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진실 [Lunatic Fringe]
가장 강력한 남한석의 반대파이자 유력한 차기 내각 총리였던 한창명의 살해.
밤도 아닌 아침에, 어디 인적 드문 곳도 아닌 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한강 변에서 일어난 끔찍한 테러는 대중을 더욱 광기로 몰고 갔다.
“국민을 개돼지로 아는 개돼지에게 죽음을 주자!”
남한석에 대한지지 여부와 무관하게 작금의 시스템 자체에 불만과 분노가 가득 쌓인 자들과 남한석을 지지하는 자들은 과격한 구호를 부르짖으며 검열되지 않은 한창명의 시체 사진을 피켓처럼 들고 광화문 광장 한쪽을 가득 메웠다.
“지금이 해방 정국이냐! 살인자를 찾아내 엄벌하라!”
다른 한쪽에서는 남한석을 반대하는 자들이, 여야 혹은 이념에 무관하게 폭력과 테러를 규탄하며 죽은 한창명의 영정 사진이 프린트된 피켓을 들고 조용히 촛불을 들었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상반된 두 집단이 엉켜 있고, 그들 사이를 딱히 경찰이 크게 막지 않는 상황에서 두 집단의 충돌은 필연적이었고 또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각자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응어리와 피해의식이 엉뚱하게 서로를 향해 발산되며 여기저기서 산발적인 폭력 사태가 발발했다.
서울경찰청장이 전권을 쥐고 지휘하는 서울경찰청 기동타격대 소속 시위진압팀은 그저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경찰은 뭐 하는 거예요! 빨리 와서 이 미친놈 좀 잡아가세요!”
“뭐?! 미친놈?”
충돌이 격화돼 시위대가 경찰을 찾으면 그제야 경찰은 확성기를 들고 경고 방송 정도만 할 뿐이었다.
“현재 시위가 지나치게 격화되고 있습니다. 다들 진정하시고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공허한 메시지는 시위대 개개인이 지닌 분노와 그 분노를 기반으로 형성된 군중심리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결국 폭력은 패싸움으로 확대됐고, 패싸움은 이내 방화와 폭동으로 이어졌다.
그 상황에서 경찰은 정부종합청사와 외교부 청사, 주한 미국 대사관 그리고 초인협회 빌딩만을 지키며 오히려 마치 패싸움하기 편 하라 배려라도 하듯 공간을 더 크게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날이면 날마다 시위대는 마치 약속이라도 하듯 광화문 광장에 모여 패싸움을 이어갔고, 대형병원 응급실은 날마다 실려 오는 부상자들로 바쁘게 돌아갔다.
그런 상황 속에서 마침내 9월 23일 금요일.
상원 본회의에서 내각불신임안 투표가 이루어졌다.
모든 언론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무기명 투표로 진행된 내각불신임안은 단 10표 차로 과반을 획득하지 못해 부결됐고, 남한석은 잔여 임기를 무사히 채울 수 있게 됐다.
* * *
청와대 총리 집무실.
남한석이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의 맞은편에 앉은 삼화그룹 회장 용재형은 무테안경을 고쳐 쓰며 입을 열었다.
“기사회생하셨습니다, 총리님.”
그 말에 남한석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다 회장님 덕분이죠.”
“과찬이십니다. 전 단지 재계를 대표해 정국 불안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의원님들께 설명해 드렸을 뿐입니다.”
“아무래도 다들 회장님의 설명에 감복했나 봅니다. 하하하.”
다소 들떠 있는 남한석의 모습을 바라보며 용재형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뭐,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한 전 의원이 그렇게 비명에 가고 난 뒤로 의원님들 상당수가 부담을 많이 느꼈으니 말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당장 제 보좌관들도 저보고 앞으로 다닐 때는 방검복을 안에 입으라고 난리인데 말입니다. 하하하.”
“뭐, 총리님이야 방검복이 필요하겠습니까? 애초에 불의의 습격과는 거리가 먼 분이신데 말입니다.”
순간 남한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건 무슨 소립니까, 회장님?”
“별 이야기 아닙니다. 단지 총리님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많이 받고 있어서 그런 불의의 사고를 겪을 일이 없다는 뜻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용재형은 커피를 한 모금 쭉 넘겼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남한석의 눈가에 순간적으로 광기와 살기가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그래, 앞으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총리님?”
용재형이 화제를 전환하자 남한석도 거기에 보조를 맞추기로 했다.
