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가공 [Grotesque]
“수고했다.”
늑대의 칭찬에 총회장 비서의 몸이 또 한 차례 파르르 떨렸다.
“수고한 자에게 은총을 내리는 것이 정의지.”
그 순간, 늑대의 몸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곧 늑대가 엎드려 있던 자리에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은빛 장발로 온몸을 가린 여인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거라, 아이야.”
그녀의 말에 총회장 비서가 바들바들 떨며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기어코 총회장 비서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에게 은발의 여인이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다가갔다.
그녀는 총회장 비서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아아…… 주인님…….”
황홀경에 빠져 입을 벌린 채 눈물을 흘리는 총회장 비서.
그녀의 얼굴을 은발 여인이 양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총회장 비서에게 입김을 불어 넣었다.
그녀의 입김은 은빛 찬란한 빛줄기와 함께 그녀의 입에서 나와 총회장 비서의 입으로 들어갔다.
곧 총회장 비서의 온몸이 찬란한 은빛 발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더 강해지거라. 더 강해져서 찬란한 최후를 위해 힘써 일하거라, 내 아이야.”
찬란한 은빛 발광 속에서 황홀경에 빠진 채 강화되는 총회장 비서를 바라보며 은발 여인, NAC 총회장은 가만히 혓바닥으로 자기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 * *
별이를 고려해서, 그리고 딱히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시국은 까마귀에게 천천히 가게 했다.
하루 비행했다고 적응이라도 했는지 별이는 곁눈질로나마 하늘 아래 폐허가 된 서울의 풍경을 눈에 담았지만, 여전히 온몸을 시국의 등에 밀착시킨 채 양팔로 그의 허리를 꽉 잡고 놓지 않으려 했다.
시국은 팔짱을 낀 채 지루할 정도로 같은 풍경의 폐허가 된 서울을 바라보며 냉소를 머금었다.
‘망하기 전이나 후나 획일적인 건 뭐 다르지가 않네.’
그렇게 두 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거대 까마귀는 삼성동이었던 곳에서 출발해 마침내 구로구 가리봉동이었던 곳으로 도착했다.
“내려.”
시국의 말에 별이는 어제보단 확실히 나은 폼으로 까마귀의 등에서 내렸다.
시국은 까마귀에게 비행하며 주위에서 무언가 특이사항이 없는지를 확인하라 명령한 후 별이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딱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목적지가 있을 수가 없었다.
이곳은 시국이 한창 B급 빌런으로 활동하던 시기보다 100년도 더 지난, 인류 문명 자체가 붕괴한 세계다.
당연히 그가 빌런으로서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모스크바 던전 레이드 때나 아프리카 해방 전쟁 결의 당시처럼 알려지지 않은 어둠이 초월적인 권능으로 그에게 무언가 의뢰를 준 것도 없었다.
완벽하게 목표가 없는 삶.
문득, 정말 아주 문득, 그 어떠한 논리적 연계도 없이 시국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진짜 오랜만에 휴가네.’
시국은 피식 웃었다.
빌런으로서 37년, 회귀자로서 15년, 도합 52년이란 시간을 정말 바쁘게 살았다.
빌런으로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던 시절에도 시국은 늘 무언가를 했다.
어릴 때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매일같이 싸웠고, 적당히 나이가 든 시점에는 나연이를 괴롭히는 것들을 두들겨 패고 그 패거리에 대적해 싸웠다.
각성한 이후에는 생존을 위해 타인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혀가며 바쁘게 살았고, 회귀한 이후에는 전생의 실패를 다시는 겪지 않고자 미친 듯이 앞만 보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 시국은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세계에서,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소녀와 함께 옛 모습을 전혀 간직하지 못하고 있는 폐허가 된 구로구 가리봉동을 걷고 있다.
‘여유롭네. 어울리지 않게.’
세상은 멸망했다.
자전축 이동과 던전 브레이크 그리고 울룰루 툼베베와 펜리르라는, NAC 총회장으로 의심되는 자의 전쟁으로.
