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전망 [Outlook on]
한동안 늙은 장교는 말없이 시국을 바라보기만 했다.
점차 그의 멱살을 잡은 시국의 손아귀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고, 어느새 늙은 장교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렇다.”
늙은 장교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을 하자 시국은 그를 놔 주었다.
늙은 장교는 짧게 기침을 한 후 복장을 정리했다.
그런 그를 향해 시국이 물었다.
“관등성명은?”
“침입자에게 그것을 말할 의무는 없다.”
“하…… 참나 진짜.”
시국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얼굴을 한 차례 쓸어 올렸다.
순간 강한 마력 파장이 막사 내부를 휘저었다.
물리적 실체마저 지니게 된 파장에 의해 그나마 멀쩡하게 정돈돼 있던 문서들이 어지러이 허공에 휘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에 정통으로 노출된 늙은 장교와 통신병은 그만 그 자리에서 얼어 붙어버렸다.
심기가 약한 통신병은 주저앉으며 오줌을 지렸고, 늙은 장교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보여 주던 패기와 자부심을 더 이상 외부로 표출하지는 못하게 됐다.
“관등성명.”
차갑게 가라앉은 시국의 목소리에 늙은 장교가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
“외, 외곽경비대대 대대장 이, 이상호 주, 중령이오.”
“좋아, 중령. 왜 나한테 공격을 했지?”
“그, 그대를 몬스터로 여겼소.”
“어째서?”
“최, 최근에 이, 인간형 몬스터가 나타난 적이 있었소.”
“인간형 몬스터?”
맨페이스드 몬스터를 의미하는 건가 싶어 시국은 가만히 중령이 대답하길 기다렸다.
“그, 그렇소. 사람의 형상을 한 몬스터요.”
“몬스터의 형상에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그놈들이 육지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고, 정찰소대가 몇 차례 확인한 적도 있었지만…… 일주일 전에 나타난 놈은 아예 사람의 외형을 하고 있었소.”
어쩌면 몬스터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22세기 빌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시국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날 쏜 건가? 별다른 적대행위도 없었는데?”
“허, 허가 없이 영공을 비행하는 지적 생명체는 선제 타격하는 것이…… 우리 원칙이오.”
“그 원칙이 날 화나게 했는데 그럼 내가 내 원칙대로 날 화나게 한 새끼들 다 쓸어버려도 그쪽은 할 말 없는 거네? 그렇지?”
시국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느낀 중령은 침을 꼴깍 삼켰다.
“외곽경비대대라는 거 보니까 네 윗선도 있는 것 같은데. 누구지?”
“사, 사단장님이 계시오. 그분께서 이 섬을 지배하시지.”
“그래?”
군정 같은 건가? 생각하며 시국이 중령에게 이야기했다.
“그럼 그 사단장이 있는 곳으로 날 안내해.”
“그, 그렇게 할 수는…… 헙!”
더욱 강해지는 마력파장에 중령은 결국 입을 다물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섬으로 들어갔다.”
“섬의 존재들은 어떻게 반응하나?”
“선제 공격을 가했다.”
“어떻게 됐나?”
“녀석에 의해 제압당한 듯하다.”
“어쩔 수 없다. 일단 복귀해라.”
“알았다.”
* * *
강화도를 지배하는 자.
이름보단 사단장이라는 직함으로 더 많이 불리는 서원우 소장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농업 생산량 목표 재고에 관한 각급 지휘관들의 건의서를 읽고 있었다.
“하여간 말이야. 이 농민이란 것들은 참 말이 많아. 까라면 깔 줄 알아야지. 무슨 땅이 어쩌고저쩌고…… 양질의 몬스터 사체를 비료로 썼으면 그만큼 생산량이 증대되어야지, 무슨 목표치가 과하다 뭐다…… 안 그래?”
사단장의 물음에 그의 뒤에서 그의 어깨를 주무르던 젊은 여자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잉, 저는 잘 몰라요, 그런 거.”
“야 이년아. 내 곁에서 시중만 2년째 들고 있으면 너도 좀 이런 어? 여러 정무적 행정적 군사적 기초 판단 능력은 말이야. 좀 키워야 할 거 아니야? 안마만 잘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야.”
“아잉. 제가 어디 안마만 잘하나요?”
그 말에 결국 사단장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럼 안마 말고 잘하는 거 지금 당장 또 확인해 볼까?”
