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빌런의 인생2회차-196화 (196/200)

196 정점 [Meridian]

“어?”

“뭐꼬?”

부회장실 앞에서 한명호와 강봉길이 딱 마주쳤다.

“네가 여기는 왜?”

“니는 와?”

“나? 나는…….”

한명호는 말을 아꼈다.

‘박성준이 불렀다고 하면 저 새끼가 분명 의심할 건데.’

강봉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니는 뭐?”

“나는…… 뭐…… 그러는 넌?”

“나? 내는…….”

강봉길도 말끝을 흐렸다.

‘박성준이가 보자꼬 해가지고 왔다카믄 점마가 삐리하게 볼긴데.’

두 사람 모두 헛기침을 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부회장실로 향했다.

순간 두 사람은 서로의 진로가 일치함을 깨닫곤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부회장실 가나?”

“그러는 넌?”

“내는 부회장실 간다.”

“그래? 나도 가는데.”

“박성준이가 불러가꼬?”

“너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한명호가 씩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이 인간이 어디에 붙어야 하는 가를 눈치챈 것 같지 않아?”

강봉길도 치아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마 얼라 아니었나. 이제라도 눈치 깠으면 됐지.”

두 사람은 다시 부회장실로 향했다.

그리곤 당당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헉!”

“흡!”

부회장실로 들어서자마자 두 사람이 본 것은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가만히 자신들을 바라보는 시국이었다.

“부, 부, 부회장님…….”

“어…….”

바짝 굳은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시국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부, 부회장님. 시, 시방 지가 전후사정으로다가 다 이야기해 불겠당께요.”

“부, 부회장님. 마 지가 부회장님 없는 동안에 그, 주, 주주 경영권을 지키고자…….”

시국은 가만히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며 손짓했다.

이번에는 그들 자신의 의지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시국이 박성준에게 손짓했다.

박성준이 그의 앞에 커피를 가져다 놓았다.

시국은 가볍게 그것을 한 모금 넘긴 후 잔을 바라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클로버파를 JH그룹으로 변모시키고, 나름 국내 MBA 석사 코스 졸업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기업으로서의 체제를 갖춰 나갈 때 난 너희들을 배제하자고 했다.”

한명호와 강봉길이 바들바들 떨면서 시국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너희를 끌고 가려고 하셨지. 배운 건 없지만 어려서부터 조직 생활을 했고, 또 자기가 지도하고 하면 능히 기업체 임원의 역할도 할 수 있을 거라면서 말이야. 뭐, 솔직히 난 너희들이 있건 없건 상관없었기 때문에 아버지 말에 군소리 없이 따랐지.”

시국이 시선을 한명호와 강봉길에게로 돌렸다.

“이제까지는 아버지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어. 너희들은 실제로 물산하고 건설을 이끌면서 내 생각 이상의 능력을 보여 줬으니까.”

시국이 그대로 커피를 쭉 넘겼다.

“근데 내가 없는 사이에 주제에 맞지 않은 짓을 많이 했더라고. 세상에 엄연히 대주주가 살아 있는데 자회사 경영권을 노리다니.”

“요, 용서해 달랑께요. 지, 지가 눈알이 돌아부러가지고 그랬당께요.”

“부, 부회장님. 고마 살려만 주이소.”

두 사람이 머리를 바닥에 푹 숙인 채 시국을 향해 손을 싹싹 빌었다.

시국이 다시 조용하라는 손짓을 했다.

이번에는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시국은 그들이 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리게 했다.

하얗게 질린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시국은 통보했다.

“너희들이 그동안 회사에 끼친 노고를 인정해서 퇴직금까지 챙겨서 보내 주지. 조용히 은퇴해서, 없는 사람처럼 살아. 돌아가신 아버지 얼굴을 봐서, 마지막으로 너희들한테 주는 기회야.”

두 사람이 달리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가, 감사합니더. 고맙심더, 부회장님.”

“뒤, 뒤질 때까지 나대지 않겠당께라.”

그렇게 시국은 강봉길과 한명호가 당일 사직서를 박정목 회장에게 제출하게 했다.

갑작스레 둘의 사직서를 받고 의아해하는 박 회장에게 시국은 모습을 보였다.

박 회장은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시국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 자리에서 시국은 박 회장에게 몇 가지 지시사항을 전달한 후 다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 * *

『시위의 과격함이 도를 넘어 기본권을 초월하는 폭력이 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반으로서, 저는 그러한 거리의 야만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에 저는 서울경찰청장에게 시위대 강제 해산과 폭력 행위자 체포를 명령했고, 향후 시위대가 모이는 것을 방지하고자 광화문과 서울역 광장, 청계 광장 등에 차벽을 설치하라고 경찰청장에게 명령했습니다.』

2033년 10월 13일 15시.

남한석은 긴급 대국민담화를 통해 시위대 강제 해산과 불법 행위자 엄벌 및 시위 원천 차단을 경찰에 명령했음을 알렸다.

『혁명의 순수성이라는 미명하에 그간 불법 폭력 시위를 방조한 것은 총리인 저의 판단 실수였음을 인정하며, 그로 인해 발생했던 지난 수개월 동안의 혼란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리는 바입니다.』

깊게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을, 현장에서 담고 있는 기자들이나, 텔레비전으로 시청 중이던 시민들이나, 상하 양원의 의원들이나, 내각 장관들이나 모두 당혹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바라보았다.

『또한 지난 3년간 저와 내각 각료들이 노력했음에도 민생이 전혀 나아지지 않았음을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그 모습을 보며 서울역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한 시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지? 약이라도 먹었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국의 이름을 들먹이며 민생 파탄의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하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였기에 사람들의 그러한 반응은 자연스러웠다.

