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급 헌터가 된 해석학자-5화 (5/200)

5화 이것도 읽을 수 있다고? (2)

어째서 무한서고의 책들은 온갖 종류의 언어로 적혀 있는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해 마도해석학의 창시자인 김민철 교수는 이런 가설을 제시했다.

마도 언어들은 언어 자체에 마법적인 힘이 있다.

예를 들어 아르카디아 계약어는 사람의 심리에 강한 압박감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서나 주의문 등을 작성할 때 자주 사용된다.

무한서고를 만든 문명에서는 이런 마도 언어들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목적에 따라 다른 언어를 사용한 것이다.

‘역시 교수님 생각이 맞았어.’

세계마도식물도감을 훑어보면서 서민혁은 스승인 김민철 교수의 가설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했다.

‘마하비드야 설명어는… 정말로 머릿속에 속속 들어오는 것 같아.’

천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감 내용을 순식간에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머릿속에 바로바로 저장되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무아지경으로 도감을 훑어보던 서민혁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책을 덮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식물학자가 되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다.

아무리 흥미로워도 지금은 다른 걸 해야 한다.

서민혁은 일단 도감을 인벤토리에 수납했다.

‘올가미의 방으로 가자.’

올가미의 방.

최근 다수의 희생자를 낸 구역으로 이동했다.

마치 벽처럼 세워져 있는 두 책장 사이로 지나가자, 정말로 방처럼 되어 있는 구역이 나타났다.

‘저것 때문에 올가미라 불리는 거였지? 실물을 보는 건 처음인데.’

그곳에는 거대한 식충식물, 아니, 식인식물이 가득했다.

겉모습은 파리지옥과 비슷한데, 윗부분에 촉수가 달려 있는 게 차이점이다.

사람이나 몬스터가 지나가면 촉수를 뻗어 올가미처럼 붙잡아 버리고, 끌어당겨서 파리지옥 같은 포식용 잎으로 집어삼킨다.

‘공략법은 간단하지. 일단…….’

그렇게 생각하면서 서민혁이 발을 내딛었을 때.

윈도우가 출현했다.

[올가미의 방]

* 퀘스트 랭크: C

* 퀘스트 내용: 구역 내부에 있는 짐승지옥 및 몬스터의 공격을 피해, 구석에 있는 기사의 유물을 땅에 묻어 무덤을 만들어라.

* 클리어 보상: ‘성기사의 장검’ 획득.

* 특별 보상: 3분 이상 기사의 명복을 빌며 기도를 할 경우 ‘성기사의 훈장’ 획득.

# 본 퀘스트는 탐색자에 의해 클리어된 시점에서 소멸됨.

특별 보상을 제외하면 전부 다 서민혁이 알던 내용이다.

회귀하기 전, 이 퀘스트의 클리어 조건을 알아내느라 헌터들이 엄청 고생을 했었다. 많이 회자되었기 때문에 서민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짐승지옥… 방금 도감에도 있었지.’

잠깐 훑어봤었지만, 마하비드야 설명어의 효과로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그 덕택에 지금 시도하려고 하는 공략법이 정답이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냥 지나가면 저놈들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지. 어떤 공격도 안 먹혀.’

짐승지옥은 내구도가 매우 뛰어난 식물이다.

도끼질을 하든, 불을 지르든, 끄덕없이 버티면서 사람을 습격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거지.’

공략법은 간단했다.

적당한 먹잇감을 던져 주기만 하면 된다.

“잔뜩 먹어라.”

서민혁은 미리 준비해 온 ‘햄’을 집어 던졌다.

김밥 등에 쓰는 네모난 싸구려 햄이다. 그걸 통째로 던져 주자 짐승지옥은 촉수로 낚아챈 뒤 자기 입으로 가져가 소화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먹이를 소화하는 도중에는 아무런 공격을 하지 않는다. 촉수도 그냥 가만히 정지해 있다.

일반적인 식충식물이 그렇듯이, 움직이는 것 자체가 식물에게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먹이가 있는 상태에서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걸 멍청하게 정면 돌파하려고 하면 피를 볼 수밖에 없는 거야.’

서민혁은 햄을 하나씩 던져 주면서 유유히 짐승지옥 사이를 걸어갔다.

