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정점 [Climax]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
조나단 스미스 대통령과 CIA 국장, 국무장관이 삼각을 그리며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에서는 따로 언급이 있었나?”
조나단 스미스의 물음에 국무장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한국 정부는 사실상 식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공식적인 루트로는 아무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비공식적인 루트를 몇 겹이나 이용해서야 겨우 정부의 의중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래, 한국 정부의 의중이 뭔데?”
“의견 없음이랍니다.”
“뭐?”
조나단 스미스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의견 없음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입니다. 이시국 헌터의 복귀에 관한 그 어떠한 의견도 없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입장이라고 합니다.”
조나단 스미스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워서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뭐, 한국 정부가 한두 번 이랬던 것도 아니고…….”
국무장관의 말에 조나단 스미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됐고, 그래서 이시국 헌터가 돌아와서 남한석이가 그렇게 입장을 선회한 건가?”
조나단 스미스의 물음에 CIA 국장이 자세를 바로하고 대답했다.
“높은 확률로 그런 것 같습니다. 남 총리는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사임 발표는커녕 사태를 수습할 의지조차 없었다는 것이 청와대 총리 경호실 관계자들의 일관된 증언입니다. 아무래도 이시국 헌터가 공식적으로 자신의 복귀를 알리기 전에 미리 남 총리를 만나 손을 써 둔 것 같습니다.”
“그런 건 참 빠른 인간이란 말이야. 러시아하고는 따로 이야기가 오간 것 같나?”
“FSB 쪽 협력자들이나 크렘린 정보원들에게서 별다른 보고가 없는 걸 보면 아직 크렘린과 접촉은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바노프 대통령이나 이시국 헌터나 모두 A급 헌터니 만큼 우리 쪽 협력원들 모르게 회동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있습니다.”
조나단 스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하간 중국의 상황도 복잡한데다 한국도 더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어. 당장에야 우리 상황도 좋지가 않아 힘들겠지만, 장기적으로 지금보다 상황이 많이 나아지면 이시국 헌터와의 교섭도 할 수 있어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후로 조나단 스미스는 국무장관과 CIA 국장에게 몇 가지 지시 사항을 하달한 후 그들을 내보냈다.
그들이 나가고, 잠시 조나단 스미스가 물로 목을 축이는 사이, 어느새 총회장 비서가 신기루처럼 그의 앞 자리에 나타나 다리를 꼬고 앉았다.
평소와는 달리 심기 불편한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조나단 스미스는 물었다.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요?”
“상식적으로 죽은 줄 알았던 인간이 돌아왔는데 표정이 좋을 수가 있나요?”
까칠한 그녀의 대답에 조나단 스미스는 헛기침을 했다.
“총회장께선 뭐라고 하시오?”
“조만간 이곳으로 오겠다고 하셨어요.”
“조만간?”
조나단 스미스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총회장께서는 아직은 힘을 비축하고 계시는 걸로 아는……”
“총회장께서 오신다면 오시는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
“사태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어요. 이반 이바노프가 살아 남은 것도 총회장께서는 불편해하시는데 거기다 이시국까지 돌아왔으니…… 어쩌면 총회장께서 세상에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날이 더 빨라질 수도 있어요.”
“그 말은…….”
총회장 비서가 조나단 스미스를 매섭게 노려봤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은 총회장님 아래에서 북미 일대를 다스리는 영주가 될 거니까요. 이건 총회장께서 직접 약속하신 것인 만큼 믿어야 해요.”
조나단 스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막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넘기려 할 때였다.
“헉!”
별안간 총회장 비서가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왜 그러시오?”
“크, 큰일이에요. 초, 총회장께서…… 총회장께서…….”
“총회장께 무슨 일이 일어났소?”
총회장 비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나타났을 때처럼 신기루처럼 모습을 감출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조나단 스미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가 비서를 호출했다.
“FBI 국장, CIA 국장 그리고…… 국방장관까지 모두 들어오라고 해.”
* * *
- 최대한 빨리 펜리르를 끝장내려고 합니다.
시국의 말에 크렘린 대통령 집무실에서 침묵이 내린 모스크바의 새벽 거리를 내려다보며 이반 이바노프는 대답했다.