『고대로부터 국가에 흉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면 그 책임은 최고 정치 지도자가 지는 것이 마땅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현대 민주 국가의 지도자로서, 저는 지난 3년간의 잘못된 정치와 정책의 책임을 지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고자 합니다. 또한 상원도 그 책임으로부터 마땅히 자유롭지 못한바, 의회 해산을 통한 조기 총선으로 조속히 민생을 책임질 수 있는 새로운 의회와 내각이 구성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국민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그렇게 남한석의 마지막 대국민담화는 국민에 대한 사죄로 마무리됐다.

그것에 대한 여론은 크게 둘로 갈렸다.

“아니, 처음부터 저렇게 하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슨 당장에라도 다들 죽창을 들라는 듯이 선동하던 인간이 갑자기 저러는 걸 보면 약이라도 먹었나 하는 생각이 당연히 들지 않아요?”

갑작스런 그의 돌변에 당혹스러워하며 불쾌함을 표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뭐, 중간에 과정이야 어찌 됐건 지도자로서 자기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깨끗하게 물러나겠다고 하는 거 자체가 대단한 거야. 광복 이후에 역대 대통령이고 총리고 남한석처럼 저렇게 자기 잘못 깔끔하게 인정했던 사람이 누가 있었어?”

진솔하게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퇴임을 선언한 것 자체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남한석은 혁명의 배신자다! 퇴임 이후의 안락한 삶을 부패한 지배자들로부터 보장받고 저러는 거다!」

일부 과격분자가 남한석마저 혁명의 배신자로 몰며 분노를 토해 냈지만, 그저 인터넷상에서만 머물 뿐이었다.

그렇게 8월 27일, 남한석의 선동과 함께 시작됐던 한국의 혼란은 남한석의 사죄 담화와 퇴임 및 의회 해산 발표로 일단락됐다.

* * *

남한석의 퇴임 발표가 있던 날 밤.

2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시국의 청담동 펜트하우스에 여정연과 이동석이 방문했다.

그들의 잔에 와인을 채워 준 후 시국은 그들과 마주 보며 앉았다.

“그래도 사무총장이 이렇게 와 줘서 다행이에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와인을 물 마시듯 쭉 들이켜고 이동석이 이야기했다.

그 모습을 보고 시국은 미소를 지으며 이동석의 잔을 채워 주었다.

“그래도 제가 없는 동안 의장께서 부의장과 함께 잘 이끌어 주셨기에 가능했던 거 아니겠습니까?”

“아오. 말도 마십시오. 남한석이부터 재벌들까지, 진짜 무슨 다들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진짜 부의장 아니었으면 제가 뭐 제대로나 했을까 싶습니다.”

그 말에 여정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동석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부의장 덕분에 버텼지 저 혼자 했으면 정말 힘들었을 겁니다. 아무래도 저는 이 일이 취향에 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동석은 와인을 또 한 잔 쭉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국이 미소를 지었다.

“여하간 저 없는 동안에 두 분께서 원활하게 잘 막아 주셨습니다. 사실 남한석이나 한명호, 강봉길이 특이했던 게 아닙니다.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품을 순 있겠지요. 그럼에도 두 분께서는 전혀 그런 생각을 품지 않으셨단 사실이 저로서는 참 다행일 뿐입니다.”

“하하. 그래도 우리가 사무총장하고 같이 한 세월이 있고 한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배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여정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이동석의 말에 동의했다.

“뭐, 저로서는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두 분이 함께 이 나라를 뒤에서 이끌어 주셔야 하는데 이번 기회에 호흡을 잘 맞춰 봤으니 말입니다.”

순간 이동석과 여정연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무총장?”

이동석이 물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앞으론 두 분께서 저를 대신해 이 나라를 이끄셔야 합니다.”

여정연이 와인을 쭉 들이켜고 시국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저하고 의장님이 시국 씨를 대신한다는 게…… 또 저희를 떠나실 건가요?”

그녀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당장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왕 오빠 노릇할 거 나연이 결혼하고 애 낳는 것까지는 보고 조용히 은퇴할 겁니다.”

“은퇴라니……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네?”

“맞습니다. 사무총장. 아니, 이헌.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 겁니까? 은퇴라니요? 이헌이 없는 동안 우리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저하고 부의장이 하나하나 세세히 설명해 드려야 하는 겁니까? 네?”

다소 흥분한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시국이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갔다.

“언제까지고 저에게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전국헌터총연합회나, 국정자문회의나, 카르텔이나, 이 나라나.”

“…….”

“오래전부터 은퇴는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슬슬 그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

“마지막으로 제가 할 일을 끝마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은퇴 이후의 지배 구조를 위한 안배를 할 예정입니다. 일단 지금 제가 자리하고 있는 사무총장직을 성준이에게 넘겨줄까 합니다.”

“혹시 박성준 사무장을 말하는 거요?”

이동석의 물음에 시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성준이가 저 없는 동안 나름 제가 맡겼던 역할을 충실히 잘 수행하는 걸 보고 내린 결정입니다. 물론 곧바로 이 역할을 맡기진 않을 겁니다. 사무총장 밑에 총괄국장 자리 하나를 만들어 일을 가르칠 생각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의 귀환에 놀랄 틈도 없이, 갑작스러운 시국의 은퇴 선언에 이동석과 여정연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특히 여정연이 받은 충격은 상당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죠? 어떻게…… 이렇게 쉽게 우리를 떠난다고…….”

여정연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기세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시국은 가만히 손을 뻗었다.

탁자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잡고 시국이 이야기했다.

“모든 것엔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 모습을 바라보며 여정연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동석은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잠시 후, 여정연이 눈을 떴다.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시국을 바라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시국 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왜 이렇게 사람이…… 바뀌었어요?”

그 물음에 이동석이 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시국을 바라봤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시국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와인을 한 모금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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