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자비 없는 칼부림과 불타오르는 사원 (1)
16번 무한서고는 동양풍 사원 필드다.
초기에 태산 길드가 자기들에게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공략을 진행했지만, 결국 완전히 실패하고 크루세이더 길드가 배턴을 이어 받았다.
하지만 크루세이더 길드 측에서도 공략에 성공하지 못했다. 김진우 길드장이나 김태호 팀장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스케줄이 안 맞아서 계속 미뤄졌고, 결국 다른 무한서고 공략이 우선되어 16번 무한서고는 공략 보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서민혁 헌터가 도와주신다면 클리어 가능할 겁니다. 러시아에서도 큰 활약을 했다고 윤혜원 팀장이 말하더군요.”
지금 서민혁은 박준형 부팀장과 함께 16번 무한서고에 와 있었다.
다만 다른 헌터 없이 두 사람만 있었다.
“다른 사람은 없군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여러 명이서 도전한다고 클리어할 수 있는 퀘스트가 아니니까요.”
이 무한서고 안에는 ‘갑옷 무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들을 ‘일대일 대결’로 싸워서 쓰러뜨리는 것이 이곳에서 주어지는 주된 퀘스트다.
그러니 다른 부하들이 있어도 퀘스트에 참가할 수는 없다.
박준형 같은 S급 헌터들만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서민혁은 마력기관으로 주위를 파악했다.
철저히 기척을 숨기고 있지만, 마력기관을 지닌 서민혁한테는 전부 다 들통 날 수밖에 없다.
‘여덟 명 정도인가? 박준형의 심복이겠지.’
예전에 싸웠던 대룡방 흑살대보다 은신술이 뛰어나다.
개개인의 역량도 훨씬 뛰어날 것이다.
“최근 습격을 받으셨다고 하더군요.”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크루세이더 길드는 국내 1위의 길드입니다. 정보력도 뛰어나지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말하는 박준형을 보면서, 서민혁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박준형도 서민혁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놓고 시치미를 뗀다는 건, 서민혁한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나하고 한번 붙어 볼 자신이 있냐는 거지.’
겁나면 꽁무니를 빼고 도망치라는 얘기다.
그리고 이건… 서민혁의 자존심을 자극해, 자신과의 승부에 나서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구도를 만들어 놓고, 부하들을 이용해 나를 기습하려는 건가.’
치졸할 정도로 교활한 놈이다.
하지만 덕분에 마음도 확실해졌다.
‘용서 없이 짓밟아 주면 되겠군.’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민혁은 박준형과 함께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 * *
[중견과의 혈전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8억 크레딧을 획득합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무사의 팔보호대를 획득합니다.]
서민혁이 갑옷 무사를 쓰러뜨리자,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박준형이 박수를 쳤다.
“훌륭하군요.”
“이번 놈은 좀 어려웠네요.”
서민혁과 박준형은 서로 번갈아 가면서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있는 중이었다.
갑옷 무사와의 일대일 대결 퀘스트가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아마 다음이 보스 퀘스트일 것 같군요. 그때는 제가 나서겠습니다.”
“아직 체력에 여유가 있습니다. 제가 나서도 될 것 같은데요.”
“하하, 번갈아 가면서 클리어하는 약속이었을 텐데요. 제가 보스한테 죽으면 그때 서민혁 헌터가 도전해 주시죠.”
겉으로 보기에는 화기애애한 대화였다.
박준형의 음모만 없었다면 서로 우정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죄송하지만 잠깐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화장실이십니까? 천천히 다녀오시죠.”
서민혁은 박준형을 내버려 두고 자리를 이동했다.
목조 건물의 통로를 지나, 으슥한 곳으로 이동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정말로 용변을 해결할 곳을 찾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그동안 기회를 엿보던 박준형의 부하들이 접근해 오는 걸 느꼈다.
‘그래, 이쯤에서 습격해야지.’
