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로 (3)
‘마력 보너스를 눈치챈 사람도 분명 있었을 거야.’
서민혁은 회귀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력 보너스의 정보는 20여 년 동안 어디에서도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력 보너스를 얻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아마 상위 길드들이 은폐하고 있었던 거겠지.’
39번 무한서고의 숨겨진 보상은 서민혁이 얻었지만, 다른 곳에서 마도사의 광휘와 비슷한 것을 얻은 헌터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력 보너스에 대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그걸 철저히 은폐한 세력이 있다는 얘기다.
‘언젠가 마법의 사용법을 알아내서 그걸 독점할 생각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마도 언어를 연구하는 해석학자에게 많은 지원을 해 주던 길드들이 있었다.
어쩌면 그들은 마력을 확보해 둔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우리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고, 결국 그들도 포기하고 지원금을 끊어 버렸지만…….’
어쨌든 서민혁은 마력을 얻었다.
이제 마도서를 읽고 마법 습득에 도전할 차례다.
‘일단 돌아가야지.’
서민혁은 출입구로 돌아가기로 했다.
물론 최대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움직였다.
보스 퀘스트를 혼자서 클리어했다는 걸 들키면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으니까.
“야, 거기.”
하지만 출입구 근처에서 누군가가 서민혁을 불러세웠다.
고개를 돌려 보자 험상궂은 인상을 지닌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천지원……!’
기억에 있는 얼굴이다.
북두성 길드의 공략1팀 팀장인 천지원이 분명했다.
‘이 39번 무한서고를 공략하러 온 건가?’
북두성 길드는 포션 등을 제작하는 소위 ‘연금술사’ 길드로서 유명하지만, 무한서고 공략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긴 상위 길드다.
특히 이 천지원은 북두성 길드 최고의 돌격대장으로 유명했다.
‘근력 보너스가 최소 50은 있겠지…….’
만약, 시비가 붙으면 서민혁이 불리하다.
최대한 무난하게 넘어가고 싶었다.
“왜 그러시죠?”
“…….”
서민혁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천지원이 다가왔다.
그리고 서민혁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식인 식물에게 당한 건가?”
“아, 네.”
“어쩐지 몰골이 말이 아니더라.”
천지원의 말을 듣고, 주위에 있던 길드원들이 웃음소리를 냈다.
사실 지금 서민혁은 상당히 꼴불견이었다. 라바 플랜트의 소화액 때문에 옷 여기저기가 녹아내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용케 살았네. 갑옷 덕분인가?”
“뭐… 그렇죠.”
“다친 데는 없어?”
“포션을 써서 괜찮습니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이거 받아.”
천지원이 인벤토리에서 물병을 꺼내서 내밀었다.
“포션 질이 좋지 않으면, 겉으로는 상처가 다 치료된 것처럼 보여도 안쪽에 대미지가 남아 있는 경우가 있어. 그러니 이것도 한 병 마셔 둬.”
“아니, 이런 걸 받을 수는…….”
“딱 보니까 초보자 같은데, 도와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
“그럼 나중에 또 보자고. 난 북두성 길드의 천지원이라고 하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그렇게 말한 뒤 천지원은 서민혁에게서 등을 돌렸다.
부하들과 함께 성큼성큼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서민혁은 얼떨떨한 기분에 휩싸였다.
‘저렇게 친절한 사람이었나?’
보스 퀘스트를 클리어한 걸 들키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묘하게 어색한 느낌이었다.
* * *
“팀장님, 아까 그 남자한테 왜 그리 친절하게 대하셨어요?”
숲속으로 들어가면서 부하 팀원이 천지원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냥 초보자 같던데.”
“아까 그놈이 입고 있는 갑옷 봤어?”
“갑옷이요?”
“실버스미스 놈들이 만든 갑옷이야. 천오백만짜리.”
“네? 천오백만짜리요?”
“초보 놈이 천오백만짜리 갑옷을 입고 다닌다… 무슨 뜻이겠어?”
천지원 같은 중견 헌터들에게 천오백만은 푼돈이다.
하지만 이제 막 헌터 일을 시작한 초보자한테는 분명 큰돈이다.
“적어도 먹고 살기 궁해서 헌터 일에 뛰어든 청년 백수는 아니라는 거지.”
“아하!”
“딱 보니까 포션도 넉넉하게 준비해 뒀던 것 같고, 돈이 많은 놈이야.”
“그러면…….”
“호감을 사 두면 우리 북두성 길드에 나쁠 게 없다는 거지.”
어쩌면 좋은 인연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포션 하나쯤 제공해 줄 가치가 있다.
“이번 일로 우리에게 호감을 느끼고 앞으로 북두성 길드 제품을 애용해 주기만 해도… 그것만으로도 우리 이득이 되는 거니까.”
“결국, 영업을 하신 거군요.”
“맞아.”
천지원은 사업적 관점에서 헌터 활동을 하고 있다.
잠재적 고객한테 친절을 베푸는 건 일종의 투자라 할 수 있다.
“자, 그 얘기는 됐고.”
“아, 네.”
눈앞에 펼쳐진 숲을 둘러보면서, 천지원은 손가락을 깍지 끼고 우두둑 소리를 냈다.
“올가미의 방 한번 점검하고… 이 숲 전체를 한번 뒤져 보자고.”
“알겠습니다, 팀장님.”
“되도록 오늘 안에 보스방을 찾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천지원은 자기 무기인 바스타드 소드를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저번 37번 무한서고 보스는 다른 길드한테 뺏겼으니까… 여기 보스는 반드시 내가 잡겠어.”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천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 * *
[야 지금 북두성 길드 큰일 났음]
북두성 지금 난리 남ㅋㅋㅋㅋㅋ
몇 달 전에 출현한 39번 무한서고 있지?
