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자비 없는 칼부림과 불타오르는 사원 (3)
사체 기억 재생.
이름 그대로 시체에서 기억을 뽑아내는 사령 마법이다.
다만 인간의 기억은 방대하기 때문에, 원하는 기억을 정확히 얻어내는 건 숙련된 사령 마법사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몇 가지 꼼수는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져 놓고, 그 직후에 죽여 버리는 거지.’
상대방은 죽기 직전까지 질문의 대답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방금 전까지 떠올리고 있었던 기억은 사체 기억 재생을 사용할 때도 가장 먼저 튀어나오게 된다.
그걸 지침 삼아 탐색하다 보면 원하는 정보를 얻어낼 수 있다.
‘윽……!’
지금 서민혁은 눈앞에서 수만, 수억 개의 영상이 동시에 재생되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앞쪽에 떠 있는 영상에 의식을 집중시키자, 곧바로 그 내용이 머릿속에 흘러들어 왔다.
‘이게 도노반과 크루세이더의 관계……!’
머릿속에서 영상이 재생되었다.
크루세이더의 김진우 길드장과 미스터 도노반이 비밀스러운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다만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박준형도 대화의 내용은 듣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밖에도 연관 영상처럼 여러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서민혁은 도노반과 크루세이더 길드 사이의 관계를 확인했다.
‘도노반은 크루세이더하고 단순한 제휴 관계를 맺고 있는 게 아니야. 크루세이더의 목적을 알고,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관계… 동반자 내지는 후원자라 할 수 있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크루세이더 자체만으로도 거대한 적인데, 그 뒤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 중 한 명인 도노반까지 있었다니…….
‘하지만 이걸로 크루세이더 길드의 실체에 더 가까워진 셈이야.’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하면서 더 정보를 살피려 했다.
다음으로 궁금한 건 지금 김진우의 동향이었다.
‘가짜 석판을 계기로 아수라와 대룡방을 충돌시켜 전쟁을 벌이는 계획은 실패했어. 이제 어떻게 나올까.’
동영상 사이트에서 연관 영상을 계속 눌러보는 것처럼, 박준형의 기억을 파고들었다.
그러던 도중 비교적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영상을 확인했다.
‘탁상 위에 있는 달력이 이번 달이야. 그렇다면…….’
김진우가 박준형 뿐만 아니라 김태호, 윤혜원 등을 모아 놓고 무슨 설명을 하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알고 싶어서 서민혁은 정신을 집중했다.
‘중국 얘기인 건가?’
김진우는 현재 중국 헌터계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간부들을 보면서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들의 표적은 사해방, 이라고?’
사해방.
그건 서민혁도 잘 아는 이름이다.
중국 최대의 헌터 길드이자… 한국의 대룡방 길드를 지원해 주고 있는 곳이니까.
‘사해방을 뭘 어쩌려는 거지?’
김진우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서민혁은 영상을 다시 앞으로 되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윽……!”
갑자기 유리가 깨지는 것처럼 영상들이 산산조각 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 서민혁은 박준형의 시체 앞에서 주저앉아 있었다.
“효과가 끊긴 건가…….”
사체 기억 재생으로 사람의 모든 기억을 끌어낼 수는 없다.
어느 정도 기억을 얻어내면 시체의 영혼에 과부하가 걸린다고 한다. 그러면 두 번 다시 기억을 끌어낼 수 없다.
지난번에 해골 마법사를 되살렸을 때처럼 기억을 지닌 언데드로 되살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해골 마법사가 원래부터 그런 언데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고, 박준형 상대로는 사체 기억 재생으로 일부 기억을 끌어내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지.’
크루세이더 길드가 도노반과 협력 관계라는 것.
다음 표적이 중국의 사해방이라는 것.
그걸 알아낸 것만으로도 상당한 수확이다.
‘그런데 사해방이라…….’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크루세이더 길드는 중국 쪽하고 인연이 없었을 텐데, 대체 왜 그 이름이 나오는 걸까.
‘회귀하기 전에 사마윤이 끌어들인 중국 세력이 바로 사해방이었어.’
원래 사해방은 대룡방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황충평은 그들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중국 헌터들이 직접 한국에 진출하는 건 막으려 했다.
하지만 사마윤은 다른 길드와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중국 헌터들을 직접 불러들였다.
원래 중국에서는 한국 헌터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중국 헌터들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활개치고 다니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내가 사마윤을 조기 퇴장시키면서 뭔가 바뀐 건가?’
잠시 고민해 봤지만, 여기서는 답을 알 수 없었다.
나중에 황충평도 만나보면서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지금은 일단…….’
서민혁은 박준형의 시체에서 장비를 회수했다.
무기나 갑옷은 암흑 마법 검기로 박살을 내놨기 때문에 쓰레기가 되었지만, 탐나는 물건이 있었다.
[플레임 이터]
* 랭크: S
* 화염 흡수, 화염 방출 가능.
# 불꽃의 정령왕의 축복을 받은 대장장이가 완성한 화염 포식자. 화염을 모조리 집어삼키며, 그 집어삼킨 화염을 방출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게 플레임 이터였나!’
회귀하기 전에 들어본 적이 있다.
이름대로 화염을 먹어 치우는 장비로, 몬스터의 화염 공격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고 명성이 높았다.
레드 드래곤의 화염 브레스 같은 게 아니면 모조리 흡수할 수 있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먹는 걸로 끝이 아니라고?’
설명을 보니 집어삼킨 화염을 방출하는 기능도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흡수한 화염의 에너지가 계속 누적이 될 테니, 그걸 배출하는 방법도 있어야 한다.
‘폭발 사고 뉴스를 봤던 것 같은데, 이것 때문인가?’
