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눈보라를 찢어발겨라 (1)
“대표님.”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조성조는 박나영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부대표님, 러시아에서 별일 없으실까요?”
“민혁이? 걔는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외국에 처음 나가시는 거라 들었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외국이라고 해서 뭐 특별한 건 없어. 민혁이는 러시아말도 잘하는 것 같았고 말이야.”
지난번에 러시아에서 온 서류 때문에 조성조가 끙끙대고 있었을 때, 서민혁은 한번 쓱 보더니 내용을 다 해석해 줬다.
“상당히 위험한 퀘스트라 들었거든요. 현지 헌터들이 클리어하지 못했으니까 우리 한국 헌터들한테도 기회가 돌아온 거잖아요.”
“음… 러시아는 좀 특수해서 말이야.”
러시아는 모든 헌터가 국가 소속이다.
하지만 이런 체제 때문에 현장이 태만해지는 일이 많다고 한다. 조금만 귀찮은 퀘스트가 발생하면 곧바로 공략을 보류해 버리는 식으로 말이다.
예전 공산주의 시대를 연상케 하는 풍조였다.
“크루세이더가 검토해 보고, 충분히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 결론을 내린 안건이야. 그러니 그리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그럴까요?”
“그래, 만약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조성조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민혁이 그 녀석이라면 잘하겠지 뭐.”
* * *
소비엣스키 무한서고에 새로 발견된 고난이도 퀘스트.
그것은 필드 구석에 있는 삼림지대에서 출몰하는 오우거 집단을 사냥하는 것이었다.
‘오우거는 제법 강한 몬스터야.’
오우거는 인간에 가까운 형태를 지닌 식인귀다.
힘이 세고 생명력이 강하며, 평균적인 전투 능력은 예티 이상이다.
그래도 S급 헌터를 중심으로 A급 헌터 여러 명을 투입하면 충분히 몰살시킬 수 있다.
‘그래도 이번 퀘스트가 조금 까다로운 건… 오우거 메이지가 있기 때문이야.’
오우거 메이지는 이름대로 마법을 쓰는 오우거다.
지난번에도 마법을 쓰는 고블린 샤먼을 상대한 적이 있지만, 오우거 메이지가 쓰는 마법은 고블린 샤먼보다 훨씬 수준이 높다.
뛰어난 육체능력을 지닌 오우거들이 오우거 메이지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격해 들어오면 상대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나하고 윤혜원 등 크루세이더 길드의 정예들이면 충분히 클리어 가능하겠지.’
굳이 서민혁이 아니더라도 크루세이더 길드에서 S급 헌터 한두 명만 더 데려왔어도 클리어할 수 있을 것이다.
서민혁이 보기에는 그 정도 수준의 퀘스트였다.
“서민혁 씨, 저쪽이에요.”
지도를 확인하면서 윤혜원이 전방에 보이는 숲을 가리켰다.
“상당히 많은 수의 오우거가 나올 거예요. 오우거 메이지도 있으니, 이번에는…….”
“걱정 마세요. 여기서까지 단독 행동할 생각은 없으니까.”
능력치 보너스를 얻기 위한 상설 퀘스트하고는 다르다.
여기서는 크루세이더와 협력하면서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게 정답이다.
“저쪽에 바위가 있네요. 저기서 대형을 만들겠습니다.”
적당한 거리에 도달하자, 2미터가 넘는 크기의 방패를 든 헌터들이 앞으로 나왔다.
상대가 마법 공격을 할 경우, 이렇게 탱커가 앞으로 나와서 방어해 주는 게 정석적인 전략이다.
“전진!”
윤혜원이 지시를 내리자 부하들이 대형을 갖추고 전진을 시작했다.
이 상태로 전진하다가 오우거들이 튀어나오면 맞서 싸우게 될 것이다.
“오우거들이 나옵니다!”
“방어 확실히 하고! 마법에 주의해!”
크루세이더 길드의 일사불란한 움직임.
