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정점 [Brave New World]
2033년 12월 31일 23시 50분.
보신각.
수많은 인파가 가족 단위로 혹은 연인 단위로 혹은 친구 단위로 혹은 그 외 여러 단위로 모여 타종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10분만 지나면 암울하고 혼란했던 2033년은 지나가고 희망찬 2034년이 도래할 터였다.
타종은 서울시장과 국정자문회의 의장 이동석 그리고 그 외 여러 계층에서 선택된 대표 인사들이 23시 59분 59초가 지나는 순간 시작할 것이다.
TV에서는 2033년에 일어난 주요 사건에 관한 짧은 브리핑이 나오고 있었다.
『올 3월. 인도네시아 덴파사르 공항에서 시작된 울룰루 툼베베의 테러로 국제연합 공격대가 결성됐습니다. 덕분에 올 7월 오랜 세월 언데드 군단에 의해 억압당해왔던 아프리카가 해방이 됐고…….』
앵커의 차분한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시국은 가만히 창밖을 내다봤다.
마치 희망이라는 존재가 마력 파장처럼 일정한 파동을 형성하기라도 한 것만 같은 착시를 보며 시국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안 가봐도 되겠어요?”
여정연이 와인이 반쯤 찬 잔 2개를 들고 시국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건네는 잔을 받으며 시국은 대답했다.
“어차피 얼굴은 이동석 의장이야. 내가 거기에 가 봐야 쓸데없이 시선만 분산시킬 뿐이야.”
그 말에 여정연은 가만히 미소를 지으며 시국의 곁에 서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참 다사다난했어요. 그쵸?”
“그랬지.”
“앞으론 좀 괜찮아질까요?”
“괜찮아지지.”
여정연은 가만히 시국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 내년이면 당신도 아버지가 되네요.”
“공식적으로야 쿠로카와 가문의 아이지.”
“하지만 당신의 피를 이어받았죠.”
시국이 여정연을 바라봤다.
그녀가 살짝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시국이 한쪽 손으로 그녀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여정연도 팔로 그의 허리를 감쌌다.
“미국하고 러시아가 중국 정세에 개입하려고 하고 있어요.”
“그렇겠지. 던전도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겠다, 뭐 브레이크로 튀어나온 것들도 사자나 호랑이 수준의 힘만 보이겠다, 여유가 생긴 거지.”
“우리가 뭘 해야 할까요?”
“카르텔? 아니면 한국?”
“둘 다요.”
“카르텔은 이제 더 이상 확장을 할 필요가 없어. 이미 중국 대륙 전체가 우리 영향권 안에 들어왔으니까. 중국 지하경제는 우리를 통하지 않고는 성립이 안 될 정도가 됐잖아.”
“동남아도 마찬가지고요.”
“어차피 거긴 마르코스의 자치령 같은 느낌이야. 거기다 아무래도 한국인이나 중국인보단 필리핀인인 마르코스가 동남아 빌런들에게 더 신뢰를 주니까.”
“덕분에 믈라카 해협까지도 장악할 수 있게 됐죠.”
“딱 거기까지만 하면 되는 거야.”
“한국은요?”
“뭐, 늘 하던대로 하면 되지. 적당히 강대국들 하는 걸 지켜보다 숟가락 얹기 말이야.”
여정연이 미소를 지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됐습니다. 10, 9, 8…….』
2033년을 보내는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3, 2, 1!』
카운트다운이 끝남과 동시에 묵직한 보신각 타종 소리가 텔레비전을 통해 흘러 나왔다.
『이로써 2034년 갑인년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시국과 여정연이 잔을 가볍게 마주치곤 와인을 쭉 들이켰다.
“이제부턴 다들 평안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될 거야.”
그렇게 두 사람과, 또한 여러 사람의 염원을 담고 2034년 갑인년이 시작됐다.
* * *
2034년 2월 8일.
남한석의 약속대로 조기 총선이 이루어졌다.
선거 결과 남한석이 속한 집권당이 무난하게 상원 과반을 확보했고, 차기 총리에 집권당 대표인 임찬수가 선출됐다.
7공화국 2번째 정권인 임찬수 내각은 <전면적 사회 개혁>을 기치로 내걸었다.