서민혁은 여러 퀘스트를 클리어하느라 지친 상태다.
여기서 서민혁을 습격해서 죽여 버리고, 나머지 보스 퀘스트는 박준형이 클리어해 버리면 된다.
그리고 ‘서민혁 헌터는 불행히도 퀘스트 진행 도중에 사망했습니다.’라고 발표하면 끝나는 거다.
‘물론…….’
적당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서민혁은 바지 지퍼를 내리려는 척 하면서 인벤토리를 조작했다.
그리고 방금 입수한 팔보호대를 꺼내… 후방을 향해 집어던졌다.
“끄억!”
은신 아이템을 사용해 배후에서 접근하던 헌터가 뒤로 넘어졌다.
비명 소리를 들으니 정확히 급소에 명중한 것 같았다.
‘노린 건 아니었는데 말이야.’
서민혁은 즉각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갑자기 날아온 표창이 서민혁이 있던 자리에 꽂혔다.
‘벽에 박히는 걸 보니 위력이 상당하군.’
여덟 명의 자객들.
다들 완벽한 은신술을 쓰고 있었지만, 서민혁한테는 의미 없는 얘기였다.
‘위치를 다 파악할 수 있으니까.’
마력기관의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하면서, 서민혁은 업화의 단검을 꺼내들었다.
* * *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A급 헌터인 전태석은 박준형의 심복으로 그동안 많은 일을 처리해 왔다.
세상 사람들은 크루세이더를 정의롭고 모범적인 길드라 생각하지만, 뒤에서는 더러운 짓도 많이 하고 있다.
전태석은 그런 짓을 전담해 온 헌터이며, 그동안 다양한 경험을 쌓아 왔다.
하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감각 스탯이 100을 넘어가는 헌터도 우리들 은신술을 간파할 수는 없는데?!’
여덟 명 있었던 자객들은 이미 절반이 쓰러진 상태였다.
다들 완벽하게 투명해진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서민혁은 전부 다 보인다는 것처럼 거리낌 없이 공격을 펼쳤다.
“크악!”
방금도 동료 하나가 서민혁의 칼을 맞았다.
은신이 풀리면서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흩어져!”
나머지 두 명에게 지시를 내리며 전태석은 재빨리 움직였다.
‘박준형 부팀장님… 이런 놈이라는 얘기는 없었잖아요!’
전태석은 상사를 원망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커헉!”
서민혁이 집어던진 단검 하나가 공중에 박히며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서민혁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날렸고, 공중에서 주먹을 휘두르자 나머지 한 사람까지 땅에 처박혔다.
“으윽!”
“크으으으…….”
동료들이 죽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전태석은 이를 악물었다.
인벤토리에서 새 무기를 꺼내면서 은신을 위한 장비를 벗어던졌다.
“이 자식……!”
혼자 남은 전태석은 바스타드 소드를 두 손으로 잡고 달려들었다.
은신 상태에서는 쓸 수 없지만, 원래 전태석의 주무기는 이런 중대형 무기였다.
한편 서민혁은 양손에 새로 단검 두 자루를 꺼내든 상태였는데,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앞으로 불쑥 나가면서 왼팔로 상대편 오른팔을 바깥쪽으로 밀어내고…….”
캉!
전태석의 바스타드 소드가 서민혁의 왼쪽 단검과 부딪히며 바깥으로 밀려 나갔다.
“오른팔을 뻗어서 몸통의 빈틈을 노린다.”
푸욱!
서민혁의 오른쪽 단검이 전태석의 가슴에 꽂혔다.
마치 빨려 들어가듯이, 엄청난 스피드로.
“크, 헉…….”
전태석은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뒤쪽에서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보자, 박준형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부, 부팀장님, 치료를…….”
전태석의 목소리를 듣고, 박준형은 표정 변화 없이 냉정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전태석은 절망에 휩싸였다.
“이런, 젠장…….”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전태석은 눈을 감았다.
