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추락하는 자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3)
“그러면 허 길드장님, 천 팀장님, 미리 말씀드린 대로……”
“걱정하지 마. 약속은 지킬 테니까.”
“그래야죠.”
서민혁의 말을 듣고, 허태웅과 천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룡방의 원무정은 우리가 제공해준 정보대로 수상한 놈을 잡으러 갔지만…… 오히려 그놈한테 역공당해서 죽었다, 이런 얘기지?”
“네, 맞습니다.”
서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룡방 간부인 원무정을 아수라와 북두성이 작당해서 함정에 빠뜨렸다고 하면, 국내 헌터 업계에 큰 혼란이 발생할 겁니다.”
“그야…… 그렇지.”
“자칫하면 국내 2위, 3위, 4위가 모두 참여하는 전면 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
“그건 한국 헌터들 전체의 손해가 됩니다.”
허태웅은 잠시 침묵했다.
서민혁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 대신 대룡방은 너를 표적으로 삼게 될 거야. 알고 있겠지?”
“제가 주도한 일이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자신 있나? 살아남을 수 있겠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합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잠깐 한숨을 내쉰 뒤, 허태웅이 서민혁의 어깨를 붙잡았다.
“평소 내가 지키는 철칙이 있어.”
“철칙이요?”
“원수를 갚을 때는 두 배로 갚고, 은혜를 갚을 때도 두 배로 갚아준다는 거지.”
“…….”
“네 덕분에 우리 애들 죽인 범인도 찾았고, 석판이 가짜였다는 것도 알았어. 게다가 너는 우리와 대룡방 사이가 틀어지지 않도록 배려까지 해줬지.”
서민혁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채, 허태웅은 호탕하게 웃었다.
“아수라 길드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해줄 수 있는 건 뭐든지 다 해줄 테니.”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보지. 이놈을 처리해야 하니까.”
허태웅은 인벤토리에서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봉투 하나를 꺼낸 뒤 거기다가 원무정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마치 쓰레기라도 넣어놓은 것처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저렇게 막 끌고 가면 마지막 보복을 하기도 전에 죽어버릴 것 같은데.
“잘 해결됐구먼.”
“감사합니다, 천 팀장님.”
서민혁은 천지원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천 팀장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원무정을 더 쉽게 유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에 서민혁은 천지원한테 이 무한서고만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원무정을 함정에 빠뜨리기에 딱 알맞은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천지원은 더 돕고 싶다고 서민혁에게 매달렸고, 결국 원무정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하하, 고마우면 뭐……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서민혁에게 빌붙어서 뭔가 얻어먹어 보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이제 돌아갈 거지? 어디 살아? 내가 태워다줄게.”
“괜찮습니다.”
“사양하지 말고. 같이 가면서 얘기도 나누고 하면 좋지 뭐. 안 그래? 내 차가 국산차이긴 해도 승차감은 좋아!”
“큰 차 타고 갈 거여서요.”
“큰 차? 설마…… 리무진 택시?”
“아니요.”
서민혁은 냉담하게 대꾸했다.
“버스 타고 갈 겁니다.”
여기서 조성조 사무실까지는 버스 하나로 갈 수 있었다.
* * *
“이건 또 뭐야!”
자기 인벤토리로 전송된 물건들을 보고 조성조가 비명을 질렀다.
“성기사의 보검 10개, 그 밖의 각종 장비들도 있으니까, 알아서 처분해줘.”
“야, 서민혁 너 설마…….”
조성조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서민혁을 쳐다봤다.
“정말로 대룡방 흑살대를 다 죽여 버린 거야? 원무정도?”
“그럼 뭐겠어?”
“너는 정말 미친놈이야…….”
한숨을 내쉬면서 조성조가 사무실 의자에 주저앉았다.
“솔직히 오늘로 연락 끊길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괜한 걱정 했네.”
“그래, 정말 괜한 걱정이었어.”
허태웅과 천지원의 연락처를 알아와 주는 등, 온갖 잡일을 담당해준 게 조성조였다.
