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투쟁 [Pros and Cons]
한동안 룸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내렸다.
침묵 속에서 박성준은 가만히 한명호와 강봉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미약하게나마 마력 파장이 뿜어졌다.
시국의 것과 비교했을 땐, 마치 태양과 촛불 수준의 차이이긴 했지만 일반인인 한명호와 강봉길에게는 충분히 살이 떨릴 수준은 됐다.
“하하하…… 아따 박 사무장 취해부럿구마이.”
한명호의 말에 박성준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소문에 듣기론 한 사장님은 당황하시면 고향 사투리를 내뱉는다고 하던데…… 사실이었네요?”
“…….”
한명호가 강봉길에게 눈짓했다.
강봉길이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마, 분위기 이거 우얄끼요, 한 사장?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씨부리가꼬. 고마 다들 한 잔 하이소.”
그러자 박성준은 강봉길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저한테 이사 직함 달아 주실 수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저한테 무슨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
“저는 이사고 나발이고 그런 건 관심 없어요. 그저 늘 그렇듯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싶을 뿐이에요.”
박성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비록 E급이지만 두 분 척추 접을 정도의 힘은 있어요. 명심하세요.”
그가 테이블을 밟고 룸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손잡이를 잡은 채 한명호와 강봉길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저 더 이상 애 아니에요. 무시하지 마세요.”
쾅-!
박성준이 소리 나게 문을 닫고 나가고 나서 한동안 한명호와 강봉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한명호가 술잔을 비웠다. 강봉길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고, 한명호가 술병을 건네받아 강봉길의 잔을 채워주었다.
“……마이 컸네. 박 사무장.”
강봉길의 말에 한명호는 굳은 표정으로 술잔만 기울일 뿐이었다.
“후우…….”
박성준은 룸살롱 밖으로 나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본 후 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아, 네. 접니다. 성준이. 네, 급히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네. 네. 알겠습니다. 거기로 찾아갈게요.”
전화를 끊고, 박성준은 택시를 잡았다.
“광화문 초인협회로요.”
달리는 택시 안에서 박성준은 유독 덥다는 느낌을 받으며 기사에게 에어컨 온도를 더 낮추고 바람 세기를 키우라 주문했다.
‘조용히 마흔 살까지만 하고 싶었는데…….’
한명호와 강봉길 앞에서 큰소리쳤던 것과는 달리, 박성준은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히며 눈을 감았다.
* * *
“끄으으으으……”
여왕개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자신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시국과 총을 겨누고 있는 이준구 그리고 이준구와 시국 사이에서 신기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별이가 들어왔다.
키에에에에에엑-!
여왕개미가 괴성을 내질렀다.
그녀는 곧장 앞다리를 뻗어 자신을 감히 내려다보는 인간들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그때서야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키에에에에엑-!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앞다리 포함 도합 6개의 다리가 날개와 함께 모두 뜯겨나가 있음을.
“신기하네.”
그런 여왕개미를 바라보며 시국이 중얼거렸다.
“분명 몬스터인데 말이야. 사람의 얼굴을 가지고 사람의 말, 그것도 한국어를 사용하다니……. 그렇다고 막 등급이 높은 것도 아닌데 말이야.”
시국이 이준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지?”
그 물음에 이준구는 여왕개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등급이고 뭐고 난 모르겠소. 단지 우리 역의 이웃들을, 약해빠진 자들을…… 별이 애미를 잡아간 원수를 죽이고 싶을 뿐이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기세의 이준구를 진정시키며 시국은 다시 여왕개미를 바라봤다.
키에에에에엑-!
여왕개미는 애타게 포효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부르듯이.
“누굴 부르는 거지? 네 부하들?”
여왕개미가 시국을 바라보았다.
“네놈의 팔다리를 모조리 산 채로 뜯어 먹어 버릴 거야!”
시국이 피식 웃었다.
“누가?”
“내 아이들이!”
키에에에에엑-!
시국은 어깨를 들썩이며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저것들 말이야?”
시국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여왕개미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키에에에엑-!
그리고 그녀는 볼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강변에 쌓이다 못해 강물에까지 둥둥 떠서 어딘가로 떠내려가는, 목과 몸통이 분리된 거대 개미들의 사체가.