“뭐, 일단 내년 선거부터 준비해야지 않겠습니까? 당장 불신임안이 부결되자마자 분당을 하니 마니 하는 종자들이 있는데 그것들부터 어떻게 해결해야겠지요.”
“판세가 별로 유리하지 않습니다.”
“유불리야 하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당장 폭동 직전의 시위대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잘 해결될 겁니다.”
용재형은 가만히 남한석을 바라봤다.
그는 이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마저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리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남한석은 자리에 앉은 채 용재형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용재형은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남한석은 정색을 하며 차를 쭉 들이켰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 같은데 말입니다?”
그림자 속에서 한 사내가 튀어나왔다.
남한석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냥 떠본 거야.”
“그렇다기엔 상대방이 무려 삼화그룹 회장이라는 게 문제지.”
천장에서 깃털처럼 한 여인이 내려와 착지했다.
두 사람은 각각 남한석의 좌측과 우측에 서서 그를 바라봤다.
“우리가 한창명이 보낸 거 알고 있을까요?”
남자의 물음에 남한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국정원이 옛날에 쓰던 루트로 도주까지 완벽하게 했어. 증인들도 우리 얼굴을 본 사람은 없고.”
“그래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야. 가서 저 인간도 죽여 버릴까?”
여자의 말에 남한석이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용재형은 한창명하고 달라. 한창명이 뒤진 것보다 용재형 다친 게 더 큰 뉴스거리가 될 거야. 일단 기다려.”
남한석의 말에 여자와 남자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한편, 빠르게 차로 돌아간 용재형.
뒷좌석에 앉은 그에게 조수석에 앉은 수행비서가 조금 전 녹음된 음성을 들려주었다.
『우리가 한창명이 보낸 거 알고 있을까요?』
그가 집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남한석과 의문의 남녀 사이에 오간 대화였다.
“회장님 말씀대로입니다. 한창명 전 의원은 남한석 총리가 살해했습니다.”
수행비서의 말에 용재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녹음된 목소리 분석해서 혹시 전과자들 중에 일치하는 사람 없나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전과자 인터뷰 파일에서 일치한 게 없다면 옛날 국정원 자료랑 초인협회 자료까지 다 뒤져서 빌런 중에서도 한 번 찾아보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이동석이랑 여정연이하고 자리 한번 만들어 봐.”
“네.”
지시가 끝났다는 듯, 용재형은 시트에 그대로 몸을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
* * *
마지막까지,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서 싸우던 맨페이스드 몬스터가 죽으면서 마침내 시그니엘 타워 광장에 모인 모든 몬스터들이 죽었다.
오로지 김양기만이 허공에서 그 장면을 내려다보며 침묵하고 있을 뿐이었다.
모든 몬스터를 처치한 시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양손에는 사마귀 인간의 보스인 맨페이스드 몬스터의 양팔이 칼처럼 들려 있었다.
그의 온몸에 녹색 체액이 가득 묻어 있었는데 상당히 기괴한 모습을 연출했다.
“아따…… 대단하구마이.”
김양기가 딱딱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시국은 가볍게 무기를 흔들어 보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시방 나하고 뭐하자는 것인가?”
“말했잖습니까. 내 손자 죽인 놈들한테 복수한 거라고.”
“……시방 나하고 장난하는 것이당가?”
“장난하는 걸로 보입니까?”
“……너 뭐여.”
“보다시피. 이시국입니다. 상당히 젊은.”
“나가 분명히 봤어야. 너가 일본에서 뒈져부렀다는 뉴스 말이여. 심지어 외교부 통해서 확인해 봤을 적에도 넌 확실히 뒤져부렀어. 아니, 하다못해 그때 안 뒤져부렀더라도 13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순 없제.”
“…….”
“근데 너 뭐여? 뭔데 젊은 낯짝으로다가 내 앞에서 내 새끼들 쑤신 것이여?”
시국은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무기에 묻은 녹색 체액이 흩뿌려졌다.
“그러는 당신은 뭐요?”
“뭐?”
“내가 알기로 당신은 분명 C급 정도밖에 안 되는, 그저 그런 인간이었는데, 어느새 A급이 돼 있더라? 그리고 지금은 A급 몬스터가 돼 있고.”
“느가 뒤져불고 나서 상당한 기술적 진보가 있었제. 네놈이 이해하지 못할 그런 진보 말이여.”
“그 진보가 사람을 몬스터로 만드나?”
“그건…… 저승에 가서 펜리르 고년 만나서 물어봐야.”
슝-!
빠르게 김양기에게서 독침이 뿜어져 나와 시국에게로 쏘아졌다.
