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빌런의 인생2회차-197화 (197/200)

197 정점 [Culmination]

시국이 어둠의 오른손을 잡고, 100번째 세계의 구원과 이전의 아흔아홉 세계의 복구를 택했을 때, 그는 울룰루 툼베베와 펜리르의 망령을 흡수했다.

문제는 그 망령이 각각 아흔아홉 개씩 도합 198개나 되는 숫자라는 점이었다.

어둠은 이전에 있던 아흔아홉 세계에 남아 있던 울룰루 툼베베와 펜리르의 망령을 모두 모아서 시국에게 건네줬고, 합이 1천 년은 가뿐히 넘기는 방대한 세월과 그 시간 동안 쌓인 사념들이 시국의 영혼을 어지럽혔다.

물론 어둠이 시국의 곁에서 망령의 흡수를 도와줬기에, 시국의 영혼이 망가지는 일은 없었다.

만일 어둠이 없었더라면 시국의 영혼은 망가져 망령 중 하나가 됐을 터였다.

그렇게 198개의 망령을 모두 흡수하고, 마침내 시국은 한 단계 진화를 거쳤다.

시국에게 전투감각 스킬의 등급은 이제 무의미한 것이 됐다.

198개에 달하는 울룰루 툼베베와 펜리르의 망령을 흡수하며, 그들이 지니고 있던 힘까지 모두 융화시킨 이상, 그에게 등급이란 개념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너는 이제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며, 너 자신이되 너 자신이 아니게 됐다. 이것이 네 속죄의 첫걸음이다.』

어둠의 말대로 시국은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것 이상의 힘을 얻음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잃었다.

그중 하나가 그가 지니고 있던 비인간적인 광기와 냉혈한적인 이익 추구라는 것은 어찌 보면 하나의 아이러니였다.

인간적인 것을 잃음으로써 그가 지니고 있던 비인간적인 요소로부터 탈출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차라리 차갑게 대해 주세요. 차라리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시라고요.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여정연이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자 이동석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나갔다.

시국은 자리에서 일어나 여정연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그녀의 곁에 앉아 가만히 그녀를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여정연은 시국의 가슴팍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그의 가슴을 눈물로 적셨다.

“나는 죄인이야.”

시국이 그녀에게 천천히 자신의 죄에 대한 고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내가 가진 한 줌의 기억과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했고, 그들의 정당한 몫을 빼앗았지.”

“…….”

“이제 난 그 대가를 치러야 해. 그래야 난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놔야 해. 국정자문회의는 여전히 내각과 의회 전반에 걸친 자문을 맡겠지만, 내가 사라지고 나면 내가 있던 시절만큼의 절대적 지배력은 천천히 사라지게 될 거야.”

“…….”

“대신 확실한 실력자들의 자문기구로서, 이전에 이 나라가 택했던 잘못된 선택을 막아 주는 브레이크 역할은 충분히 하게 될 거야.”

“…….”

“카르텔은 여전히 번성하겠지. 그리고 그걸 통해서 여전히 너와 미노리 그리고 저우페이링은 아시아에서 영향을 끼칠 거고, 마르코스는 필리핀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지키겠지.”

“…….”

“하지만 카르텔로 인해 적어도 아시아만큼은 빌런에 의한 일반 시민의 피해가 거의 사라지게 될 거야.”

남한석, 정확하게는 그의 기억과 외모를 빌린 껍데기의 사죄와는 그 격이 다른, 시국 본인의 진심 어린 고해.

그것을 들으며 여정연은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질 못했다.

“내 욕심을 위해 만든 조직이 역으로 내 속죄의 일부가 됐다는 게 참 우습고 역설적인 일이야.”

“…….”

“내가 없어도 넌 이동석 의장과 미노리 그리고 저우페이링과 함께 내 빈자리를 채워 줘야 해.”

여정연이 천천히 시국의 가슴팍에서 고개를 땠다.

그리곤 잠시 머리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다 이내 눈물을 닦아내곤 시국을 바라보았다.

“미노리 언니에게는 시국 씨의 자식이 남을 거예요. 저우페이링에게는 시국 씨에 대한 신앙심이 남을 거고요. 하지만…… 저한텐 뭐가 남죠?”