그거 북두성이 공략할 거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다른 길드들한테 경고도 했었는데.
오늘 하루 만에 다 털린 것 같음ㅋㅋㅋㅋㅋ
보스방 찾아서 좋아했더니 누가 다 보스 잡고 퀘스트 끝내 놓음ㅋㅋㅋㅋ
팀장 얼굴 붉으락푸르락ㅋㅋㅋㅋㅋㅋ
└길드원임? 어떻게 그렇게 잘 암?
└다른 길드에서 털고 간 거야?
└북두성 길드는 눈이 멀었음? 왜 딴 놈이 보스까지 깨고 가는 걸 눈치 못 챔?
└그러게 내부에 길드원 배치 안 해 놨나?
헌터넷에 올라온 글을 확인하고 서민혁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북두성 길드 소속원이 무한서고에서 나오자마자 익명으로 올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천지원한테 안 들켜서 다행이야.’
지금 서민혁은 자기 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심신을 충분히 휴식시킨 뒤 본격적으로 마도서를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슬슬 해 볼까.’
서민혁은 책상 앞에 앉았다.
예전에 학과 공부를 할 때처럼 공책과 포스트잇을 옆에 놓고 마도서를 폈다.
‘기초 생체마법 입문이라…….’
기초 생체마법 입문.
그것이 39번 무한서고에서 입수한 마도서의 제목이었다.
물론 제목은 기초 마도어로 적혀 있다.
‘하지만 본문은… 난해한 마도 언어로 적혀 있지.’
카발라 진리어.
꽤 많은 수의 마도서가 이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회귀하기 전에 단어 몇 개만 해석할 수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카발라 진리어는 언어 자체가 마법적인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나 자신이 어딘가 고차원적인 세계에 연결되는 느낌이야.’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영적(靈的) 체험이 이런 것일까?
어쨌든 서민혁은 문장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신비로운 감각을 느꼈다.
‘생체마법이라는 이름이고, 숲에서 발견한 거라 식물 같은 걸 조종하는 마법일 줄 알았는데…….’
나무뿌리나 줄기 같은 걸 조종해서 적의 움직임을 봉쇄하거나 공격을 가하는 마법.
그런 게 아닐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근력이나 체력, 반사신경 등… 육체 능력에 관여하는 마법인 건가.’
생명체의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마법.
이것이 생체마법이었다.
‘정말로… 신기하군.’
마법의 원리는 지금까지 서민혁이 알고 있던 현대과학하고 일맥상통하면서, 동시에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본래 서민혁의 머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내용이지만, 카발리 진리어의 특성인지 해석 능력의 효과인지 머릿속에 쏙쏙 들어왔다.
‘내가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게… 느껴져.’
공부할 때, 학문을 연구할 때, 가장 큰 쾌감을 느낄 때가 언제일까.
서민혁은 그동안 자기가 있던 곳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르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학창 시절에도 그랬다. 예전에는 풀지 못했던 문제를 풀 수 있게 되면, 예전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던 개념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을 느꼈다.
해석학자로 활동하면서도 서민혁은 그런 기쁨을 느끼길 기대했다.
비록 해석학자 시절에는… 그런 기쁨을 얻은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서민혁은 환희를 느꼈다.
난해한 이계의 언어를 우리말처럼 읽으면서, 새로운 정보를 끊임없이 흡수했다. 그건 그 무엇과도 비교하기 어려운 쾌락이었다.
지금까지 어떤 책을 보면서도 이렇게까지 집중한 적은 없었다. 지난번 세계마도식물도감을 읽었을 때 이상이었다.
그동안 느껴 본 적이 없는 충족감이 서민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더, 더 배우고 싶다.’
마도서는 400페이지가 넘는 두께였다.
하지만 서민혁은 중간에 한 번도 쉬지 않았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생체마법의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생체마법의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생체마법의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
.
.
라이브러리 건틀릿에서 계속해서 알림이 떴지만 서민혁은 무시했다.
그저 책에 미친 듯이 마도서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
서민혁은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었다.
책을 덮고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밖에서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도서를 읽느라 완전히 밤을 새 버린 모양이었다.
시계의 큰바늘은 5시와 6시 중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동틀 녘이었다.
[생체마법을 습득하였습니다. 현재 1레벨입니다.]
입을 다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옷을 챙겨 입은 뒤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와 새벽 공기를 들이마셨다.
“후우…….”
아직 사람들이 출근할 시간은 아니다.
그러니 마음껏 마법을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사실… 게임에 나오는 것 같은 공격마법을 기대했는데.”
파이어 볼이라든가.
매직 미사일이라든가.
그렇게 누가 봐도 딱 알 수 있는 마법을 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런 기대감도 적지 않게 있었다.
“마도서를 계속 읽다 보면, 그런 마법도 쓸 수 있게 되겠지.”
서민혁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쿠웅!
땅을 박차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무서운 스피드에 순간적으로 공포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 공포심은 금방 쾌감이 되었다.
“…하하.”
입에서 웃음이 나왔다.
가볍게 점프했을 뿐인데, 마치 무협소설의 경공술을 쓰는 것처럼 도약할 수 있었다.
“뭐야 이거.”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것을 느끼며, 서민혁은 저 멀리서 떠오르는 아침 해를 쳐다봤다.
“이게 진짜 헌터였군.”
그 어떤 헌터도 도달하지 못한 헌터 본연의 힘.
아마 무한서고를 만든 자들이 본래 의도했던 힘.
그게 지금 서민혁의 몸에 강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