사단장이 능글맞게 웃으며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가 가볍게 그의 어깨를 치며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 아직 근무 시간이잖아요. 그리고 바깥에 경비병도 있는데.”
“허허허허허. 들으라면 들으라지! 저것들도 가끔은 이런 이벤트 정도는 있어야 군 생활할 맛이 날 거잖아.”
사단장이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는 교태를 부리며 그가 자신의 몸을 안기 편한 자세를 취했다.
막 사단장이 여자의 허리를 팔로 감싸고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려 할 때였다.
“사, 사단장님!”
사단 통신 장교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사단장의 표정이 썩었다.
“야이 새끼야! 들어오기 전에 관등성명부터 시작해서 어! 좀!”
하지만 통신 장교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조, 조금 전에 중앙경비대대에서 통신이 왔습니다. 현재 미지의 생물과 교전 중이라고 합니다.”
“뭐?”
중앙경비대대의 교전 연락이란 말에 사단장은 여자를 살짝 밀쳐냈다. 그리곤 통신 장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세히 이야기해 봐.”
“주, 중앙경비대대 통신병의 말로는 외곽경비대대를 뚫고 미지의 생물이 나타나 그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외곽경비대대를 뚫어?”
“네.”
“확실해?”
“확실합니다.”
“지금 상황은?”
“중앙경비대대가 기갑중대와 보병중대를 총동원해 방어 중……”
콰아앙-!
통신 장교의 보고는 본부를 뒤흔드는 엄청난 굉음에 끊겨 버렸다.
사단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무슨 소리야, 이거?!”
“아, 알아보겠습니다.”
통신 장교가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사단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랍을 열어 권총을 꺼내 실탄을 장전했다.
곧, 통신 장교가 뛰어 들어왔다.
우당탕-!
문제는 얼마나 당황했는지 들어오다 미끄러져 바닥에 쌓아 놓은 여러 집기와 부딪히고 말았다.
그는 곧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크, 큰일입니다! 보, 본부 외부 경비대가 미지의 적과 교전 중입니다!”
“뭐?!”
타타타타타-!
쾅-! 쾅-!
점차 가까워지는 총성과 폭발음에 사태가 심상찮음을 느낀 사단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갔다.
“막아! 막아!”
“제3 소대 전멸!”
“제4 소대 긴급 지원 요청!”
바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난장판이었다.
사단장의 권위와 강화도 전역을 지배하는 사단의 권력을 상징하던 사단기는 태극기와 함께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쾅-! 쾅-! 쾅-!
아군의 포격인지 적의 공격인지 모를 폭발의 여파가 사단 본부 사단장 막사까지 후폭풍을 몰고 오며 만든 결과물이었다.
“끄아아아악-!”
전방에서 수많은 병사가 거의 동시에 내지르는 비명이 바람과 함께 날아들어 사단장의 고막을 때렸다.
사단장은 굳은 안색으로 권총을 들었다.
쿠궁-!
그때, 커다란 흙먼지와 함께 한 존재가 허공에 솟아올랐다.
사단장은 즉시 그것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탕-! 탕-! 탕-! 탕-!
4발의 총성이 울려 퍼지고, 마력을 품은 탄환이 그대로 허공의 존재에게 날아갔다.
그리고 탄환은 존재 근처에서 폭발하며 수백 개의 마력 조각으로 화해 존재를 둘러싼 자체적인 화망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허공에 뜬 존재는 그 화망을 유유히 손으로 걷어내며 다시 땅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착지하며 그것과 사단장의 시선이 정확하게 허공에서 부딪혔다.
사단장은 전혀 흔들리지 않은 표정으로 땅으로 떨어진 존재에게 다시 총을 겨누었다.
탕-! 탕-! 탕-!
3발의 총성과 함께 마력을 가득 품은 탄환이 빠르게 상대방에게 날아갔다.
상대방은 다시 허공으로 몇 차례 도약해 공간을 건너뛰며 그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탄환은 그대로 유턴하며 목표물을 따라갔다.
“어쭈?”
목표물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탄환을 느끼며 아주 시니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펑-! 펑-! 펑-!
그리고 3차례의 약한 폭음이 이어졌다.
“마력 탄환을 쓰는 걸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시니컬한 미소를 지은 자, 시국이 천천히 사단장에게 다가왔다.