* * *
전태석이 쓰러지는 걸 확인한 뒤, 박준형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서민혁 헌터,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사람들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대기하고 있던 크루세이더의 길드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습격해서 다 죽여 버린 겁니까?”
“…….”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군요.”
그렇게 트집을 잡자, 서민혁이 피식 웃는 게 보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슬슬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박준형 팀장님.”
서민혁이 무기를 정리하면서 말했다.
“오늘 여기서 저를 죽이겠다고 말입니다.”
“…피해망상이 있으시군요, 서민혁 헌터.”
박준형은 시치미를 뗐다.
물론 이게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건 박준형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러는 건… 크루세이더는 언제나 정당해야 한다는 것이 김진우 길드장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죄송하지만 그냥 넘어가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웃기는군요.”
서민혁은 지금 오른손에 주무기인 업화의 단검을 들고 있다.
사마윤이 주로 쓰던, 화염을 방출하는 기능을 지닌 단검이다.
‘서민혁은 저걸 자유자재로 다루지.’
화염을 응축시켜 단검의 위력을 상승시키기도 하고, 화염의 크기를 키우거나 갑자기 발사하기도 한다.
이런 건 사마윤이 못하던 짓이다.
‘서민혁이 업화의 단검의 숨겨진 기능을 밝혀냈다? 그런 건 아니야.’
서민혁은 화염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모종의 아이템을 지니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서민혁이 그동안 엄청난 실적을 올린 비결이다.
‘업화의 단검을 든 사마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도, 업화의 단검을 입수한 뒤 갑자기 엄청나게 강해진 것도, 다 그것 때문이지.’
화염을 사용하지 않으면 서민혁은 생각보다 별 볼일 없다.
A급 중에서도 하위권들만 모인 팀 애쉬 상대로도 한참 애를 먹었으니까.
기술도 단순한 것 같았고, 박준형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 놈, 굳이 우리가 좋은 조건 제시하며 영입할 필요는 없어.’
서민혁한테 그 정도 가치는 없다.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박준형은 서민혁을 자기 손으로 꺾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한 준비도 갖춘 상태다.
‘S랭크 장비, 플레임 이터.’
지금 박준형이 왼손의 인피니티 건틀릿 위에 장착한 장비는,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손목 보호대 같았다.
하지만 그 정체는 몬스터의 화염 공격을 모조리 빨아들여 버리는 화염흡수 장비였다.
‘화염에 내성이 있는 장비는 많지만… 이렇게 아예 화염을 흡수해 무효화시키는 장비는 드물지.’
서민혁의 화염을 모조리 빨아들여 무력화시키고, 지금 오른손에 들고 있는 S랭크 무기 블러드 아밍 소드로 밀어붙인다.
박준형이 특기로 하는 현란한 검술이라면 서민혁의 단순한 기술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서민혁의 현재 스탯은 350 전후일 거야. 특수한 장비로 육체능력을 끌어올린다고 해도, 600에 근접한 나를 이길 수는 없겠지.’
현재 박준형의 스탯은 근력 +140, 체력 +170, 민첩 +125, 감각+140이다.
서민혁은 모종의 방법으로 스탯 이상의 육체능력을 발휘하는 것 같지만, 주무기인 화염 공격이 봉쇄된 상태에서는 승산이 없다.
박준형은 승리를 확신하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
서민혁은 입을 꾹 다문 채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업화의 단검에 화염을 응축시키려는 것으로 보였다.
“……?”
하지만 바로 그때.
서민혁이 들고 있는 칼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저게 뭐야?’
크루세이더 내부에서 확보한 정보에 의하면, 서민혁은 화염을 응축시켜 칼날에 붉은 기운을 코팅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서민혁의 칼날은 이상한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왜… 시커먼 기운이 코팅되고 있는 거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색깔.
빛을 집어삼키는 흑색 기운이 서민혁의 칼날에 응축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