서민혁은 크루세이더 길드에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지만, 훈련이 잘되어 있다는 건 인정해야 했다.
‘대룡방이나 북두성보다는 확실히 나은 편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민혁은 그들과 함께 오우거들과의 전투를 시작했다.
* * *
전투는 2시간 정도 이어졌다.
오우거 메이지는 무려 다섯 마리나 있었다. 그들이 펼치는 공격 마법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크루세이더 길드의 탱커들은 그 마법을 제대로 막아내 줬다.
‘역시 S급 헌터라서 그런지, 윤혜원도 실력이 괜찮았어.’
윤혜원은 주무기인 장창을 휘두르면서 큰 활약을 했다.
A급 헌터인 김은영도 생각보다 실력이 괜찮았다.
덕분에 서민혁도 비교적 여유롭게 싸울 수 있었다.
“고맙습니다, 서민혁 씨.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빠르게 클리어할 수 있었네요.”
“아닙니다. 크루세이더 여러분의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죠. 제가 없었어도 클리어 가능했을 겁니다.”
“아하하, 그러면 시간도 오래 걸렸을 테고, 아군 피해도 컸겠죠.”
윤혜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이제 볼일도 끝났고 그만 귀환하죠. 러시아하고도 여기까지만 하기로 얘기를 해놨고, 포션 소비량도 꽤 많았으니…….”
바로 그때.
갑자기 숲 속에서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무슨 바람이 이렇게…….”
안 그래도 아까부터 점점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군요. 빨리 이탈하는 게 좋겠습니다.”
“네, 이제 바로… 앗!”
휘이이이이잉!
갑자기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이건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기후 변화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런 얘기 못 들었는데?!”
“설마… 결계형 보스 퀘스트?!”
크루세이더의 길드원들도 당황해했다.
‘어떻게 된 거지?’
서민혁은 숲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눈보라가 점차 거세져 한 치 앞도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 바람, 잠재울 수 있어?”
서민혁은 실프에게 부탁해 봤지만, 실프는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건 정상적인 기후 변화가 아니야. 그렇다면…….’
갑자기 결계형 보스 퀘스트가 발생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이 소비엣스키 무한서고의 보스 퀘스트는 작년에 러시아 헌터들이 클리어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서민혁이 어떻게든 주위 상황을 파악하려 하고 있었을 때, 윤혜원이 다가와 서민혁의 팔을 잡았다.
“서민혁 씨! 혼자 행동하면 위험해요! 여기서는 일단 함께 모여서 눈보라가 지나가는 걸 기다린 뒤…….”
“그냥 기다려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네?”
서민혁은 감각 강화를 2중첩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마력기관에 정신을 집중했다. 이 눈보라 속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닌 존재가 접근하고 있었다.
“으아악!”
후방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뒤쪽에 있던 크루세이더의 길드원들이 당한 것이다.
“뭐야?!”
당황해하는 윤혜원을 내버려 두고, 서민혁은 마력기관에 의지해 눈보라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눈보라가 너무 거세서 다른 헌터들은 적의 존재를 감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력기관을 지닌 서민혁만이, 적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저기인가?’
서민혁은 근처에 있는 나무에 몸을 숨긴 채 고개를 치켜들었다.
시야를 뒤덮은 눈보라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 있었다.
‘역시……!’
그것은 10미터 가까이 되는 키를 지닌 존재였다.
피부색은 약간 푸른색이고, 하얀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손에는 바위를 부숴서 만든 듯한 거대한 곤봉을 지니고 있었다.
‘서리 거인……!’
서리 거인.
그들은 이곳처럼 추운 날씨로 설정되어 있는 무한서고에서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거인족이다.
아크데몬보다 커다란 몸집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냥 곤봉을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다진 고기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또한 그들은 눈이나 냉기를 조종하는 능력을 지녀, 지금처럼 눈보라를 일으킬 수도 있다.
“끄아악!”