“얼마나 빨리 끝내려고 그러는 거지?”
- 지금 당장.
“응?”
순간 이반 이바노프는 자기가 뭘 잘못 들었나 착각했다.
아니면 시국이 러시아어에서 잘못된 어휘를 택했거나.
“뭐라고?”
- 지금 당장 펜리르를 끝장내려고 합니다.
“…….”
한동안 이반 이바노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시국이 내린 결정이었기에, 이반 이바노프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니 구태여 지금 당장이라니 왜?”
- 제압할 능력도 충분히 있고, 어디에 있는지도 대략적으로 알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처치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 그게 맞긴 한데…… 음…….”
- 왜 그러십니까?
“그냥…… 당혹스러워서. 보통은 이런 중차대한 일을 처리할 때에는 최대한 사전에 준비를 많이 하니까. 아니면 최소한 밑밥이라도 주변에 깔아 두든가.”
-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 쪽에 여유가 없습니다. 당장 어제 중국 시안에서 B급 던전이 붕괴돼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와 도시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알고 있지.”
- 러시아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던전이 붕괴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흐음…….”
- 그래서 서두르는 겁니다.
당위성을 이야기하자면, 시국이 하는 말은 분명 옳았다.
펜리르가 던전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을 거의 다 통제하고 있고, 최근 가속화되는 던전 브레이크의 배후에 펜리르가 있다면 최대한 빨리 처치해야 하는 게 옳은 일이었다.
문제는 그걸 시국이 이야기하고 행동한다는 것이었다.
“많이 변했군.”
- 많이 들었습니다.
“아니. 정말 많이 변했어. 아프리카에서 보여 준 그 잔인함이 더 이상 안 보일 정도니까 말이야.”
- 좋은 거 아닙니까?
“때에 따라 다르겠지.”
- 펜리르가 죽으면 던전과 몬스터는 약해질 겁니다. 자연스럽게 러시아건 미국이건 그간 외부로 표출하지 못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겠지요.
“그렇겠지.”
- 그 준비를 하고 계십시오, 니콜라예비치. 당신에게 필요한 건 이제 헌터로서의 행동이 아닌, 러시아 대통령으로서의 행동입니다.
“알겠네.”
- 일 끝나면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몸조심하게.”
- 감사합니다.
전화가 끊기고, 이반 이바노프는 전화기를 내려 놓았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차 한 대 지나다니지 않는 모스크바 거리를 내려다보며 그는 많은 생각에 빠졌다.
‘변해 버린 이시국은 과연 누구의 편인가?’
이미 시국은 이반 이바노프에게 폴리나와의 파혼을 통보했다.
폴리나 또한 내심이야 어떻건 표면적으로는 시국의 통보를 수용했다.
고로 지금 이반 이바노프와 시국 사이에는 과거와 같은 그런 내밀한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시국이 명백히 변했다.
울룰루 툼베베를 죽이기 위해 멀쩡히 살아 있던 류야오방을 비롯한 국제연합 공격대 헌터들을 쳐 죽인 게 무색할 정도로 시국은 변했다.
그 변화가 과연 자신에게 이득이 될지, 아니면 해가 될지.
더 나아가 러시아에는 이득이 될지, 아니면 해가 될지.
이반 이바노프의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생각을 관통하는 하나의 아이디어는 바로 그것이었다.
별안간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기후변화와 같은,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이야기하던 것들이 현실이 된 시대에, 시국마저 변해 버린 현실 앞에서 이반 이바노프의 고뇌는 깊어져만 갔다.
* * *
이반 이바노프에게 시국은 당장 펜리르를 때려잡으러 가겠다 이야기했지만, 문자 그대로 당장 가지는 않았다.
모스크바가 새벽녘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을 때, 한창 사람들이 활기차게 일하고 있을 시간이던 한국에서 이반 이바노프와의 통화를 끝마친 시국은 곧장 박성준을 데리고 국정자문회의 사무국으로 향했다.
실상 사무국이라곤 하지만, 구성원이라곤 사무총장 하나뿐이었던 곳에서 시국은 박성준의 자리를 새로 만들어 주었다.