사단장은 그 이전까지 보이던 평정심을 잃고 흔들리는 눈으로 시국을, 정확하게는 그의 오른손 손가락들 사이에 잡혀 있는 3발의 마력 탄환을 바라보았다.
“B급 사수. 산탄 스킬과 유도탄 스킬이라. 사수로서는 나쁘지 않네. 거기다 군복까지 입으니까 더더욱 말이야.”
시국이 바닥에다 마력 탄환을 내던졌다.
사단장은 더 이상 시국을 향해 총을 겨누지 않았다.
탄환은 아직 다섯 발이나 남아 있었지만, 이미 사단장은 자신과 시국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격차를 알아차렸기에, 저항의 무의미함을 깨달은 것이었다.
“뭐야? 시시하게 벌써 항복이야?”
시국이 자기보다 약간 작은 사단장을 바라보았다.
사단장은 권총을 품속에 집어넣은 후 시국을 똑바로 바라봤다.
“뭘 원하시오?”
“일단 사과부터 받아야겠어. 느닷없이 대공포에 맞을 뻔한 데다가 여기까지 오면서 총알이며 대전차 포탄이며 별의별 걸 다 피하느라 고생을 좀 했거든. 심지어 미니 레일건도 쏘더라니까. 그러니까, 사과를 좀 받아야겠어.”
시국의 말에 사단장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뒤로 2보 물러난 후 허리를 숙였다.
“초면에 내 부하들이 무례했으니 그 죄에 대해 통렬한 반성을 하겠소.”
그 사과에 오히려 놀란 쪽은 시국이었다.
“아…… 뭐…… 그래. 사과, 받아 주지.”
사단장이 다시 허리를 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뜻을 전하겠소.”
“감사?”
시국이 흥미롭단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내 부하들을 한 사람도 죽이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 말이오.”
시국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내가 한 사람도 안 죽였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만약 그대가 단 한 사람이라도 죽였다면 그들의 영혼이 내게 작별을 고했을 테니까.”
알 수 없는 그의 이야기에 시국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됐고. 일단 사과를 받았으니 그다음 용건을 물어보지.”
“말해 보시오.”
“왜 날 보자마자 다짜고짜 네 부하들이 포격을 한 거지? 심지어 중령이란 놈은 항복한 척하고는 나랑 자폭을 시도했어. 수류탄을 까서 말이야.”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처음엔 그 중령이란 놈 독단인 줄 알았는데 여기 오면서 네 부하들 때려잡으며 느낀 건데 그게 아니야. 이건 마치…… 그래…… 나를, 아니 나에 투영한 어떤 존재를 굉장히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 같았어.”
“…….”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시국이 그렇게 사단장에게 물어보는 사이, 어느새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사단장은 그들에게 총구를 아래로 내리라 손짓한 후 시국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일단 막사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소? 여기선 좀 이야기하기엔 이야기가 짧고 단순하지가 않아서 말이요.”
그 말에 시국은 한 차례 주위를 쓱 둘러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사단장이 먼저 앞장서서 막사 안으로 들어갔고, 시국은 곧 뒤따랐다.
두 사람이 막사 내부로 들어가자 병사들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사태를 파악해보려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장교들의 지휘하에 엉망이 된 사단 본부를 수습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사단장이 직접 데리고 들어간 이상 그들이 무어라 할 권한은 없었으니까.
“커피가 좋겠소? 아니면 그냥 물이 좋겠소?”
“커피도 있나?”
“밭에서 재배한 게 있긴 있소.”
“그래? 그럼 그거로 한잔 줘 봐.”
곧 커피 두 잔을 들고 사단장을 보좌하던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커피잔을 시국의 앞에 두며 그에게 윙크를 날렸다.
시국은 그저 차갑게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여자는 조용히 막사 한쪽에 마련된 방으로 들어갔다.
시국은 가만히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쓴맛이 강한 것이 커피보단 한약에 가까웠다.
시국은 그대로 커피 잔을 내려놓은 후 사단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 전에 내가 그대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소.”
“뭔데?”
“그대는…… 어떻게 이 세상에 오셨소?”
의미심장한 그의 물음에 시국의 얼굴에 맴돌던 시니컬한 미소가 싹 사라졌다.
“그게 무슨 소리지?”
시국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사단장을 바라봤다.
사단장은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나는 느낄 수 있소. 그대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닌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