“이럴 수 없어!”
여왕개미의 눈에서 녹색 눈물이 흘렀다.
“확실히 사람과는 거리가 멀긴 머네.”
그것을 보며 시국은 아무렇지도 않게 감상평을 내놓았다.
“그래서, 언제 죽일 겁니까?”
이준구가 시국을 재촉했다.
“어차피 알아서 죽게 돼 있어. 당신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이.”
“충분히 내 손을 더럽힐 가치는 있소.”
“없어. 그러니까 그 총 내려놔.”
이준구는 시국을 바라봤다.
시국의 굳은 표정과 잠잠한 눈빛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시국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시선을 여왕개미에게로 돌렸다.
“몇 가지 물어보지.”
키에에에엑-!
여왕개미는 절규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내 질문에 네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너의 최후가 달라질 것이다.”
“언젠간 복수할 테다!”
키에에에엑-!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에 시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쯤 스킬 없이도 순순히 자백하는 것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렇게 이야기하며 시국은 드래곤 피어 스킬을 사용했다.
“내 질문에 대답해라.”
강대한 마력을 담은 용의 음성이 여왕개미의 귀를 타고 들어가 뇌를 뒤흔들었다.
절규하던 여왕개미의 발작이 차츰 잦아들었다.
흐리멍덩해진 여왕개미의 눈을 바라보며 시국은 물었다.
“넌 뭐지?”
“난…… 저들의 어미다.”
“말고, 네 진짜 정체.”
“난…… 개미다.”
“알고 있으니까. 그거 말고 너의 진짜 정체를 이야기하라고. 사람 얼굴을 한 개미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나는…… 개미다.”
시국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국은 질문을 바꿔보기로 했다.
“네 배후에 누가 있지?”
순간 여왕개미가 입을 다물었다.
비로소 시국은 자신이 제대로 된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말해! 네 배후에 누가 있지!”
여왕개미의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목소리는 흘러나오지 않았다.
‘배후에 뭔가 있어. 그것도 엄청난 통제력을 발휘하는 누군가가.’
시국은 질문을 다시 바꿔 보기로 했다.
“넌 소환된 존재인가?”
여왕개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뭐지? 자연적인 존재인데 누군가에게 포획돼 통제당한 거야?”
여전히 여왕개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순간 시국은 그것이 여왕개미가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자폭?’
전시안을 통해 여왕개미의 마력 파장이 비정상적인 패턴을 보임을 시국은 발견했다.
뻥-!
시국은 그대로 여왕개미를 발로 찼다.
여왕개미는 그대로 허공에 쭉 떠올랐다.
펑-!
대략 허공에 50미터가량 떠올랐을 때, 여왕개미는 굉음과 함께 온몸이 폭발했다.
그 체액이 뻗어 나간 범위만 해도 100미터가 넘었다.
‘저 정도 되는 몬스터를 통제한다라…….’
여왕개미는, 다른 개미들과는 달리 그래도 C급 정도는 됐다.
그리고 C급 정도 되는 몬스터를, 그것도 자의식을 가진 존재를 통제하려면,
‘B급이 여럿이거나 아니면…… A급이거나.’
시국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어차피 어둠이 부르기 전까지 여기에 있어야 한다면…… 무미건조한 삶보단 이게 더 재미있겠지.’
어딘지 모르게 섬뜩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시국을 바라보며 이준구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남자…… 도대체 정체가 뭐지?’
이준구는 자기도 모르게 별이를 끌어안았다.
까아악-!
허공을 빙글빙글 돌던 까마귀가 땅으로 내려왔다.
시국은 그대로 까마귀의 등에 올라탔다. 그리곤 자신을 경계하는 이준구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올라 타. 집까지 바래다 주지.”
이준구가 머뭇거리는 사이 별이가 그대로 까마귀의 등에 올라타 시국의 허리를 꽉 잡았다.
이준구도 하는 수 없이 까마귀 등에 올라탔다.
까악-!
까마귀가 한 차례 짧은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강변에 가득 쌓인, 서로가 서로를 죽인 개미들의 사체를 바라보며 이준구가 시국에게 물었다.