서민혁 혼자서는 이렇게 매끄럽게 일을 처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일의 원인이 된 석판은 가짜였어.”
“그래…….”
“누군가가 가짜 석판을 만들고, 해석학자가 해독해봤더니 이건 리자드맨을 조종하는 석판이더라…… 그런 거짓말을 하면서 아수라 길드에 팔아치운 거야. 그 거짓말은 대룡방의 귀에도 들어갔고, 결국 대룡방이 아수라의 길드원을 암습하는 일이 발생했지.”
대룡방은 북두성에게 뒤집어씌웠지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 들통 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수라는 대룡방을 가만 내버려둘 수 없다.
“대룡방에서 아수라의 길드원들을 기습해서 죽여 버렸다는 게 세상 사람들한테 알려지면, 아수라는 대룡방과 전면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어.”
“맞아. 그냥 넘어가면 큰 망신이니까.”
“가짜 석판을 만들어 아수라에게 팔아치우고 대룡방에 정보를 흘린 자들은 이렇게 되는 걸 예상하고 있었을 거야.”
“…….”
“그러면 그게 누굴까. 업계 2위와 3위를 싸우게 만들어 이득 보는 건 과연 누굴까.”
“업계 4위인 북두성 길드……는 아니겠지.”
조성조가 한숨을 내쉬었다.
“업계 1위인 크루세이더 길드겠지.”
“정답이야.”
크루세이더는 현재 국내 1위의 헌터 길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수라와 대룡방의 지분까지 완전히 흡수해서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수라와 대룡방이 서로 싸워서 약체화되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크루세이더 길드는 해석학자와 손을 잡고 있을 거야.”
“해석학자하고…….”
“해석학자의 협조를 얻어 그럴듯한 가짜 정보를 퍼뜨리면, 다른 길드들을 얼마든지 혼란에 빠뜨릴 수 있지.”
현 시점에서는 ‘기초 마도어 말고 다른 마도 언어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희망적 관측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우리가 다른 마도 언어를 해석하는 데 성공했다.’라면서 사기를 치고 다니는 놈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지금 시점에서 대룡방과 아수라를 싸우게 해봤자 크루세이더 길드가 이득을 볼 뿐이야.”
“그래서 네가 중간에 끼어들어서 아수라 대신 원무정을 잡아준 거군…….”
“책임자인 원무정을 잡아서 넘겨줬으니, 허태웅은 이걸로 더 이상 대룡방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거야. 대룡방에서도 이번 일로 아수라를 추궁하는 건 어렵겠지.”
이걸로 대룡방과 아수라 사이의 전면 전쟁은 방지했다.
크루세이더 길드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절대 강자로 등극하는 걸 방해한 것이다.
“그런데 서민혁, 남들 걱정할 때가 아니지 않아?”
조성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대룡방…… 정확히는 부길드장인 사마윤이 너를 표적으로 삼을 거야.”
“그렇겠지.”
“원무정을 처리했다면 이제는 사마윤이 직접 나설 거야. 그러면 정말 위험해.”
사마윤은 현재 대룡방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조성조가 경고하는 건 사마윤 개인의 전투력 때문이었다.
“원무정도 강하지만, 사마윤하고는 비교가 안 돼. S급 헌터니까.”
“알고 있어.”
“네가 원무정을 어떻게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마윤은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직접 싸우지 않는 편이 좋아.”
“나도 직접 싸울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헌터의 등급을 되새겨보자.
E급 헌터는 보너스가 전혀 없는 상태.
D급 헌터는 근체민감 합계 +1 이상.
C급 헌터는 근체민감 합계 +20 이상.
B급 헌터는 근체민감 합계 +50 이상
A급 헌터는 근체민감 합계 +200 이상.
S급 헌터는…… 근체민감 합계 +500 이상.
‘+500이 넘어가려면…… 해외까지 진출해서 온갖 보너스를 긁어모아야 하지.’
한편 현재 서민혁의 수치는 다음과 같다.