2033년 하반기 정국을 휩쓴 폭력 시위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혁명에 대한 피로감이 쌓인 것을 반영한 네이밍이었다.
“일단 치안과 복지 부문에서 개혁이 필요하다는 게 자문회의의 입장입니다. 총리님께서 이 점을 염두에 두시고 구체적인 정책을 구축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제는 제법 업무에 익숙해진 국정자문회의 사무국 총괄국장 박성준의 말에 임찬수 총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오는 금요일 저녁에 국정자문회의 의장단과 한국기업인총연합회 대표단이 마련한 연회가 있으니 총리님 이하 내각 장관님들께서는 꼭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반의 어색함은 이제 거의 사라진 박성준을 곁에서 바라보며 여정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익숙하게 총괄국장으로서 사무국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그의 모습에서 곧 시국이 떠날 거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 * *
2034년 3월 21일.
도쿄에 있는 초호화 산부인과에서 쿠로카와 미노리가 딸을 출산했다.
그녀의 곁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을 지켜본 시국은 딸에게 쿠로카와 아스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수고했어.”
“고마워요, 곁에 있어 줘서.”
“아스카를 잘 키워 줘.”
“걱정하지 마세요.”
산후조리 기간, 그녀의 곁을 지키며 시국은 자기 딸이 살아 가야 할 미래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면서 동시에 99번째 세계에 두고 온 현손, 별이를 떠올렸다.
‘잘 있겠지?’
그 아이에게도 이런 안락한 인류 문명을 물려주리라 시국은 생각하며 그렇게 그는 4월 초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 * *
2034년 5월 7일.
JH그룹 이사진과 국정자문회의 의장단, 한국경영자총연합회 대표단 및 신랑신부 측 지인들이 참여한 가운데 나연이와 황준기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나연이를 이끌고 황준기에게 다가가며 시국은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신랑 앞에 서서 신부를 넘기며 시국은 황준기의 팔뚝을 가볍게 쳐 주곤 자리로 돌아갔다.
삼화그룹 회장 용재형이 주례를 서는 가운데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로써 신랑 황준기 군과 신부 이나연 양의 결혼이 성사됐음을 선포합니다.”
주례 용재형의 성혼 선언을 끝에서 두 사람은 키스를 나눴다.
그 모습을 보며 시국은 미소를 지음과 동시에 눈물을 흘렸다.
‘이거면 된 거야. 그래.’
지난 생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며 결혼은커녕 제대로된 삶도 살지 못했던 그녀를 기억하며, 시국은 결혼식에서 유일하게 운 사람으로 기억됐다.
“속도위반이라면서요?”
전통 혼례복으로 갈아입고 하객들을 찾아다니며 인사하는 부부를 바라보며 여정연이 시국에게 물었다.
“벌써 3개월이래.”
“그래요?”
“처음에 그 소리 듣고 준기 저놈 손 좀 봐주려 했는데 알고 보니 나연이가 먼저 선을 넘었다더라고.”
웃으며 이야기하는 시국의 모습을 보며 여정연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가 자기 잔에 맥주를 한 잔 따르려 했다.
하지만 시국이 병에서 맥주가 나오는 것을 막았다.
“왜 그래요?”
갑작스런 시국의 행동에 여정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국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술에 무슨 문제 있어요?”
“아니. 술은 멀쩡해.”
“그러면요?”
“산모의 음주는 태아에게 치명적이야.”
순간 여정연은 시국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그녀는 이내 그의 말을 이해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국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겨우 착상했고, 천천히 자라고 있어. 그러니까 앞으로 식단 관리부터 스트레스 관리까지 철저히 해야 해.”
그러면서 시국은 그녀의 잔에 술 대신 물을 따라 주었다.
여정연은 놀람과 감동에 어쩔 줄 몰라하며 한동안 멍하니 시국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나연이와 황준기가 시국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형님.”
황준기가 미소를 지으며 시국에게 인사했다.
시국이 황준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황준기가 그의 손을 맞잡았다.
“나연이 울리지 마.”
“하하. 당연하죠, 형님. 울어도 제가 울지 나연이가 울 일은 없을 겁니다.”
황준기의 대답에 나연이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을 한 차례 툭 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국은 씩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오빠.”
