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투쟁 [Overlook]
“자세히 좀 이야기해 줄 수 있겠어?”
시국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우산 아카시아 나무는 눈이 없음에도 인지할 수 있었다.
- 꽤나 당황하면서도 흥분하고 있는 걸 보니 뭔갈 아는 모양인가 보오?
“눈에 보이나?”
- 그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호르몬의 변화가 느껴질 뿐이오.
“그래…… 호르몬…… 아무튼 자세히 좀 이야기해 줄 수 있겠어?”
- 안 될 건 없겠지요. 어차피 그 친구가 자연으로 돌아간 지도 15년이나 지났으니까.
시국은 아예 나무가 만든 그늘 아래에 앉아 나무를 바라보았다.
- 그 친구의 이름은 명섭이었소. 성은 목씨였지.
목씨 성을 가진 명섭이란 이름의 네크로맨서.
그는 엄밀히 말하자면 네크로맨서가 아니었다.
- 드루이드에 가까운 존재였지. 네크로맨서라기에는 자연과의 소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원활했으니 말이오.
“그럼 뭐야? 너도 그 목씨 네크로맨서가 소환한 건가?”
- 정확히 말하면 난 소환물이 아니오. 단지 그 친구가 나로 하여금 인간과 소통할 수 있게 해줬을 뿐이지.
“흠…….”
나무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 그 친구는 이 세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소. 그랬기에 끊임없이 탈출을 꿈꾸었지. 입버릇처럼 이 지옥 같은 세상 빨리 탈출해야 한다며 매일같이 우거지상을 쓰곤 했지요.
목명섭은 옛날처럼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고, 법과 규범 속에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살길 원했다.
물론 그는 자신이 이 몰락한 세계를 그렇게 바꾸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능력 밖의 일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평행우주에 대해 떠올렸소. 그때부터 그는 남아 있는 문명의 흔적들을 찾아 평행우주에 관한 공부를 했지요. 하지만 문명이 몰락하고, 책이 땔감과 차이가 없어진 시대에 그런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자료는 한정돼 있었소.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소.
목명섭은 장장 10년에 걸쳐 인천과 광명, 수원, 서울 일대의 폐 도서관을 뒤져가며 평행우주와 관련된 책자나 논문을 찾아냈다.
데이터베이스화되지 않은, 순수하게 종이에 인쇄된 출판물 중 그나마 멀쩡한 것들이 몇 있었다.
그것을 기반으로 목명섭은 평행우주로 이어지는 관문에 관한 독자적인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처음에는 아무것도 되는 게 없었소. 그 친구 말마따나 ‘맨땅에 헤딩’ 수준이었지요. 하지만 그 친구에게는 남는 게 시간과 마력이었소.
친구인 우산 아카시아 나무가 향기로 끌어들인 벌레와 그 벌레를 따라 온 새를 잡아 생식하며 목명섭은 장장 20년 동안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그는 아주 잠깐이나마 세계와 세계 사이의 벽을 허물고 평행우주로 가는 관문을 열 수 있었소.
비록 5초도 채 안 되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목명섭은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자동차와 멀쩡한 빌딩, 바쁘게 움직이며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인지하는 문명인들의 모습을.
- 그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평행우주로 가기 위한 에너지 수집에 열을 올렸소. 그 과정에서 사람의 얼굴을 한 몬스터도 희생됐지요.
엄청난 마력,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엄청난 마력의 잠재력을 품은 맨페이스드 몬스터를 이용해 에너지를 모은 목명섭은 곧 평행우주로 가는 문을 열기 위한 대대적인 실험에 착수했다.
- 하지만 그가 하려던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소. 능히 이 행성 전체를 파괴하고도 남을 에너지였지요.
그러나 그가 모은 에너지의 양은 워낙에 거대한 것이었다.
- 아주 잠깐, 그는 그 에너지를 이용해 관문을 다시 열 수 있었소.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 친구의 마력이 에너지의 흐름에 휩쓸리며 뒤엉키고 말았소.
마력이 꼬인 상태에서, 에너지는 그의 통제를 벗어났다.
에너지는 순식간에 평행우주로 가는 관문으로 빨려 들어갔고, 곧 세계와 세계의 벽에 흡수돼 사라졌다.
- 그 친구는 그대로 피를 토하며 죽었소. 그리고 죽어 가면서 내게 이야기했소이다. 이런 식의 탈출은 곤란하다고 말이오.
