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빌런의 인생2회차-193화 (193/200)

193 귀환 [Come Back Home]

한 사내가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고 있다.

단단해 보이는 갑옷만 믿고서, 무모하게 양손 검법을 이용해 적을 찌르는 사내의 모습에서 시국은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사람, 곧 죽겠구나.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의 옆구리에 기다란 화살이 날아와 깊게 박혔다.

사내의 검이 어지러워졌고, 점차 힘을 잃어갔다.

마침내 사내의 목에 도끼가 날아와 박혔고, 이내 사내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저자가 첫 번째 회귀자다.”

어둠의 말에 시국은 흠칫했다.

“첫 번째?”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단단한 방패와 갑옷으로 철통같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마치 고대 로마 제국의 병정같이 생긴 남자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거대한 태고의 용, 티아마트의 독물을 막아 내고 있었다.

“저자가 두 번째 회귀자다.”

그리고 어둠의 말이 끝날 무렵, 사내는 결국 티아마트의 독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또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붉은 망토를 걸친 여자가 울룰루 툼베베를 상대하고 있었다.

여자의 손에서는 끊임없이 온갖 강력한 고위 마법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은 울룰루 툼베베가 쌓아 올린 시체로 된 방벽에 번번이 막힐 뿐이었다.

“저자가 세 번째 회귀자다.”

그렇게 장면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드루이드, 네크로맨서, 힐러, 근접 딜러, 원거리 딜러, 탱커, 레인저 등등.

무수히 많은 종류의 A급 초인들이 티아마트나 울룰루 툼베베와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패배했다.

아흔여덟 번째 회귀자인, 무수히 많은 언데드로 울룰루 툼베베와 함께 네크로맨서와 네크로맨서의 화려한 대결을 보여 주던 자가 마침내 울룰루 툼베베의 손에 죽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장면 변환은 일어나지 않았다.

“네 앞에 있던 아흔여덟 명의 회귀자들은 모두 실패했다.”

어둠이 시국을 바라봤다.

어느 순간, 어둠의 얼굴은 평범한 신사의 얼굴이 돼 있었다.

하지만 너무도 평범했기에 시국은 그 인상을 구체적으로 인지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너와는 달리 선량하고 양심적인 존재였다.”

갑작스러운 어둠의 인성 지적에 시국의 인상이 순간 팍 일그러졌다.

“그래서 실패했다.”

다시 장면이 변환됐다.

2017년 5월 3일 새벽.

클로버 VVIP룸.

그곳에서 어린, 이제 갓 회귀한 시국이 김양기를 죽이고 있었다.

“김양기는 상당히 위험한 인물이었다. 지난 아흔여덟 개의 세계에서 그는 항상 울룰루 툼베베나 펜리르의 하수인이 돼 세상의 멸망을 앞당기는 역할을 했다.”

“…….”

“회귀자들, 그들 아흔여덟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명분에 얽매여, 혹은 용기가 부족해, 혹은 차마 사람을 죽일 수가 없다는 이유 등으로 김양기를 방치했다.”

“…….”

“하지만 너는 회귀 직후 가차 없이 김양기를 죽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너는 그의 조직을 흡수해 이용해 먹을 생각이어서 그렇게 한 것이지만, 아흔여덟 명 중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단박에 해낸 것이다.”

다시 장면이 뒤바뀌었다.

티아마트와의 싸움에서 시국이 암흑 군단을 이용해 놈을 죽이는 장면이 들어왔다.

“너 이외에도 암흑 군단의 행군 스킬을 지닌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전우의 명예를 더럽힐 수 없다며 그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고, 결국 티아마트에 의해 죽었다.”

“…….”

“하지만 너는 이번에도 가차 없이 기회가 되자마자 사용했다.”

다시 장면이 바뀌었다.

울룰루 툼베베와의 싸움을 위해 시국이 원정대 소속 헌터들을 죽이고 사역마에게 그들을 흡수시키는 장면이 들어왔다.

“다른 이들이 부상 입은 자들의 안위를 챙겨 주느라 제대로 울룰루 툼베베와 싸우지도 못한 것과는 달리 넌 울룰루 툼베베를 죽이기 위해 동료를 죽여 사역마를 강화시키는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다시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결박된 울룰루 툼베베와 펜리르의 망령이 눈에 들어왔다.