그리고 구석에 녹슨 갑옷이 널브러져 있는 걸 확인했다.

‘짐승지옥에게 잡아먹힌 기사의 유물… 소화시키지 못하고 뱉어 낸 걸까.’

왼손의 건틀릿을 치켜들고, 인벤토리에서 고블린 대거를 꺼냈다.

적당히 땅을 파서 갑옷을 묻어 준 뒤, 아까 봤던 내용대로 손을 모아 기도를 올렸다.

[올가미의 방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으로 ‘성기사의 장검’을 획득합니다.]

[특별 보상으로 ‘성기사의 훈장’을 획득합니다.]

알림이 뜨자, 근처에서 입을 다물고 있던 짐승지옥의 입 안에서 스르륵 뭔가가 떨어졌다.

은색의 장검. 그리고 십자가와 별이 조합된 모양의 금속 훈장이었다.

[성기사의 장검]

* 랭크: D

* 공격력: 15

# 성기사가 사용하는 제식 장검. 뛰어난 안정성을 자랑한다.

[성기사의 훈장]

* 랭크: C

* 상태 이상 저항 C랭크 부여.

# 임무를 성공시킨 기사에게 부여되는 훈장. 사악한 기운에서 기사를 보호한다.

설명을 읽고 서민혁은 미소를 지었다.

‘성기사의 장검은 백만 원 값어치를 하는 무기고… 성기사의 훈장, 이건 진짜 물건이다.’

상태 이상 저항이란 독이니 수면이니 하는 상태 이상을 막아 주는 걸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서민혁이 갖고 있는 고블린 대거는 30% 확률로 맹독 상태를 부여하지만, 상태 이상 저항 C랭크를 지닌 상대라면 15% 미만으로 낮아진다.

서민혁 같은 초보 헌터가 이 정도 아이템을 얻기는 어렵다. 그야말로 횡재한 것이다.

‘팔아먹으면 천만 원 이상이겠는데?’

물론 베테랑 헌터들에게는 백만 원도 천만 원도 푼돈에 지나지 않지만, 초보 헌터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서민혁은 장검과 훈장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은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는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사실 여기서는 이게 중요한 거지.’

서민혁은 꽃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로 윈도우가 출현했다.

[스칼렛 바닥장미]

* 랭크: C

# 땅바닥에 가까운 높이에서 자라는 붉은색 장미꽃. 각종 포션 제작의 원료가 된다.

포션.

그것은 무한서고에서 입수한 재료를 활용해 만드는 물약을 총칭하는 말이다.

즉각적인 치료 효과가 있어, 헌터들뿐만 아니라 무한서고 바깥의 일반인들도 사용한다.

이 포션 제작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헌터도 있고, 훗날 헌터들을 고용하여 포션을 대량 생산하는 제약회사도 출현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포션은 다 가내수공업 수준이지.’

서민혁은 스칼렛 바닥장미를 최대한 뜯어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나물 뜯듯이 한참 뜯고 있으니 살짝 허리도 아팠다.

‘바닥장미는 이 정도로 됐고…….’

미리 준비해 온 유리병을 꺼냈다.

입구가 큰 유리병이다.

‘이제는 소화액을 받아 가야지.’

지금 짐승지옥은 햄을 소화하면서 소화액을 뚝뚝 흘리고 있다.

서민혁은 그 소화액을 병에 가득 담았다.

‘이 무한서고는 정말로 정보가 중요하단 말이야.’

북두성 길드가 이곳을 점거했던 이유.

그건 여기서 스칼렛 바닥장미를 채취할 수 있는 데다가, 짐승지옥의 소화액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짐승지옥의 소화액이 포션의 완성도를 높여 준다는 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다.

‘게다가 나는… 그 식물도감을 봤단 말이지.’

세계마도식물도감에 적혀 있던 내용.

머릿속에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그 방법을 참고한다면, 서민혁은 큰 이득을 볼 수 있다.

* * *

서민혁은 성기사의 장검부터 경매장에 올려 처분했다.

되도록 빨리 처분하고 싶었기 때문에, 100만 크레딧을 즉시체결 가격으로 설정해 팔아 버렸다.

참고로 요즘 시세로 100만 크레딧이면 한국 돈 100만 원과 얼추 비슷하다.

‘더 오래 올려놓으면 120만 크레딧도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100만 원이 어디인가.

