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누군가가 우리들의 정보를 흘린 거야 (2)
데몬들의 지하창고에는 정말로 다양한 아이템이 많았다.
그런데 인간보다 몸집이 큰 데몬 종족들한테는 사이즈가 맞지 않을 장비들도 많았다.
무한서고를 만든 마법 문명이 세팅해 놓은 것 같았다.
‘어쨌든…….’
서민혁은 창고에 보관되어 있던 인간용 방어구를 장비했다.
[다크사이드 아머]
* 랭크: S
* 방어력: 121
# 혼돈의 땅에서 만들어진 강철 갑옷. 어둠의 마력이 부여되어 있어 뛰어난 방어력을 자랑한다.
S랭크 갑옷을 몸에 걸치는 건 처음이었다. 100이 넘는 방어력 수치가 든든했다.
팔과 다리까지 가리는 단단한 강철갑옷인데도 몸을 움직일 때 별로 걸리적거리지 않는 게 신기했다.
‘이제 메인 무기도 메인 방어구도 S랭크야.’
뿌듯한 기분이었다.
서민혁이 지금 몸에 걸친 것만 해도 수십억 원 어치다.
물론 돈 주고도 못 구하는 SS랭크 장비들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일반 헌터가 얻을 수 있는 장비로는 최상급이었다.
‘그밖에 잡다한 것들도 챙겼고… 슬슬 나갈까.’
이제 북두성 길드도 요새 내부로 진입했을 것이다.
기회를 봐서 슬쩍 끼어들면 된다.
‘그냥 뒤에 있다가 달려와서 합류한 걸로 해야 해.’
어떤 식으로 둘러대야 할지 고민하면서 서민혁은 창고를 나왔다.
하지만, 곧바로 묘한 기척을 느꼈다.
“……?”
데몬들은 인간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서민혁은 데몬들의 기척을 바로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데몬들의 기척하고는 달랐다.
‘이건 뭐지?’
아주 진하게 농축되어 있는 것 같은, 어둡고 짙은 마력.
그게 무지막지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 많은 인간이 있었다.
“…….”
서민혁은 조용히 움직였다.
미궁 같은 통로를 통과하여 해당 위치에 도달하자, 많은 헌터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 예상보다 더 깊이 진입했어. 제갈환의 전투력이 뛰어났기 때문인가?’
하지만 상황은 절박해 보였다.
북두성의 헌터들 중 대다수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천지원이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부하들을 독려하고 있었지만, 상처가 꽤 많았다.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건… 서고관리국의 S급 헌터인 제갈환뿐이었다.
“서민혁 헌터? 어떻게 여기에?”
제갈환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쳐다봤다.
천지원 등 북두성의 길드원들도 눈을 크게 떴다.
“가세하려고 들어왔는데, 중간에 길을 잃었습니다. 계속 헤매다 보니 여기로 왔네요.”
서민혁은 대충 둘러대면서 접근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저놈입니다.”
제갈환이 시선을 향한 곳.
거기에는 검붉은 피부를 지닌 데몬 한 마리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역시 저 녀석인가.’
방금 전부터 느껴지던 강렬한 기운.
그건 저 데몬에게서 느껴지던 것이었다.
‘데몬 어쌔신… 이 구역에서 나타난다는 얘기는 없었는데.’
데몬 어쌔신은 일반적인 데몬보다 강력한 상위 데몬 중 하나다.
이름대로 민첩하게 움직이면서 일격필살의 공격을 펼치는 데몬이다.
하지만 이 데몬 어쌔신은 요새 중앙에 도달해야 나타나는 중간보스였다.
어째서 벌써부터 나타나서 북두성 길드를 공격한 걸까.
‘설마 데몬들이… 각개격파를 하려고 마음먹은 건가?’
사전 정보에 의하면, 요새 중앙에 도달할 때까지는 잔챙이 데몬들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상위 데몬들은 중앙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작전을 바꾸기라도 한 걸까.
‘그러면 좀 위험한데.’
만약 다른 세 루트에서도 상위 데몬이 덤벼들어서 다른 길드들을 각개격파한다면 작전이 실패할 수도 있다.
네 방향에서 스위치를 눌러줘야 중앙으로 가는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한쪽 루트만 막혀도 이번 작전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다른 루트 상황을 확인할 수도 없고… 골치 아프군.’
나머지 루트의 상황이 걱정되긴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나타난 데몬 어쌔신을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다.
“조심하십시오, 서민혁 헌터.”
제갈환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매우 빠른 놈입니다. 저도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제갈환은 국내 S급 헌터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스피드의 소유자다.
그런 제갈환이 그렇게 말한다는 건, 저 데몬 어쌔신은 정말로 재빠르다는 거다.