그렇게 목명섭은 15년 전 목숨을 잃었고,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넌 15년 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 그것이 나무의 숙명 아니겠소?
“그건 그렇지…… 흐음…….”
- 평행우주로의 이동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오?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시국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 이젠 어디로 가려 하오?
“글세 말이야. 어디로 가야 할까?”
- 그대가 살던 세계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소?
순간 시국은 우산 아카시아 나무를 빤히 바라봤다.
- 그대가 내 몸을 만졌을 때, 일시적으로나마 난 그대의 기억 중 일부를 볼 수 있었소.
“……세상이 이 지경이라서 다행인 줄 알았으면 좋겠어.”
- 그것까지 예상했으니 하는 말 아니겠소? 만약 세상이 원래 그대가 살던 곳처럼 멀쩡했다면 난 이미 죽었겠지.
그러면서 나무는 마치 웃기라도 하듯 가지를 흔들어댔다.
“근데 말이야. 네가 내 기억을 읽었다면 알겠지만 내가 살던 세계로 돌아가는 게 불가능하단 것 정도는 알지 않나?”
- 모든 기억을 읽은 건 아니었소.
“편리한 변명이군.”
- 나무는 변명을 하지 않소.
“그래, 그래. 그렇다고 치지.”
시국은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까마귀는 가만히 자기 털을 부리로 고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흙먼지가 휘날렸다.
서울이 몰락한 도시의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사라진 세상의 느낌이었다.
“뭐, 일단 여기저기 돌아다녀 봐야지. 그렇게 하다 보면 너처럼 실마리를 주는 존재를 만날 수도 있고. 뭐, 추천할 만한 곳이라도 있어?”
- 강화도로 한 번 가보시는 게 어떻겠소?
“강화도?”
- 명섭, 그 친구가 말하기를 그곳에는 그래도 좀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고 있다고 했소. 물론 이 이야기도 20년 전에 들은 거라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고 확신할 순 없지만 말이오.
“강화도라…….”
시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좋은 정보 잘 받아가지.”
시국은 가볍게 나무를 툭툭 친 후 까마귀 등에 올라탔다.
까악-!
까마귀가 한 차례 짧게 울음소리를 낸 후 하늘로 날아올랐다.
우산 아카시아 나무는 불어오는 바람에 가지가 흔들리게 내버려 둔 채 조용히 그를 보내주었다.
* * *
“그가 또 이동한다.”
“어디로 가나?”
“바다 쪽으로 간다.”
“바다를 건너갈 것 같나?”
“모르겠다.”
“가서 확인해 보고 바다를 건너가면 복귀하고, 그게 아니라면 기다려 봐라.”
“알겠다.”
* * *
2033년 8월 12일 금요일 22시 31분.
광화문 초인협회 빌딩 협회장실.
여정연과 박성준이 마주 보고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지나치게 노출이 된 거예요.”
박성준의 말에 여정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큰소리를 치긴 했는데 솔직히 걱정스럽기는 하죠. 진짜로 제가 그 두 사람 척추 접을 게 아닌 이상 어쨌건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절 배제하려 들 테니까요. 거기다 저한테 감시를 붙여 뒀다는 건 언제든지 빌런을 고용해 암살할 수도 있단 이야기인데……. 일반인이라면 모를까 같은 초인을 상대로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자신의 긴장감을 숨기지 못하는 박성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여정연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 부회장님이 사전에 충분히 그런 쪽으론 다 대비를 해 두셨으니까요.”
여정연의 말에 박성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
여정연이 한층 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내뱉었다.
“사무장님은 그냥 늘 그렇듯 꾸준히 그 자리만 지켜주세요. 그리고 만약에라도 이사회가 열리려 하면 주주권을 행사하신다는 통보만 하시고요.”
현재로선 박성준이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인 여정연이 확정적으로 이야기함에 따라 박성준은 그저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마스터께서 어설픈 사람을 여자친구로 만드셨을 리가 없어.’
박성준은 그나마 마음이 놓임을 느끼며 가만히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여정연은 생각에 잠겼다.
‘한명호와 강봉길은 정확한 전후 관계에 대해선 알지 못해. 단지 몇 가지 상황을 보며 감으로 무언가가 있다는 걸 파악했을 뿐이야.’
