 머리만 물에 빠진 것 같은 상태가 된 중국 헌터들은 순식간에 무력화되었고, 운디네에 의해 강물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물론, 익사시키지는 않을 생각이다. 한강에서 중국 헌터 여러 명의 익사체가 발견되면 큰 문제가 될 테니까.
‘하지만 두 번 다시 덤벼들지 못할 정도로는 손을 봐 줘야지.’
이제 남은 것은 한 사람.
우두머리인 유운청뿐이다.
“유운청 씨.”
“……!”
이름을 부르자 유운청이 흠칫했다.
“무, 물귀신과 함께하고 있는 겁니까?”
“네?”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똑똑히 봤습니다! 이상한 힘에 의해 물속으로 끌려가는 걸……!”
어두워서 정확히는 못 본 것 같지만, 뭔가 눈치채긴 한 것 같다.
“물귀신이라니 대체 무슨 소립니까? 지금은 21세기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
내가 한쪽 손을 치켜든 순간, 운디네가 호응해서 물보라를 일으켰다.
유운청은 그걸 보면서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귀신 같은 걸 많이 무서워하는 성격인 걸까.
“유운청 씨, 사과해 주시죠.”
“사, 사과?”
“제 차를 망가뜨리고, 우르르 몰려와서 저를 위협한 것 말입니다. 사과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리고 배상도 해 주셔야죠.”
이건 당연한 요구였다.
유운청이 이걸 받아들일 리는 없지만 말이다.
“서민혁 씨.”
“네.”
“오늘 저희는 서민혁 씨를 어딘가로 모셔가기 위해 찾아온 겁니다.”
“그러면 정식으로 초대를 했어야죠. 무슨 용건인지 밝힌 다음에 말입니다.”
유운청은 서민혁을 납치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좋은 용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저를 데려가서 뭘 어쩌고 싶어서 이런 짓을 벌인 겁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어쩌실 겁니까?”
“강제로 데려가는 수밖에 없겠죠.”
유운청이 주먹을 쥐고 자세를 잡는 모습이 보였다.
중국 권법 같은 자세였다.
‘나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고수겠지.’
조성조 밑에서 헌터용 전투술을 잠깐 배웠을 뿐인 서민혁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실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S급 헌터이니만큼 육체 능력도 뛰어날 테고, 맨몸으로도 어마어마한 전투력을 발휘할 것 같았다.
‘생체마법만으로는… 상대하기 어렵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운디네로 유운청을 질식시킬 생각은 없었다.
유운청 정도의 인물이라면 서민혁이 ‘마법’을 쓴다는 걸 눈치챌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갑니다.”
유운청이 땅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이대로 접근해서 공격을 펼친다면, 서민혁은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
쿠웅!
유운청이 갑자기 앞으로 휘청거렸다.
이유는 단순하다.
유운청의 발밑이 갑자기 푹 꺼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흙이 솟구쳐 유운청의 발목을 붙잡았다.
‘S급 헌터인 유운청의 발을 묶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미리 준비를 해 두면 가능하지.’
지금 유운청의 발밑에서는 수염이 덥수룩한 난쟁이 요정… 땅의 정령인 노움이 두더지처럼 고개를 내밀고 하품을 하고 있었다.
서민혁이 운디네와 함께 불러내서 미리 세팅을 해 놨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프의 힘을 빌려 바람처럼 움직였다.
균형을 잃고 빈틈을 보인 유운청을 향해 전광석화 같은 발차기를 날렸다.
뻐억!
시원한 소리와 함께 유운청의 턱이 옆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