‘S급 헌터조차 고전할 정도의 강적…….’
서민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번에 싸웠던 사마윤 이상의 적이 될 것이다.
“제갈환 부국장님.”
“네?”
“죄송하지만 제 움직임에 맞춰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평소 이지적인 이미지의 제갈환이 멍청이처럼 네? 네? 소리만 반복했다.
“저는 아직 기술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과 호흡을 맞추는 걸 못합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갈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민혁은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데몬 어쌔신이 히죽 웃었다.
“……!”
소리 없이 돌진해 오는 데몬 어쌔신.
일직선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주위 벽을 발로 차면서 지그재그로 달려들고 있다.
눈으로 쫓는 게 불가능한 속도다. 하지만…….
‘느껴진다.’
서민혁은 깨달았다.
감각 강화를 사용하면서 마력기관을 이용해 상대방의 기척을 느끼면… 일일이 눈동자를 움직이며 적을 쫓지 않아도, 상대방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다.
마치 무술의 고수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적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듯이.
“……!”
콰앙!
좌측에서 날아온 데몬의 마수(魔手).
서민혁은 그걸 업화의 단검으로 정확히 막아냈다.
“……?!”
데몬 어쌔신이 허를 찔린 걸 알 수 있었다.
서민혁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민첩 강화, 근력 강화, 순간 가속.’
몸을 회전시키면서 단검을 휘둘렀다.
검기를 두른 칼날이 데몬의 팔뚝을 스쳤다.
데몬은 재빨리 서민혁에게서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서민혁은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돌격 강화!’
강하게 땅을 박차면서 데몬에게 쇄도한다.
데몬의 얼굴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하지만 칼날이 닿을 만한 거리는 아니다.
그 순간, 서민혁은 검기를 해방시켰다.
콰콰쾅!
압축되어 있던 화염이 터져 나가면서 데몬 어쌔신을 덮쳤다.
“……!”
데몬 어쌔신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서민혁은 더 이상 쫓지 않았다.
순간 가속의 효과가 끊겼기 때문이다.
“세, 세상에…….”
“팀장님이랑 제갈환 부국장님도 상대하기 어려워했던 놈을… 저렇게 밀어붙인다고?”
주위에서 다른 헌터들이 놀라워하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서민혁은 신경 쓰지 않고 제갈환한테 말을 걸었다.
“부국장님.”
“서, 서민혁 헌터…….”
제갈환은 방금 서민혁이 보여 준 스피드에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속도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하고 있었을 텐데, 서민혁이 자기보다 민첩한 모습을 보여 줬으니까.
“저한테 맞춰 달라고 부탁했는데, 언제까지 거기서 보고만 계실 겁니까?”
“……!”
제갈환이 다급히 무기를 치켜들었다.
헌터로서 한참 선배라고 할 수 있는 제갈환에게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건 좀 예의 없는 짓이었지만, 상황이 급박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순간 가속을 사용하지 않으면 데몬 어쌔신의 속도에 대응할 수 없어.’
민첩 강화나 실프의 도움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순간 가속으로 속도를 극대화해야 하는데, 지속 시간이 짧다. 연속으로 쓰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했다.
“천 팀장님도, 견제 부탁드립니다.”
“나, 나도?”
서민혁은 인벤토리에서 성자의 성검을 꺼내서 천지원한테 던졌다.
지난번에 원무정한테서 뺏은 이 S랭크 무기는 신성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천지원이 휘둘러도 충분히 위협적일 것이다.
‘데몬한테는 업화의 단검보다 큰 대미지를 줄 수 있겠지만… 칼이 너무 커서 민첩하게 움직이기 어려워.’
현재 서민혁의 전투 스타일에는 업화의 단검 쪽이 더 알맞았다.
필요할 때마다 화염을 방출하여 리치를 늘릴 수도 있으니까.
“아까 말씀드렸지만, 저는 남들과 호흡을 맞추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러니 두 분이 많이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서, 서민혁, 대체 어떻게 이런 힘을…….”
“질문은 나중에.”
천지원의 말을 끊으면서 서민혁은 데몬 어쌔신을 노려봤다.
방금 전 공격에 놀랐는지 데몬 어쌔신은 이쪽을 경계하고 있었다.
‘저 녀석의 신중함 덕분에 시간을 벌었군.’
서민혁은 다시금 땅을 박찼다.
이미 순간 가속을 다시 써도 되는 상태였다.
“……!”
데몬 어쌔신이 빠르게 움직였다.
서민혁도 빠르게 접근한 뒤, 결정적인 상황에 순간 가속을 사용했다.
파앗!
검기를 두른 칼날이 데몬 어쌔신의 어깨에 꽂혔다.