그녀는 가만히 찻잔을 들었다. 그것을 입으로 가져가 향을 맡긴 했지만, 마시진 않았다.
‘남한석이 이동석 의장과 공개적으로 적대 관계를 선언하는 바람에 운신의 폭이 엄청 좁아졌어. 하지만 우리 쪽도 마냥 운신의 폭이 넓은 건 아니야.’
여정연이 차를 가볍게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시국 씨의 정치자금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시국 씨 본인뿐이야. 저쪽이 취약한 기반을 가진 주제에 저항하다가는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면, 우리는 시국 씨의 정치자금을 통제할 수가 없어서 운신의 폭이 좁아졌어.’
그녀는 입안에 머금고 있던 차를 꿀꺽 삼켰다.
‘한명호와 강봉길은 그저 그룹 내에서 자기들의 위상이 올라가길 바라고 있을 뿐이야. 두 사람의 욕심의 크기는 딱 거기까지야. 이건 시국 씨도 예전에 몇 번 이야기해 주었던 거고. 문제는 다른 재벌들인데…….’
2029년 혁명 이후 근 3년 간 재벌들은 시국에게 눌려서 겨우 숨만 쉬며 살았다.
그들이 정관계에 뿌리던 정치자금은 모두 묶였고, 그것은 시국의 자금으로 대체됐다.
덕분에 그들은 그간 지출하던 불필요한 지대를 아낄 수 있었고, 그 금액은 고스란히 자산증식 수단으로 이용돼 그들의 유보금 액수를 늘려 주었다.
‘진짜 변수는 그들이야. JH는 어차피 이제 겨우 재벌 대기업의 반열에 들었을 뿐…… 50년 가까이 이 나라에 기반을 다져온 5대 재벌들이 움직이면…….’
여정연이 박성준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일단 사무장님은 연휴나 잘 보내세요. 어차피 강 사장이나 한 사장 두 사람 다 지금으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제한적이니까요.”
박성준은 차를 마저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협회장님도 이왕이면 여유롭게 쉬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저 먼저 가 볼게요.”
“안녕히 가세요.”
박성준이 밖으로 나가자 여정연은 곧장 비서를 불렀다.
“찾으셨습니까?”
“내일 오전 중으로 정보팀 국내 담당 분과 관리자들 다 여기로 오라고 전해. 지금 당장.”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저녁이나 모레 점심 혹은 저녁 해서 이동석 의장과 식사 약속도 좀 잡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가 봐.”
비서가 나간 후, 여정연은 찻잔을 들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든 버텨야 해. 시국 씨는 절대 죽지 않았어. 죽었을 리가 없어. 러시아에서도 살아온 사람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 * *
베이징.
중난하이와 자금성이 보이는 저우페이링의 집.
“후우…….”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그녀는 잠시 눈을 붙였다.
아프리카 원정에서 초인협회 주석 류야오방 이하 주요 헌터들, 특히 용봉회 소속 초인들 모두가 사망하면서 중국 내에서의 카르텔 영역 확장에 가속도가 붙었다.
그 바람에 시국에 의해 중국 지부 전체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게 된 저우페이링은 사실상 본업인 국가안전부 제0국 요원으로서의 일보다도 카르텔 중국 지부 사장으로서의 일에 더 치이는 실정이 됐다.
물론 그녀는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시국에 의해 심어진, 시국에 관한 종교적 수준에 가까운 신앙은 그녀에게 가해지는 과로와 누적된 피로조차도 거룩한 것으로 만들었으니까.
“후우…….”
그녀는 다시 눈을 떠 서류를 바라보았다.
쾅-!
그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축이 울렸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쾅-! 쾅-! 쾅-!
연달아 세 차례, 굉음이 울려 퍼지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뭔가 사달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곧장 서류를 챙겨 가방에 집어넣었다.
쾅-! 쾅-! 쾅-!
지이이이잉-!
투타타타타타-!
굉음과 총성 사이를 뚫고 진동 소리가 그녀의 귀를 때렸다.
그녀는 곧장 폰을 집어 들었다.
‘국장?’
제0국 국장의 전화였다.
그녀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 저우! 당장 안가로 와! 비상사태다!
“무슨 일입니까, 국장님?”
- 쿠데타야!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그녀는 곧장 창가로 갔다.
쾅-! 쾅-! 쾅-!
굉음의 정체는 중국 인민해방군 최신예 전차의 주포 사격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