쿵-!
독침은 그대로 시국이 있던 자리에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시국은 가볍게 그 공격을 피한 후 도리어 땅에 박힌 독침을 밟고 도약해 김양기에게로 날아들었다.
김양기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허공으로 높게 솟구쳐 올라 시국을 피했다.
서걱-!
간발의 차로 시국의 무기가 김양기의 꼬랑지를 살짝 긁었다.
“크윽-!”
김양기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거 비겁하게 하늘에서 설치지 말고 땅으로 내려오지?”
시국의 말에 김양기가 씩 웃었다.
“너 같으면 땅에서 싸우것냐?”
“계속 거기에 있으면 어차피 나 공격 못 할 거 아니야?”
“어차피 이짝으로 시방 후발대가 오고 있응게, 동상은 거서 쪼까 쉬다가 그것들하고나 놀랑께.”
시국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생명력에는 별문제가 없었지만, 마력은 반토막났고, 집중력은 70%를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이대로 김양기의 후발대가 찾아온다면 아까처럼 능수능란하게 싸울 수는 없을 터였다.
‘어떻게 하지?’
이대로 원자화 스킬을 사용해 별이와 함께 탈출한다면 과연 김양기는 어떻게 할까?
‘아마 계속 쫓아 오겠지.’
어쨌건 김양기는 시국이 첫 번째 인생에서 낳은 씨를 죽였고, 시국은 김양기의 씨 혹은 창조물 혹은 소환물을 죽였다.
‘강화도로 가기도 힘들어.’
까마귀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별이와 함께 도보로 강화도로 가기는 상당히 힘들 터였다.
까마귀 등에서 내려다본, 서울에서 인천까지 이어지는 지옥도를 사실상 동화 스킬 제외하면 일반인과 다름없는 아이와 함께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정상적인 발상도 아니었다.
‘간다 하더라도 그놈들이 김양기를 막을 수 있을까?’
이러나저러나 김양기는 A급이다.
허공에서 사단장을 향해 벌침을 쏜다면 사단장은 한 방에 죽을 것이고 그 이후 지휘계통 혼란과 사기 저하로 전의를 상실한 군인들이 김양기를 따르는 곤충형 몬스터의 밥이 될 게 뻔했다.
까악-! 까악-! 까악-!
까마귀들의 울음소리가 스산함을 높이는 가운데 시국의 고민은 깊어졌다.
“아따 저 멀리서 성질 급한 것들이 날아오는 구마이. 매미 친구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디 말이여. 우덜 동상 쉬는 시간은 좀 줘야 하는디, 쪼까 힘들게 되부렀어.”
김양기가 야비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젠장…….’
시국이 이를 갈았다.
까악-!
그 순간,
“뭐, 뭐여 이것들은!”
쿵-!
마치 공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나타난 거대한 까마귀 다섯 마리가 동시에 김양기에게 몸통박치기를 감행했다.
순간적으로 가해진 갑작스런 충격에 김양기는 중심을 잃었다.
까악-!
까마귀 한 마리가 낮게 날아 시국이 충분히 도약할 정도로 내려와 등을 내주었다.
- 어서 타요.
그리고 시국은 자신의 뇌리를 울리는 드루이드 노파의 텔레파시를 캐치하며 빙긋 웃었다.
그대로 시국은 까마귀의 등에 올라탔다.
까악-!
까마귀는 쏜살같이 김양기를 향해 돌진했다.
4마리의 까마귀들을 여섯 개의 다리로 때려잡던 김양기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까마귀를 탄 시국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시국이 까마귀의 등에서 도약해 김양기에게 날아갔다.
동시에 김양기의 다리에 붙들려 있던 까마귀들이 역으로 그 다리를 붙잡아 그의 기동성을 약화시켰다.
푹-!
그대로 시국이 든, 사마귀 인간의 양팔이 김양기의 배에 정확하게 꽂혔다.
“끄아아아악!”
김양기가 비명을 내질렀다.
까마귀들을 잡고 있던 놈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 즉시 까마귀들은 김양기의 날개를 집중적으로 쪼기 시작했고, 시국은 사마귀 인간의 팔로 김양기의 복부와 가슴을 난도질했다.
날개가 찢긴 김양기는 그대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가 지면에 완전히 충돌하기 직전에 까마귀들과 시국은 그의 몸에서 떨어져 안전하게 착지했다.
쿵-!
큰 충돌음과 함께, 흙먼지를 일으키며 김양기는 마침내 땅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