“이거 그냥 JH길드 아닌가요?”
박성준의 말마따나 사실상 JH길드와 다를 바 없는 구성이었다.
“앞으로는 사람들을 좀 충원해야지. 지금까지야 나 혼자 다 했다지만, 네가 내 자리에 오를 때쯤이면 그렇게 하기는 힘들 거 아니야.”
“그렇긴 하죠.”
“하지만 일단 네가 내게 일을 배우는 동안에는 우리 둘만 있을 거야.”
그리고 시국은 박성준에게 서류와 태블릿PC를 건네주었다.
“일단 당분간 네가 해야 할 일은 국정자문회의에 관한 헌법 규정 및 법률 규정 그리고 국정자문회의 내부 규약 및 조직도에 대한 이해야. 이건 내가 구태여 네게 가르칠 것도 없으니 스스로 잘 공부해 봐. 혹시 모르는 거 있으면 검색이라도 좀 해보고.”
“아…… 그래서 주시는 태블릿입니까?”
“그렇지.”
억지로 미소를 짓는 박성준을 뒤로하고 시국은 곧장 청와대 총리 집무실로 향했다.
남한석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는 아바타가 시국을 맞이했다.
“이놈들 이외에 남한석을 따르는 빌런들은?”
“없습니다.”
“하긴 그 인간 수준에 이 정도 떨거지들 모은 것만으로도 용하지. 그래. 수고했어.”
그대로 시국은 청와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날, 남한석을 추종하던 빌런들은 모두 시국의 손에 세상에 존재했던 흔적을 잃었다.
남한석이 심어 둔 비선조직을 모두 소탕하고, 저녁이 됐을 무렵 시국은 여정연을 찾아갔다.
그녀와 함께 그녀가 종종 찾아가던 고급 음식점에서 분위기 있는 식사를 한 뒤 시국은 곧장 그녀와 함께 자신의 펜트하우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두 발을 맞댔다.
그렇게 어느덧 하루가 지나고, 한국이 새벽 속에 잠들었다.
여정연이 침대에 누워 자는 것을 확인한 시국은 부드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드레스룸으로 가 정갈한 정장 차림으로 환복을 했다.
손목에 고급 시계까지 찬 그는 천천히 그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여정연이 시국의 방에서 가운을 걸친 채 나왔다.
그녀는 텅 빈 시국의 집을 바라보며 이것이 곧 자신에게 닥칠 미래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가만히 자기 아랫배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래도 여기에…… 시국 씨의 흔적이 남으면…… 미노리 언니처럼…….’
그렇게 여정연은 텅 빈 시국의 펜트하우스의 적막 속에서 새벽을 지새웠다.
* * *
한국은 아직 새벽이었지만, 알래스카는 이미 아침이었다.
찬란한 태양 아래 눈으로 뒤덮인 알래스카의 대지가 빛났다.
그 위에서 시국은 천천히 눈을 밟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바람이 눈과 함께 불어왔지만, 시국의 근처에도 오지 못했다.
바람은 점차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든 시국을 덮치기 위해 용을 쓰듯 시국의 근처로 눈발과 함께 날아왔다.
하지만 그 무엇도 시국의 몸을 건들지 못했다.
그렇게 눈바람의 공격을 무심하게 흘려버리길 30분.
시국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는 공허만이 존재하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내가 부수고 들어갈까? 아니면 그냥 네가 나올래?”
허공에다 대고 시국이 이야기했다.
이젠 지쳐 버린 바람의 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정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시국이 천천히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아지랑이와 같은 마력 파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력 파장은 점차 강렬해졌고, 이내 주변 공기가 그것에 공명하며 맹렬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무심한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던 시국은 이내 눈빛을 날카롭게 빛내며 손바닥에 모인 마력 파장을 앞으로 쏘아냈다.
콰과광-!
거대한 크레인 수십 대가 한 번에 넘어지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시국의 앞에 있던 공허한 허공이 흔들렸다.
공간의 흔들림은 한참을 이어졌고, 굉음이 사라질 무렵 마침내 시국의 눈앞에 문짝이 날아간 거대한 은빛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