“너 이외의 아흔여덟 회귀자들은 모두 너와 비슷한 힘을 가졌다. 하지만 그들은 너처럼 야비하지도, 목적 달성을 위해 그 어떠한 수단이건 다 사용할 줄도 몰랐다.”

“…….”

“이게 내가 네게 보여 줄 진실이다.”

한동안 시국은 가만히 두 망령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안간 시국이 피식 웃었다.

“착한 일은 하면 보상을 받는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나쁜 놈이라 이렇게 특혜를 받는다는 건 또 처음 들어보네.”

시국이 어둠을 바라봤다.

어둠의 얼굴은 다시금 인지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돼 있었다.

“그래서, 이제 뭘 어쩌실 거요?”

“네게 선택권을 주겠다.”

“선택권?”

어둠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저 두 망령의 기억과 능력을 모두 흡수한 후 100번째 세계로 돌아가 펜리르를 죽이고 세상의 멸망을 막는다. 그리고 이미 멸망한 다른 아흔아홉 개의 세계를 복구한다.”

어둠이 왼손을 내밀었다.

“여기서 이야기를 끝내고, 죽음을 맞이한다.”

시국은 너무도 황당해서 또 웃어버리고 말았다.

“사실상 이건 뭐 답정너 아닙니까?”

어둠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가 됐건 제가 손해 보는 것 같은데?”

“너는 죄인이다.”

“……?”

“한 아이를 고아로 만들었고, 숱한 사람을 죽였다.”

“…….”

“이것은 지난 아흔아홉 개의 세계에서 똑같이 네가 저질렀던 짓이었다.”

“…….”

“그 죗값을 치르지도 않고 이렇게 특혜만 받으려고 했던가?”

시국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흔아홉 번째 회귀자여. 이것이 그대가 치러야 할 할 속죄제다.”

시국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한동안 어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둠의 얼굴이 점차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 가며, 인지 가능한 수준까지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어둠은, 시국이 최초로 죽였던, 그를 비하한 주부의 얼굴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에 그가 죽였던 류야오방을 비롯한 숱한 헌터들의 얼굴로까지 다양하게 변모했다.

그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시국이 직접적으로 죽인 자들이라는 것.

“속죄 없이는 구원도 없다. 이것이 세상의 법칙이다.”

시국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의 끝에서 시국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선택의 여지가 애초에 없는 것을 두고 선택지를 줬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시국이 어둠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 순간, 시국의 시야가 끊임없는 암흑에 덮였다.

그 암흑 속에서 시국은 울룰루 툼베베와 펜리르의 망령과 하나가 됐다.

온몸이 한 차례 녹아내리고 다시 재생되는 것처럼, 영혼이 녹아내렸다 다시 재생되는 것처럼, 그렇게 시국은 변해갔다.

그리고 그 변화의 끝에서 시국은 의식을 잃었다.

* * *

2033년 10월 10일 월요일.

우울한 소식이 연이어 출근길에 오른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을 어지럽혔다.

『캘리포니아주 L.A에서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로 현재까지 4만여 명이 사망했으며, 이 가운데 한인 피해자의 규모는…….』

『내전으로 혼란한 중국 베이징에 A급 던전이 나타난 가운데 베이징 정부와 상하이 정부는 던전 대책 마련을 위한 일시적 휴전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프랑스 정부가 던전 보안 공백을 방지하기 위해 던전보안관계법을 제정한 가운데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헌터 사이에 물리적 충돌이…….』

여러 우울한 소식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시민들의 가슴을 옥죄는 것은 국내에서 들려오는 암울한 뉴스였다.

『최근 격화되는 시위가 폭동의 양상을 보이며 남한석 총리가 비상 계엄령을 발동하려 한다는 소식이 정가에 파다한 가운데 오늘 상하원 합동 임시 총회에선 내각불신임에 관한…….』

그나마 출근이라도 하는 사람들은 직장에서 바쁘게 일하며 그러한 우울한 감정을 털어버릴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직장조차 없는 자들은 금방이라도 세상이 망할 것 같은 불안감에 떨어야만 했다.

그리고 일부 과격한 자들은 그대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한창 싸우고 있는, 이제는 폭도가 된 시위대에 가담했다.

