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쓸데없는 수작을 받아 줄 생각은 없다 (2)
“그러면 지금으로서는 딱히 별다른 징후가 없다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작업실 구석에서 서민혁은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상대는 서고관리국의 제갈환 부국장이었다.
“서민혁 헌터, 솔직히 저는 아직도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
“크루세이더가 제 죽음을 바라고 있다니 말입니다.”
그렇다.
지난번 보스 퀘스트가 끝난 뒤, 서민혁은 결계가 풀리기 직전 제갈환에게 귀띔을 해 줬다.
크루세이더가 제갈환의 죽음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확실히 그때… 크루세이더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보인 건 사실입니다. 그 덕택에 그들은 결계에 휘말리지 않았죠.”
“그렇죠.”
“하지만 그냥 우연일 수도 있습니다.”
“네, 우연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연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서민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제갈환 부국장님, 부국장님은 한국 헌터 업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분입니다.”
“너무 띄워 주시는군요.”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명심하지요.”
제갈환이 서민혁의 말을 완전히 믿지 않더라도, 크루세이더를 경계하게 되면 그럭저럭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서고관리국에서 크루세이더 길드 관련으로 수상한 부분을 포착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보상 말인데…….”
“퀘스트 보상 말입니까?”
보스 퀘스트 보상 중 대악마의 대검과 마도서는 서민혁이 챙겼지만, 나머지 크레딧 보상은 셋이서 삼등분했다.
제갈환과 황미연은 사양했지만 그냥 서민혁이 밀어붙였다.
이건 그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니요, 7번 무한서고 공략 작전에 참가해 주신 것에 대한 보상 말입니다.”
“아, 그것도 있었죠.”
정부에서는 각 길드들에게 막대한 보상을 해 주기로 되어 있었다.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서민혁도 그 보상을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거절했다.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괜찮습니다. 그 대신 다른 걸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솔직히 도박 같습니다만.”
“원래 투자라는 게 다 도박이죠.”
서민혁이 요구한 것.
그것은 정부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차세대 에너지 관련 공기업의 비상장 주식이었다.
앞으로 몇 년 만 지나면 그 가치가 몇 십 배로 뛰어오를 것이다.
“저도 에테르 코어를 이용한 에너지 개발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식이라도 좀 가지고 있으려는 겁니다.”
“서민혁 헌터, 나중에 상장될 만한 회사라면 몰라도,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회사가 상장될 가능성은…….”
“지켜봐야죠.”
“…알겠습니다. 더 이상 아무 말 안 하겠습니다.”
몇 년 뒤 법이 개정되면서 각종 에너지 관련 공기업이 상장된다는 건 현시점에서는 서민혁만이 알고 있는 정보일 것이다.
“그러면 서민혁 헌터, 다시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안녕히 계세요.”
통화를 마친 뒤, 서민혁은 작게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펼쳐 놓았던 마도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7번 무한서고에서 입수한 마도서…….’
코스토스라는 이름의 아크데몬을 쓰러뜨린 뒤, 서민혁은 새로운 마도서를 얻었다.
최근에는 무한서고에도 들어가지 않고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엄청 어려워.’
그동안 입수했던 카발라 진리어 마도서는 읽을 때마다 내용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그런데 이 책은… 판데모니움 혼돈어로 적혀 있었다.
‘판데모니움 혼돈어로 적힌 책은 없는 줄 알았는데.’
회귀하기 전, 서민혁은 판데모니움 혼돈어로 된 책을 접해 본 적이 없었다.
해외에서도 그런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마도서는 판데모니움 혼돈어로 적혀 있었던 것이다.
‘데몬들만 쓰는 언어가 아니었단 말인가?’
판데모니움 혼돈어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다.
서민혁의 해석 능력은 그게 무슨 마도 언어이든 자유자재로 해석하게 해 준다.
문제는 마도서의 문체였다.
‘이게 무슨 서사시도 아니고.’
문장이 간단명료하지 않았다.
장황하고 온갖 수식어가 달려 있고 요점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제대로 습득하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지금까지 익혔던 생체 마법, 정령 마법, 사령 마법과는 확실히 다른 성격의 마법이다.
다른 마법들이 부족했던 부분을 커버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지난번 아크데몬도 나 혼자였으면 잡을 수 없었어. 제갈환이 시간을 끌어주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던 거야.’
더욱 강해져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서민혁은 마도서에 다시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민혁아, 잠깐 괜찮을까?”
“뭔데?”
마도서를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조성조를 들여보냈다.
“너 크루세이더 윤혜원 바람 맞혔다면서?”
“그건 또 뭔소리야.”
“야, 윤혜원이면 꽤 괜찮지 않아? 데이트 한번 해 주지? 얼굴도 예쁘고 능력도 있고, 나 같으면 다른 약속 있어도 취소하겠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그 악녀랑 데이트를 하느니, 차라리 방에서 샐러맨더 잠자는 모습을 감상하는 게 더 유익한 시간일 것이다.
“크루세이더 길드에서 정식으로 제안서가 왔어.”
“크루세이더에서?”
“아마 윤혜원의 진짜 용건은 이거였을 거야.”
서민혁은 조성조가 건네준 프린트를 훑어봤다.
“러시아?”
“그래,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극동 지방을 대표하는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예전부터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도시다.
“알고 있지? 러시아는 한국처럼 헌터 길드가 있는 나라가 아니야.”
“…알고 있어.”
러시아는 자국 내의 모든 헌터들을 정부에서 통제하고 있다.
말하자면 모든 헌터가 국가 공무원인 셈이다.
“그리고 무한서고도 전부 국가에서 관리하고 있지. 그렇기 때문에 외국인이 러시아의 무한서고에 들어가려면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해. 사용료도 엄청나게 지불해야 하고.”