마도 언어를 모르는 일반 헌터들은 그냥 화염을 먹어 치우는 흡수 기능만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름도 플레임 이터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먹어 치운 화염을 방출할 수도 있는 공방일체의 장비였던 것이다.
“근데 어떻게 쓰는 거지?”
서민혁은 손목 보호구 형태의 플레임 이터를 장비하고 여기저기 만져봤다.
“업화의 단검과 비슷한 원리일 것 같은데… 아.”
마력이 반응하는 감각이 느껴진 그 순간.
엄청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헉!”
콰콰콰콰쾅!
지금까지 플레임 이터가 집어삼켜왔던 화염이 모조리 방출된 것 같았다.
그동안 서민혁이 펼쳤던 모든 화염 공격을 합친 것보다도 더 엄청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깜짝 놀랐는지 주머니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샐러맨더가 고개를 내밀고 쳐다보기까지 했다.
“이런 젠장…….”
서민혁은 욕설을 내뱉었다.
그동안 누적되어 온 화염을 본의 아니게 모조리 날려 버렸다.
이 정도 화염이라면 러시아에서 봤던 화이트 드래곤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크아아아아아아!”
그때 사원 안쪽에서 무시무시한 포효가 들려왔다.
서민혁은 잠깐 허를 찔렸지만, 곧바로 이게 누가 내는 소리인지 깨달았다.
“보스인가?”
이 사원 깊숙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갑옷 무사들의 대장.
중간 보스들을 쓰러뜨리고 찾아올 도전자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갑자기 사원 전체에 엄청난 화재가 발생해 버렸다.
“설마 보스가 이 화재에 불타 죽지는 않겠지……?”
보스 퀘스트는 어디까지나 헌터가 보스 앞에 도달했을 때 시작되는 것이다.
퀘스트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보스가 죽어 버리면 대체 어떻게 될까.
클리어 보상은 얻을 수 있는 걸까.
“난감한데 이거…….”
보스가 화재 때문에 불타 죽지는 않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이곳의 봉인 마도서도 얻어야 하고, 보스방에 도달하기도 전에 보스가 죽는 건 막아야 했다.
“이걸 어떻게 끄지? 물의 정령이라도 소환해야 하나?”
방법을 고민하다가, 서민혁은 자기 손에 플레임 이터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걸로 다시 빨아들여 보면…….”
서민혁은 플레임 이터를 치켜들어 화염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흡수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지 않았다. 결코 느린 건 아니지만, 화염을 다 빨아들이기 전에 사원이 전소(全燒)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서민혁은 화염을 전부 다 집어삼키는 걸 포기했다.
그 대신 불이 많아서 신이 난 듯한 샐러맨더한테 말을 걸었다.
“꼬맹아, 네 주인 불타 죽지 않도록 도와줘라.”
그렇게 부탁을 한 뒤, 서민혁은 무기를 잡고 불길을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보스가 불타 죽기 전에 보스방에 도착해 보스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하니까.
“이 사원을 만든 마법 문명 놈들도… 이렇게 활활 불타오르는 스테이지가 될 거라고는 예상 못했겠지.”
불타는 사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갑옷 무사와의 급박한 단판 승부.
마법 문명의 제작자들도 예상 못한 시추에이션에서, 서민혁은 처절한 싸움을 하게 되었다.
* * *
16번 무한서고의 보스 퀘스트를 클리어한 뒤.
서민혁은 불타는 사원을 뒤로하고 무한서고를 빠져나왔다.
바깥에는 크루세이더 길드의 헌터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박준형이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리자 다들 다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내부는 여전히 활활 불타오르고 있기 때문에 시체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나하고 함께 행동한 크루세이더의 헌터들이 연속으로 죽어 나가면… 좀 말이 나오겠는데.’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불타오르는 사원에서 갑옷 무사 대장과 결전을 치르느라 너무 고생했기 때문이다.
서민혁은 지친 몸으로 자동차를 운전해 집으로 돌아갔다.
“민혁아, 머리가 왜 그래? 파마 했어?”
“아니거든요…….”
불에 그슬린 머리카락을 보고 깜짝 놀라는 어머니한테 대충 대꾸한 뒤, 서민혁은 자기 방에 들어가 침대 위에 엎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다급히 빠져나오느라 봉인 마도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서민혁은 인벤토리에서 오늘 얻은 마도서를 꺼냈다.
“제목이… 호신(護身)의 서(書)라고 되어 있는 건가?”
호신의 서.
그것이 이번에 16번 무한서고에서 입수한 마도서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좀 문제가 있었다.
“이것도 소드마스터 입문처럼 마법사를 위한 게 아니잖아…….”
소드마스터 입문과 마찬가지로 마도서 아닌 마도서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술 관련 서적이었다.
“그 갑옷 무사들하고 관계있는 건가?”
서민혁은 사전에 16번 무한서고에서 발견된 책을 입수하여 내부 정보를 파악한 상태였다.
사원에서 싸웠던 갑옷 무사들은 본래는 무술을 단련하던 인간 무사들이다. 모종의 사정으로 원통하게 죽은 뒤 갑옷만으로 움직이는 일종의 언데드 내지는 리빙 아머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이 호신의 서는 그 무사들이 단련하던 무술과 관련된 책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것도… 기술이 아니라 정신론 위주 같단 말이지. 약간 불교 같기도 하고.’
한번 훑어봤지만, 너무 내용이 어려워서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피곤하기도 하고, 졸음까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한숨 자고 읽어야지.’
자기 회복 마법을 써서 억지로 버티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서민혁은 포기하고 책을 덮어 버렸다.
‘호신, 호신이라…….’
설마 무협소설에 나오는 호신강기를 배울 수 있는 책은 아니겠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서민혁은 책을 베개 삼아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