“…….”

“자문회의 부의장이니 초인협회 협회장이니. 다 필요 없어요. 전 그냥 당신 하나만 있으면 돼요.”

“…….”

“떠나야 하나요? 정말?”

“…….”

“그럼 저에게도…… 저에게도 뭔갈 남겨 주고 떠나세요.”

그녀의 말에 시국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여정연은 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국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금 눈물을 흘렸다.

다시 여정연이 시국의 품에 안겼고, 시국은 말없이 그녀를 꼭 껴안아 주었다.

* * *

“네?”

박성준은 스테이크를 썰다 말고 시국을 바라보았다.

시국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박성준의 시선이 그의 곁에 앉아 있는 여정연에게로 향했다.

여정연이 미소를 지으며 시국을 대신해 박성준에게 대답해 주었다.

“사무총장님 밑에서 총괄국장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그, 그러니까. 저보고 국정자문회의에 들어가라 그 말인가요?”

“네.”

박성준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넵킨으로 입가를 닦은 후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의 잔이 비자 시국이 잔을 채워주며 이야기했다.

“난 조만간 은퇴할 생각이야.”

“네?”

“피곤해졌어.”

“아, 아니 그게 무슨…… 마스터 나이가 몇 살이신데 벌써…….”

“나이와 무관한 거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제안은 갑작스럽지만 네가 내 자리를 물려받는 건 갑작스럽진 않을 거야. 적어도 네가 사무총장의 일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때 은퇴할 생각이야.”

박성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안색에서 불안을 간파한 여정연이 시국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많이 불안하실 거예요. 아무래도 하시던 일과는 다른 분야의 일이니까요.”

“아…… 그것도 그렇고……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어요. 저도 처음 협회에 들어왔을 때는 아무것도 몰라서 엄청 힘들었어요. 그래도 성준 씨한테는 든든한 멘토가 있으니까, 저보단 괜찮을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성준은 난색을 표했다.

“저는 고졸이라…… 그런 어려운 일을 하기엔…….”

그러자 시국이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는 그럼 대졸이냐?”

“아…… 그건…….”

“그리고 너도 그동안 JH길드 사무장으로 있으면서 고임금으로 꿀만 빨았잖아. 이제 그 밥값을 해야지.”

“그게 그렇게 되는 건가요……?”

시국은 씩 웃으며 잔을 들어 와인 한 모금을 넘겼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성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스터…… 혹시 무슨 심경 변화라도 겪으신 거예요?”

“심경 변화?”

“마스터께서 돌아오시고 나서 제가 느낀 건데…… 그 실종 전이랑은 좀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뭐가?”

“뭐랄까…… 분위기라 해야 할까요?”

“분위기라…… 하하.”

시국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박성준이 말을 이었다.

“은퇴하시겠다는 의지는 제가 뭐 존중을 할 수밖엔 없어요. 근데…… 과연 마스터께서 은퇴하시고 나면 이 나라가 잘 돌아갈까요? 당장 마스터가 안 계시던 지난 몇 달 동안 그렇게 개판이 났는데…….”

“그래서 지금부터 준비하잖아. 개판 안 나도록.”

“제가 마스터 자리를 대신하면 더 개판이 날 수도 있는데…….”

“성준아.”

“네.”

“네가 그래서 새 여친이 없는 거야.”

“네?”

살짝 당황한 박성준을 바라보며 시국과 여정연이 웃었다.

“자신감을 가져. 넌 할 수 있어. 명호랑 봉길이 척추를 접어 버리겠다던 패기로.”

말을 끝마치고 시국은 잔을 들었다. 여정연도 잔을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박성준도 조심스럽게 잔을 들었다.

3개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우리 박성준 총괄국장의 자신감 배양을 위하여.”

시국이 씩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쭉 넘겼다.

여정연도 웃으며 잔을 비웠다.

망설이던 박성준도 이내 잔을 비웠다.

* * *

2033년 10월 17일 월요일.

모두가 출근하느라 바쁜 8시 20분.

느닷없이 주요 방송사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대문짝만하게 속보가 실렸다.