나연이의 말에 시국은 따뜻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니야. 나야말로 고마워, 나연아. 잘 커 줘서.”
“아니야. 다 오빠 덕분이야. 오빠 덕분에 아빠랑 엄마를 만났고, 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미소를 짓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시국이 웃으며 황준기를 바라봤다.
황준기는 그대로 나연이를 살짝 안아 주었다.
나연이는 그의 품에서 눈물을 훔쳤다.
“잘 살아. 알겠지?”
“네, 형님.”
“응, 오빠.”
* * *
중국 내전은 내부 혼란을 수습한 미국과 러시아가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급하게 종결되었다.
두 강대국의 압박 아래 베이징과 상하이 정부는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2033년부터 2043년까지, 10년 동안 리커바오가 정해진 임기를 채운 후 다음 10년을 베이징파에게 정권을 넘긴다는 조건으로 협정이 체결되었고, 이로써 중국이 다시 내전에 휩싸일 일은 없을 듯 보였다.
펜리르가 죽고, 그녀의 힘을 시국이 완전히 흡수한 이후 던전은 약해졌다.
분명 이전까진 홀로 탱크를 상대할 만큼 강했던 오크가 이제는 경찰이 쓰는 권총에도 쉽게 죽을 정도로 약해지자 순식간에 세상은 평화로워지기 시작했다.
아프리카 재건은 전 세계가 자본을 투입하면서 서서히 이루어져 나갔다.
미국과 러시아, 유럽, 일본이 주축이 된 재건 프로젝트에 한국은 적당히 숟가락을 얹었고 덕분에 남수단 인근 유전에 대한 독점 개발권을 확보했다.
임찬수 내각은 남한석 내각과는 달리 자기네들이 공언한 개혁안을 국정자문회의의 지도와 재벌 집단의 협력 속에서 차분히 이루어 나가며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시국의 변화가 큰 몫을 했지만, 임찬수 본인이 근본적으로 남한석과는 달리 정통 관료 출신이었던 점도 한몫했다.
남한석은 공식적으로 2034년 8월 9일, 지병이었던 폐렴의 악화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혁명 지도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국장으로 치러졌고, 비록 실패한 정치인이었음에도 국민은 그가 가는 길을 추모해 주었다.
그리고 2034년 12월과 2035년 3월에 각각 시국의 조카와 아들이 나연이와 여정연에게서 태어났다.
시국은 황준기를 닮은 조카에게 황영표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여정연이 낳은 자기 아들에게는 여준영이란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2035년 5월 1일.
시국은 나연이와 황준기, 여정연 그리고 어린 조카와 아들이 보는 앞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례는 조용히 가족장으로 치러졌고, 시체는 화장돼 동해에 뿌려졌다.
그렇게 시국의 존재는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 * *
발 아래 강화도에는 군인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별이도 군복을 입은 채 포탄을 나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쉬움 없이 인사는 하고 왔나?”
시국의 곁에서 그의 얼굴을 한 알려지지 않은 어둠의 화신이 그에게 물었다.
“뭐 하나만 물어봅시다.”
시국은 대답 대신 역질문을 펼쳤다.
“혹시 당신은…… 100번째 세계에 남겨진 내 가족들이 뭐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알고 있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시국의 물음에 어둠의 화신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문득 시국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이윽고 어둠이 입을 열었다.
“네 증손자의 증손자 대에 이르러, 쿠로카와 가문의 딸과 여씨 가문의 아들이 결혼을 했다.”
“네?”
“황준기와 이나연은 이후로도 딸 둘을 더 낳았고, 이나연의 손자의 손자는 이반 이바노프의 증손자의 손자와 결혼을 했지.”
시국은 피식 웃었다.
“잘 된 거라 해야 할까요?”
“그거야 그 사람들이 어떻게 느끼냐가 문제 아닐까?”
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저는 여기 일에나 신경 쓰겠습니다.”
“널 항상 지켜보고 있겠다.”
어둠은 그대로 사라졌다.
시국은 그대로 아래로 부드럽게 하강했다.
“어?! 아저씨!”
별이가 가장 먼저 시국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군인들이 시국을 바라보며 부동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시국은 별이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 B급 빌런의 인생 2회차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