[서민혁]
* 근력: +55
* 체력: +40
* 민첩: +45
* 감각: +50
* 마력: +50
근체민감 합계 +190.
A급 헌터의 최저 조건에도 미치지 못한다.
물론 서민혁한테는 마력 수치도 있고, 생체마법으로 육체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지만…… 어쨌든 S급 헌터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니 사마윤이 나를 찾아내기 전에 더욱 강해져야 해’
사마윤이 서민혁에게 도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원무정와 흑살대를 쓰러뜨린 걸 보고 사마윤은 서민혁이 최소 A급 이상의 베테랑 헌터라 추측할 것이다.
그렇다면 헌터가 되고 한 달 조금 지난 서민혁은 용의선상에서 제외된다.
아수라와 북두성을 들쑤셔 봐도 허태웅과 천지웅은 굳이 서민혁의 정보를 흘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대룡방을 도와줄 이유가 없으니까.
‘사마윤…… 피해 다닐 수만은 없는 상대야.’
회귀하기 전, 사마윤은 대룡방 길드를 장악하고 아수라 길드와 싸움을 벌였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사마윤은 중국 세력을 불러들였고, 한국 헌터들이 반발하면서 상황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대룡방과 아수라는 서로 큰 피해를 입고 약체화되며, 크루세이더 길드의 1강 체제가 더욱 공고해졌다.
‘중국 세력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도, 크루세이더의 독점을 막기 위해서도, 결국 사마윤은 해치워야 해. 내가 더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니까.’
사마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S급 헌터를 꺾을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한다.
‘내 마법을 더 성장시켜야 해. 특히 생체마법의 레벨을 올리지 못하면 사마윤한테 금방 목이 날아갈 거야.’
A급 헌터인 원무정하고 싸울 때도 위태로운 순간들이 있었다.
사마윤과 정면에서 칼싸움을 할 계획은 없지만, 공격 마법을 쓸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생체마법의 레벨을 더 올려야 한다.
‘하지만…….’
현재 생체마법은 4레벨, 정령마법은 4레벨, 사령마법은 2레벨이다.
그런데 생체마법과 정령마법은 5레벨로 올라갈 기미가 안 보였다. 최근에 4레벨이 된 정령마법은 그렇다 쳐도 생체마법은 4레벨이 된지 꽤 지났는데 아직 5레벨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빨리 오르긴 했지만…….’
아무래도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아직 부족한 것 같았다.
마법 이론 자체를 더 본격적으로 배워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갖고 있는 입문용 마도서로는 안 된다는 거군.’
기초 생체마법 입문.
정령마법의 진리.
사령술사의 교본.
이것들은 처음 마법을 공부하는 사람도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초급자용이 아니라 중급자, 상급자용 마도서도 존재할 것이다.
5레벨 이상이 되려면 그런 마도서를 입수할 필요가 있었다.
‘중급자용 마도서를 찾아야 해.’
안타깝게도 조성조의 소장품 중에는 그런 마도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전부 초급자용이었다.
사령마법 외의 마도서도 있었지만, 건축마법이니 측량마법이니 하는 비전투 계열 마법이라 서민혁이 당장 배울 필요가 없는 마법들이었다.
그러니 현시점에서는 서민혁이 공부할 마도서가 하나도 없는 셈이다.
‘그러니…… 탐색을 해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서민혁은 조성조에게 말을 걸었다.
“조성조, 지난번에 했단 얘기 말인데.”
“무슨 얘기?”
“차 말이야. 딜러 좀 소개시켜줘.”
지난번에 조성조가 자기가 아는 자동차 딜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었다.
그때는 사양했었지만, 이제는 때가 되었다.
“지방에 좀 내려가 봐야겠어.”
서민혁은 핸드폰을 꺼냈다.
방금 전에 헤어진 천지원 팀장한테 전화를 할 생각이었다.
‘아까 한번 튕겨줬으니…… 내가 부탁을 하면 오히려 더 반가워할 거야.’
중급자용 마도서를 손에 넣기 위해, 북두성 길드가 관리하고 있는 무한서고에 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