그 상태로 서민혁은 두 번 더 칼을 휘둘렀고, 데몬의 시커먼 체액이 뿜어져 나왔다.
“크으……!”
데몬 어쌔신이 신음소리를 내면서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이미 제갈환과 천지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하압!”
“우오오!”
제갈환이 사용하는 S랭크의 곡도(曲刀) ‘달의 시미터’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데몬 어쌔신에게 쇄도했다.
데몬 어쌔신은 그걸 자기 손톱으로 막아내려 했지만, 천지원의 성검이 자기한테 위협적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다급히 몸을 피했다.
하지만.
“……!”
데몬 어쌔신이 물러선 곳.
서민혁은 그곳을 향해 이미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돌격 강화!’
돌진력을 살려서, 온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여기서 데몬 어쌔신이 신속하게 반응했다.
단검이 닿지 않는 거리, 그리고 단검에서 뻗어져 나온 불꽃조차 닿지 않는 거리로 벗어나려 했다.
순간 가속의 효과는 이미 끝났다. 서민혁은 데몬 어쌔신의 재빠른 움직임을 쫓아가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 순간.
폭발적인 소리와 함께, 칼날의 불꽃이 증폭되었다.
“……!”
순식간에 2미터 이상의 길이로 늘어난 화염의 칼날.
그것이 데몬 어쌔신을 덮쳤다.
“카아아아악!”
끔찍한 비명소리.
지옥의 불꽃이 데몬 어쌔신의 목덜미에 꽂혀, 그 살결을 불태우며 파고들었다.
“……!”
서민혁은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지금 서민혁의 정신은 주머니 속에 숨어 있는 샐러맨더와 완전히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서민혁이 불꽃의 칼날을 증폭시킬 수 있었던 건, 그동안 심화 마도서를 독파하여 최근 정령 마법 5레벨에 도달한 덕분이다.
“하아앗!”
자연력을 다루는 샐러맨더의 힘.
그리고 자기 몸에 내재된 마력.
모든 것을 의식하면서 불꽃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불꽃의 칼날이 거세게 타오르며, 데몬 어쌔신의 몸을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캬아아아악!”
소름끼치는 비명.
마침내 데몬 어쌔신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후우…….”
데몬 어쌔신이 무력화된 걸 확인하고 서민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공방 도중에 데몬 어쌔신의 공격이 몸을 스칠 때가 종종 있었지만, S랭크 방어구인 다크사이드 아머 덕분에 별다른 상처 없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네, 네놈…….”
바로 그때.
데몬 어쌔신에게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떻게 그런 힘을… 마법을, 쓰는 것이냐? 어떻게 이 세계의 인간이…….”
“…….”
생전 처음 듣는 언어.
하지만 서민혁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거야말로 데몬들이 쓰는 판데모니움 혼돈어다.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어떻게…….”
서민혁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데몬 어쌔신이 축 늘어졌다.
완전히 죽어 버린 것이다.
“데몬이 뭐라고 하던 것 같은데, 무슨 얘기였죠?”
제갈환이 다가와서 질문했지만, 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주의 말이라도 내뱉은 모양이군요.”
“악마의 저주라니 좀 불길하네요.”
그렇게 둘러대며 서민혁은 주위를 둘러봤다.
“부상자 치료하고, 전진합시다.”
“그, 그래!”
천지원이 다급히 부하들에게 달려갔다.
북두성 길드는 포션 보유량이 여유로울 테니 부상자 치료는 문제없을 것이다.
‘다른 루트 공략대들이 어떤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미 챙길 건 다 챙겼고, 앞으로는 그냥 헌터들을 따라다니며 무난하게 지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지. 정 안 되면 비장의 수를 쓰는 수밖에’
강력한 힘을 지닌 상위 데몬들.
그놈들과 본격적으로 싸우게 되는 상황에 대비해… 서민혁은 이미 준비를 마쳐 놓은 상태였다.
‘남들 앞에서는 쓰고 싶지 않지만 말이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 힘을 사용하는 상황은 피하고 싶다.
만약 각 길드의 헌터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이 힘을 사용한다면…….
‘한국 최초의 SS급 헌터로 지정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겠지.’
SS급 헌터.
스탯을 기준으로 삼는 S급까지와는 달리, 다른 헌터와 명백히 차별화되는 경지에 도달한 헌터들만이 얻을 수 있는 등급.
만약 서민혁이 준비해 온 것을 다른 헌터들이 보게 된다면… 분명 한국 최초의 SS급 헌터로 인정해 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것이다.
‘데몬들이랑 싸우는 것보다, 그게 더 걱정이란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민혁은 전방으로 시선을 향했다.
어두컴컴한 미로 너머에서 데몬들의 소름끼치는 포효가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