“저것들은 누가 처리하오?”
“누군가가 처리하겠지. 정 안 되면 시간이 알아서 썩게 만들 거고.”
“저것들은 죽은 것들이니 그렇다 쳐도 땅굴 안에 애벌레나 알이 있을 텐데 말이오.”
시국이 고개를 뒤로 돌려 이준구를 바라봤다.
“아까 못 봤어?”
“뭘 말이오?”
“개미들끼리 싸우고 있을 때. 강 건너편 콘크리트 더미 사이에 숨어 그걸 지켜보던 호랑이들.”
“호랑이?”
“뭐, 사자들도 몇 마리 끼어 있드만.”
이준구가 시선을 강 건너편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슬금슬금 강변으로 다가가는 호랑이와 사자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것들이 어떻게 저기 있을 수 있소?”
“낸들 아나? 인류 문명이 망하고 동물원에서 탈출한 놈들이 번식을 해서 야생으로 돌아갔든가 했겠지.”
시국의 말에 이준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분간 이 근처엔 천적이 없을 테니까, 여기가 저놈들의 터전이 되겠네.”
그렇게 시국과 별이, 이준구를 실은 까마귀는 허공을 가르며 강남역으로 향했다.
얼마 후, 까마귀는 강남역 출입구 쪽에 착륙했다.
“저 원시인들 잘 지키고 있어라고.”
이준구와 별이를 내려주고 시국은 다시 까마귀에게 날아오를 것을 명령했다.
까악-!
까마귀가 짧게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잠시만! 난 아직 그대의 이름을 듣지 못했소!”
까마귀가 상공 10미터 지점에 떠올랐을 무렵, 이준구가 시국을 향해 물었다.
“별이한테 물어봐! 걔가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시국은 까마귀와 함께 지상에서 멀어졌다.
순식간에 까만 점 수준으로 작아진 까마귀를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던 이준구.
곧 그는 시선을 자기 옆에 있는 별이에게로 돌렸다.
별이는 못내 아쉬운 듯 까마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저분 이름이 뭔지 아니?”
이준구의 물음에 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시국이래.”
순간 이준구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시국?”
“응.”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은데…….”
“그렇지? 나도 분명 어디서 들어 본 이름 같았어.”
“이시국…… 이시국…….”
이준구는 100년 중 기억이라 할 만한 95년을 떠올려 보았다.
아주 오래전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 박혔던 기억들까지도 하나씩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시국’이란 단어를 오늘 이전에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들었는가를 기억해 냈다.
이준구가 눈을 부릅뜨며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그의 뇌리로 오래전, 그가 지금 별이만 한 나이였을 때, 그의 할머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네 할아버지는 참 바람과도 같은 분이셨단다. 가끔 날 찾아오기도 했지만, 보통은 항상 뉴스에서나 볼 수 있었지.』
『사람들은 네 할아버지를 빌런이라 부르며 두려워하기도 했고, 비난하기도 했고, 조롱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그분은 늘 외로운 사람이었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빌런이 아니었단다.』
『이시국. 이분이 네 할아버지란다.』
이준구의 뇌리로 할머니의 이야기와 함께 그녀가 보여 주었던, 기사 스크랩 사진이 떠올랐다.
그녀의 이야기와는 달리 사진에 관한 기억은 뚜렷하지 않았다.
이준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머니는 말씀하셨어. 할아버지는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내가 나중에 찾아봤을 때도 분명 할아버지는 2042년에 돌아가셨어.’
이준구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동명이인이겠지. 2042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야. 설령 무슨 착오가 있어서 사형당한 게 아니라 해도 지금까지 살아 계실 수가 없어. 아니…… 설령 살아 계신다 하더라도 저렇게 젊은 얼굴일 리가 없어.‘
이준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동명이인이야. 특이한 이름이지만 아예 없는 이름은 아니니까. 그래…… 그럴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이준구는 별이와 손을 잡고 지하철역 대합실로 내려갔다.
’그래…… 동명이인이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동명이인이야.‘
그는 스스로가 내린 합리적 결론에 결국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선 비합리적인 현실에 관한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