하루 만에 이 정도 돈을 번 건 처음이었다.

‘일단 방부터 잡아야지.’

서민혁은 종로3가로 이동했다.

광화문에서 시작되는 청계천 주위에는 헌터들을 위한 점포가 밀집되어 있었다. 보증금 없는 헌터용 임대 사무실도 있었는데, 서민혁은 거기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여기가 앞으로 내 전진기지가 되겠군.’

서민혁은 일단 가장 작은 방을 잡았다.

5평 정도 되는,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원룸.

여기가 서민혁의 아지트가 될 것이다.

‘일단 물건부터 들여놔야지.’

서민혁은 경매장 기능을 활용해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로 했다.

참고로 건틀릿은 정체불명의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서든 경매장에 접속할 수 있다.

‘초보 연금술사 세트만 사면 돼.’

다행히 90만 크레딧으로 낙찰할 수 있었다.

돈이 거의 다 거덜 났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가격이다.

‘내가 만들어야 할 건… 상처 치료 포션.’

웬만한 포션의 제조법은 지금도 인터넷에 공개되어 있다.

다만 그것만 보고 만들면 최저 등급의 E랭크 포션밖에 만들 수 없다. 여러 가지 노하우가 필요한데 그런 정보는 소위 ‘연금술사 길드’라 불리는 조직들이 독점하고 있다.

‘나는 이미 노하우를 갖고 있지.’

서민혁은 이미 D랭크 포션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

이건 회귀하기 전에 습득한 지식이다. 앞으로 20년 후에는 D랭크 포션 제조법이 그냥 인터넷에 돌아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서민혁은 이 D랭크 포션을 양산해서 자금을 마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손에 넣은 뜻밖의 정보.

서민혁은 인벤토리에서 세계마도식물도감을 꺼냈다.

그리고 스칼렛 바닥장미 항목이 있는 페이지를 펼쳤다.

이미 기억하고 있지만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었다.

‘여기 적혀 있는 대로 하면… 기초 연금술사 세트로도 최소 C랭크 포션은 만들 수 있을 터.’

그곳에는 그동안 연금술사들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밝혀 낸 ‘정답’이 적혀있었다.

물론, 이건 포션 제조법 책이 아니라 식물도감이기 때문에 간략한 소개 정도만 적혀 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실전에는 쓸모없는 E랭크 포션이 개당 1만 크레딧,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최저 수준인 D랭크 포션이 개당 5만 크레딧이었지.’

방금 서민혁은 경매장을 확인했다.

C랭크 포션은 약 20만 크레딧.

그것이 현재 시세였다.

‘C랭크 포션을 10개만 만들어도… 200만 크레딧.’

서민혁은 식물도감 내용을 되새기면서 작업에 들어갔다.

초보 연금술사 세트에 포함되어 있는 각종 도구와 용매를 이용해 스칼렛 바닥장미에서 성분을 추출했다. 짐승지옥 소화액도 사용해서 추출 효율을 극대화시켰다.

물론,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서민혁은 어디까지나 해석학자였지, 포션을 만드는 연금술사는 아니었다.

포션을 만드는 법은 유튜브 동영상으로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지만, 직접 해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참 걸렸네.’

이마의 땀을 닦으며 서민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첫 시도에서 걸린 시간은 무려 1시간.

익숙해지면 절반 미만으로 단축시킬 수 있겠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서민혁은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

‘배가 불렀지.’

1시간이든 30분이든, 단번에 20만원을 벌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차근차근 돈을 모아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된다.

‘그러면… 결과물을 확인해 볼까?’

서민혁은 완성된 물약… 포션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윈도우가 표시되었다.

[상처 치료 포션(A)]

* 랭크: A

* 복용할 경우 인체 재생 능력에 작용하여 상처를 치료한다. 치료 효과는 A랭크.

# 상처에 직접 바를 경우 효과가 없으며,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음.

‘A랭크 포션?!’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C랭크 포션이 나오는 걸 기대했는데, 어떻게 A랭크 포션이 나온단 말인가.

식물도감에 적혀 있는 간략한 설명조차… 수많은 헌터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확립한 제조법보다 몇 배는 더 우수하다는 건가?

‘자, 잠깐만.’

서민혁은 다급히 경매장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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