JH그룹이 13시에 긴급 기자회견을 연다는 내용의 기사를 접한 시민들은 이런저런 추측을 늘어놓았다.

「이시국 헌터 사망 발표 하는 거 아님?」

「지라시 보니까 물산이랑 건설 사장이 사직서 냈다는데 그거 관련된 거 아님?」

「주식쟁이들이나 관심 가질 소식이고 그건. 기자회견 감은 아니잖아.」

「진짜 이시국 헌터 죽었다는 거 발표하는 거 아니냐?」

「발표 안 해도 어차피 뭐 사실상 죽은 거 확정 아님? 저번에 남한석도 그렇게 이야기했잖아.」

「그 이중인격자는 언급 ㄴㄴ」

대체로 네티즌들이 시국의 죽음을 발표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가운데, JH그룹 계열사 주가는 증권가를 중심으로 떠도는 지라시와 와이튜브, 포털 사이트 종목 토론방 등에서 뿌려지는 추측들로 인해 등락을 거듭하며 혼조세를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 13시가 되고, 모든 언론사가 JH그룹의 기자회견을 실시간으로 전국에 송출했다.

“안녕하십니까. JH그룹 부회장 이시국입니다.”

한동안 사람들은 텔레비전과 스트리밍 라이브 서비스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간 저의 신변에 관해 떠돌았던 여러 불길한 소문을 일소하고 국민 여러분께 해명과 사죄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담담한 어조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시국의 모습은 갑작스럽게 변하여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던 남한석의 담화보다도 더 큰 충격을 사람들에게 안겼다.

“지난 7월, 아프리카에서 울룰루 툼베베와 최후의 결전을 벌인 이후 저는 그 잔당 및 혹시 모를 울룰루 툼베베의 부활을 저지하고자 아프리카에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먼저 시국은 자신이 몇 개월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은 공식적인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 칼이 울룰루 툼베베를 찔렀을 때, 저는 놈이 어쩌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공격대장이던 이반 이바노프 러시아 대통령께 말씀도 못 드리고 급히 그 흔적을 찾아 떠나야만 했습니다.”

이미 이반 이바노프와 말을 맞춰 놓았던 만큼, 그는 태연하게 만들어진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약 3개월여간의 조사 끝에 저는 울룰루 툼베베가 완전히 죽었음을 확신하고 비로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자세한 부분은 차마 말할 수 없다는 논리로 중간에 만들어질 수도 있을 구멍을 메웠다.

“그간 저의 신변에 관한 설왕설래로 여러 혼란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JH그룹을 사랑해 주시는 수많은 주주님께서 저로 말미암아 힘든 시간을 보내셨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대의를 위해서 였다고는 하지만 혼란을 야기했던 점에 대해 국민 여러분과 주주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그러면서 시국은 단성 옆으로 나와 허리를 숙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실시간 스트리밍 댓글창은 폭발했다.

“여러모로 세계가 혼란스럽고,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두려움이 우리의 일상을 엄습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게 주어진 힘으로 이 세계가 조금 더 활기차고 밝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더 국민 여러분과 주주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그렇게 시국의 기자회견은 끝났다.

실시간 스트리밍 댓글 창은 그의 복귀를 환영하는 메시지로 가득 찼고, 증시에서 JH그룹 관련주는 15% 넘게 급등했다.

포털 사이트 종목 토론방에선 이시국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남기는 주주들로 시끌벅적했다.

그날 저녁 뉴스는 시국의 복귀 소식으로 도배가 됐고, 외신도 시국의 복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던전 브레이크로 고생하는 미국의 경우 A급 헌터의 복귀가 주는 심리적 기대감이 어마어마했기에 다우와 나스닥이 오랜만에 상승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시국은 복귀를 만천하에 선언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기대감을 가진 채 그의 복귀를 축하해 주었다.

특히 그가 남긴, “이 세계가 조금 더 활기차고 밝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메시지는 던전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미국인과 내전과 던전 브레이크로 고생하는 중국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의 복귀를 축하한 건 아니었다.

일부는, 그의 복귀를 바라보며 굳은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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