“남한석은 어쩌면 이 나라 자체가 망하길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요.”

여정연의 말에 그녀와 함께 초인협회 협회장실 창을 통해 광화문 광장에서의 패싸움을 바라보던 이동석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우리가 접근을 잘못한 걸 수도 있다고 봐요. 남한석을 합리적 행위자라고 판단한 것 자체가 이 모든 사단의 시발점이 됐을 수도 있죠.”

이번에도 이동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정연이 그를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흠…….”

이동석이 팔짱을 꼈다.

“남한석을 제거하고 새로 총리를 세워야 하지 않겠어요?”

여정연의 말에 이동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연스럽게 남한석을 죽일 수 있다면 모를까, 누가 봐도 살해당한 걸로 보이게끔 죽여 버리면 오히려 더 사태가 나빠질 겁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남한석이 저렇게 하도록 내버려 둬요?”

“내버려 두자고 한 적은 없습니다. 단지, 좀 더 상황을 연착륙시킬 방도를 찾아야 한다는 겁니다.”

너무도 조심스러운 이동석의 모습에 여정연은 속이 꽉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탱커들은 다 이런가?’

시원시원하게 일처리를 하는 시국의 업무 스타일이 오늘따라 더욱 그리워진다 생각하며 여정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청와대는 용 회장님이 철통같이 마크하고 계시니까, 잠시만 기다려 봅시다. 정 안 되면 최후의 수단으로 암살이란 걸 할 수도 있는 거니까.”

여지를 남겨두는 이동석의 말에 여정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석이 그런 여정연에게 가볍게 인사한 후 협회장실을 나갔다.

한동안 여정연은 가만히 창밖의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다 그녀는 시선을 청와대가 있는 방향으로 돌렸다.

저 멀리서 보이는 푸른 기와가 오늘따라 스산하게 느껴졌다.

“후우…….”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이동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암살이라…….’

이동석은 눈을 감았다.

‘이헌…… 왜 나한테 이렇게 힘든 자리를 맡긴 거요?’

암살이니 정치니 첩보니.

그 모든 게 이동석에게는 마냥 어렵기만 했다.

그는 그저 한국에 몇 안 되는 B급 헌터로서, 가족을 부양하며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며 살고 싶을 뿐이었다.

권력이니 뭐니, 그에겐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시국은 그에게 권력을 줬다. 그리고 그 권력은 시국이 사라진 지금 그를 강하게 짓눌렀다.

이동석이 머리를 한 차례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는 자기 손가락 사이에 낀 머리카락 더미를 볼 수 있었다.

‘하…….’

이동석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엘리베이터는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고, 그는 빠진 머리카락을 바닥에 털어 냈다.

* * *

잠원동 마리안느 펜트하우스.

오늘도 나연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 이정훈과 유서영의 초상화 앞에 향을 꽂았다.

이제는 슬픔이 반감될 법도 했지만, 여전히 나연이는 두 사람의 초상화를 보면 눈시울이 붉어졌다.

향을 꽂고 나면 그녀는 곧장 아침상을 차렸다.

황준기가 지난 밤에 만들어 놓은 카레에 밥을 비벼 먹으며 그녀는 JH그룹 박정목 회장이 보낸 JH그룹 상호 출자 현황표를 읽어내려갔다.

‘난 경영학과가 아닌데…….’

거의 20대 대부분을 연구실에서 마력의 데이터만 보며 살아온 그녀에게 기업법이니 주주니 출자니 하는 것은 마냥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아빠와 오빠의 회사를 지키려면…….’

최근 박정목과 JH길드 사무장 박성준으로부터 강봉길과 한명호가 기업을 집어삼키려 한다는 소리를 들은 만큼 그녀도 나름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다.

식사를 끝마치고 그녀는 곧장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설거지가 끝날 무렵,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때렸다.

“어려운 거 보고 있네?”

순간 나연이는 온몸이 굳어 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잘못 들었을 거야.’

결코 들을 수 없는 시국의 목소리였기에, 나연이는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환청이 아니야.”

하지만 또다시 들려오는 시국의 목소리에 나연이는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렸다.

“좋은 아침이야, 나연아.”

시국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연이에게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연이는 말없이,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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