“사, 살려 줘……!”
비명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크루세이더의 길드원들을 곤봉으로 짓이기고 있는 것이다.
‘하필이면 서리 거인이 나타나다니…….’
얼음 속성이라 할 수 있는 서리 거인에게는 화염의 힘으로 대처하는 게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서민혁은 샐러맨더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지.’
서민혁은 업화의 단검을 잡았다.
샐러맨더가 없어도 업화의 단검을 사용하면 불을 발생시킬 수 있다. 그걸로 검기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부탁할게.”
실프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뛰어올랐다.
높이 뻗은 침엽수를 이용하면서, 서리 거인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거리까지 올라갔다.
‘이렇게 커다란 놈이라고 해도, 목에 깊은 상처를 입힌다면……!’
눈보라를 뚫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미 서리 거인은 서민혁의 돌격을 눈치채고 있었다.
“……!”
쿠웅!
서리 거인이 마치 날벌레를 쫓듯이 손을 휘둘렀다.
서민혁은 공중에서 그 손바닥과 충돌했다.
S랭크 방어구인 다크사이드 아머를 장비하지 않았다면 내장이 파열되었을 것이다.
“욱……!”
하지만 추락하지는 않았다. 실프가 바람의 힘으로 받쳐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서민혁은 서리 거인의 어깨에 착지할 수 있었다.
‘돌격 강화!’
어깨를 발로 차면서, 업화의 단검을 내질렀다.
불타오르는 화염을 압축시킨 검기가 서리 거인의 목을 찔렀다.
“크어어어!”
서리 거인의 목에서 검푸른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너무 얕았다. 치명상은 아니다.
서리 거인이 몸을 비틀며 서민혁을 떨어뜨리려 했다.
“실프……!”
실프의 도움을 받으며, 서리 거인의 몸을 밟고 다시 도약했다.
몸을 반회전시키면서 서리 거인의 쇄골 안쪽으로 업화의 단검을 쑤셔 박았다.
‘터져라……!’
검기를 해제한 순간, 불꽃이 터져 나가며 서리 거인 내부로 쏟아져 들어갔다.
“크어어어!”
허파가 불타오르는 감각을 느끼고 있는 걸까.
서리 거인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서민혁은 인벤토리에서 대악마의 대검을 추가로 꺼냈다.
‘근력 강화, 2중첩!’
전력을 다해 대검을 휘둘렀다.
커다란 칼날이 서리 거인의 목 앞쪽에 박혔다.
“커어어억!”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서리 거인의 거대한 육체가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서민혁은 실프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착지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타박상을 치료하기 위해 포션을 꺼냈다.
‘운 좋게 이겼어.’
처음부터 서리 거인이 서민혁을 표적으로 삼고 있었다면, 서리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리 거인이 크루세이더의 길드원들을 사냥하는 것에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겨우 기회가 생겼다.
‘얼마나 죽었지?’
희생자가 제법 많을 것이다.
서민혁은 피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여전히 눈보라가 계속되고 있어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서리 거인을 쓰러뜨렸는데, 왜 눈보라가 그치지 않는 거지?’
이게 서리 거인의 마법이라면, 서리 거인이 쓰러진 순간 눈보라도 잦아들어야 한다.
하지만 눈보라는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었다.
“설마…….”
서민혁은 근처에서 가장 높은 침엽수로 올라갔다.
그리고 시력 증폭, 청력 증폭 등 감각에 관련된 생체 마법을 동시에 사용했다.
“사람 살려!”
“젠장, 이게 뭐야!”
근처에서 러시아어가 들렸다.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다. 아까 강에서 마주쳤던 러시아 헌터들 같았다.
그들이 무언가에 쫓기면서 이쪽 숲으로 도망쳐오고 있었다.
“아주 죽여주는군…….”
서민혁은 까득 이를 갈았다.
멀리서 눈보라를 헤치고 걸어오는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최소 열 마리 이상 되는 서리 거인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