“그렇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려는 헌터들이 끊이지 않아. 어째서인지 알아?”
“소비엣스키 무한서고 때문이지.”
소비엣스키 무한서고.
2년 전 블라디보스토크 북쪽에 출현한 무한서고에 러시아 정부가 붙여 준 이름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규모를 자랑하며, 발견 후 2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에는 여전히 많은 퀘스트가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근력, 체력, 민첩에 +10 보너스를 얻을 수 있는 상설 퀘스트가 두 개나 있는 걸로 유명하지.”
“그래, 그 두 개만 클리어해도 합계 +60 상승이야.”
E급 헌터가 하루아침에 B급 헌터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아무나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는 거야. 러시아 정부, 정확히는 연해주 지방정부에서 허가해 줘야 들어갈 수 있지.”
“그리고… 크루세이더 길드는 그 허가를 받아낼 수 있다는 건가.”
한국 최고의 길드인 크루세이더는 해외 헌터들과도 연결되어 있다.
“서민혁, 지금 네 스탯이 어떻게 되었지?”
“근력 80, 체력 60, 민첩 65, 감각 70… 합계 275지.”
최근 7번 무한서고에서 근력 +5 보너스를 얻어서 조금 늘어났다.
“만약 네가 거기 가서 60을 더 얻으면 335야. S급 기준인 500에 많이 근접하는 거지.”
“…….”
“너도 알겠지만, 국내에서 스탯 올리는 건 이제 쉽지 않아.”
국내에서 능력치 보너스를 얻을 수 있는 상설 퀘스트는 거의 다 특정 길드들이 독점하고 있다.
지금까지 서민혁이 그런 퀘스트에 도전할 수 있었던 건 조성조가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뒷돈을 찔러 주기도 하면서 손을 써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서민혁도 얼굴이 꽤 많이 팔려 버렸고, 그런 식으로 스탯을 올리는 건 어려워졌다.
“앞으로는 특정 길드에 들어가지 않는 한 스탯 올리는 게 어려울 거야. 어차피 우리가 도전할 만한 상설 퀘스트는 얼마 남지 않았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이 기회를 놓치지 말자는 얘기야?”
“그렇지.”
크루세이더 길드의 제안.
그건 소비엣스키 무한서고에서 발견된 어떤 고난이도 퀘스트 공략에 참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능력치 보너스가 부여되는 상설 퀘스트에도 도전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 같았다.
“크루세이더 길드는 대놓고 떠먹여 주려는 생각 같아. 너한테 호감을 사려는 거지.”
“난 크루세이더에 들어갈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그럼 그냥 ‘먹튀’해 주면 돼.”
조성조는 태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어때?”
“…나쁘지 않아.”
서민혁은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들겼다.
앞으로 서민혁은 크루세이더 길드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크루세이더는 빈틈 하나 찾을 수 없는 철옹성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교류하는 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그들과 함께 행동하면서 그들의 정보를 수집한다면… 뭔가 꼬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번 만나자고 해 줘. 정식으로 의논해 보자고 말이야.”
“좋아. 박나영하고 같이 얘기해서 약속 잡아볼게.”
서민혁의 승낙을 듣고, 조성조가 자리를 뜨려 했다.
하지만 중간에 멈칫하면서 서민혁에게 시선을 향했다.
“민혁아.”
“뭔데?”
“정말로… 크루세이더에 들어갈 생각은 없는 거지?”
살짝 불안해하면서 묻는 조성조의 얼굴을 보며, 서민혁은 피식 웃었다.
“CS 컴퍼니에서 S자 뺄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래, 알겠어.”
쑥스러워하는 표정으로 조성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러면…….”
조성조가 나간 뒤, 서민혁은 다시 마도서를 펴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 가기 전에, 이 책 한 권 떼고 가자.”
그렇게 다짐한 뒤 다시 마도서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모든 잡념을 버리고, 한 글자의 의미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암흑 마법의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조금씩 새로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 * *
러시아로 출발하는 당일.
서민혁은 집합 장소인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아, 여기예요, 서민혁 씨.”
공항에서는 윤혜원이 대여섯 명 정도의 헌터를 데리고 대기하고 있었다.
“일단 제 후배 소개부터 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서민혁 헌터님.”
“……?”
윤혜원과는 다른 타입의 청순한 미녀가 앞으로 나와서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이번 원정에서 서민혁 헌터님을 곁에서 보좌할 김은영이라고 합니다. A급 헌터입니다.”
“보좌? 그런 얘기는 못 들었는데요?”
“아, 너무 거창하게 말씀드렸군요. 그냥 통역 담당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옆에서 윤혜원도 끼어들었다.
“서민혁 씨, 여기 김은영은 러시아어를 잘해요. 현지에 가면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무한서고 안에서는 스마트폰 번역기 같은 것도 쓸 수 없죠. 러시아인들과 충돌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제가 항상 붙어 다니면서 보좌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김은영이 다시 한 번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서민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너무 과했다. 차라리 남자 헌터를 붙여 준다면 몰라도, 굳이 젊고 예쁜 여자를 붙여 줬다는 점에서 윤혜원 측의 의도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죄송합니다만, 통역은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서민혁은 직설적으로 받아치기로 했다.
“제가 러시아어는 잘합니다.”
“네?”
“예전에 배워서요.”
정확히는 회귀하기 전에 배웠다.
마도 언어 해석의 힌트를 얻기 위해 세계 각국의 주요 언어를 다 공부했으니까.
“어, 어느 정도이신지…….”
“의사소통은 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서민혁은 미소를 지으면서 덧붙였다.
“제 앞가림은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사전에 계약한 대로, 크루세이더와 함께 움직이면서 싸워 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없다.
쓸데없는 수작을 받아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