여유는 없다.
인간은 원시인이 됐고, 몇몇 초인들을 중심으로 안전지대가 형성돼 있긴 하지만 완벽하진 않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시국은 소녀와 함께 여유롭게 걷고 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정처 없이.
“네 부모님은 뭐 하는 사람이었지?”
시국이 별이에게 물었다.
별이는 흠칫 떨더니 이내 떠듬떠듬 대답했다.
“아빠는 사냥꾼이셨어요.”
“사냥꾼?”
“밖에 나가서 먹을 걸 잡아 오는…….”
“아, 그 원시인들?”
“그 사람들하곤 달라요.”
“어떻게?”
“총을 쓰셨거든요.”
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는?”
“엄마는 몰라요. 저를 낳고 얼마 뒤에 개미들한테 잡혀갔다고만 알고 있어요.”
담담하게 모친이 출생 직후 몬스터의 밥으로 잡혀간 이야기를 내뱉는 별이의 모습.
거기서 시국은 알 수 없는 그로테스크함을 느꼈다.
“아빠는 지금도 계시니?”
물론 시국은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을 거라 예상했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되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모르겠다니?”
“아저씨가 오기 일주일 전에 사냥을 나가셨다가 안 돌아오셨어요.”
“으음…….”
“어쩌면 돌아가셨을 수도 있어요. 아니면 어딘가에서 괴물들을 피해 숨어 계시거나요.”
시국은 자신이 느끼는 그로테스크함의 근원을 알 수 있었다.
별이에게선 대략 13세에서 14세 정도로 추정되는 그 나이대의 여자아이가 보여 줘야 할 모습이 전혀 없었다.
겁이 다소 많기는 했지만, 무서울 정도로 그녀는 냉정했다.
‘아마 이정훈이 날 보는 느낌이 이랬겠지.’
문득 이정훈을 떠올리자 시국은 가슴 한 켠이 시림을 느꼈다.
그가 지닌 이정훈에 대한 감정이 아닌, 부모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빠까지 잃은 나연이가 느낄 고통과 슬픔에 대한 감정적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별이가 이번엔 역으로 시국에게 물었다.
“근데 아저씨는…… 이름이 뭐예요?”
“나? 시국. 이시국.”
“이시국?”
“왜, 이상해?”
“이시국…….”
별이는 별다른 대답 없이 시국의 이름은 몇 차례 중얼거리며 되뇌었다.
그 모습을 보며 시국은 입을 다문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때 구로구에 사는 한국인들과 중국인들로 북적였을 가리봉동은 오간 데 없이 무너진 건물 잔해와 여기저기 파인 채 잡초가 무성히 자란 아스팔트 도로만이 시국의 눈에 들어왔다.
전시안 스킬을 사용해 주위를 둘러봤지만, 몬스터는커녕 사람, 심지어 지나가는 쥐 한 마리 잡히지 않았다.
물론 잔해더미 깊숙한 곳에 무언가 조그만 벌레 같은 것들이 있을 순 있었지만, 전시안은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살아 있는 것들의 정보를 알려주는 스킬일 뿐, 벽 너머를 투시하거나 하는 효능은 없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에요.”
때맞춰, 별이가 혼자만의 중얼거림을 끝내고 시국에게 말을 걸었다.
“이시국.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기억이 나요.”
“들어봤다고? 내 이름을?”
“네.”
“어디서?”
“모르겠어요. 그냥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기억만 나요.”
132년 묵은 드루이드 노파의 말에 따르면 지금 시국이 별이와 함께 서 있는 시공간은 서기 2174년 10월 어느 날의 대한민국이다.
시국이 사형당한 해는 2042년이고, 울룰루 툼베베 정도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등급의 빌런이었던 탓에 시국이 사형당한 후 1년 정도는 이야기될 수 있었겠지만 22세기 중후반까지 전해지진 않았을 터였다.
“혹시 이 시국에 그런 짓을 하냐? 뭐 이런 말을 들었던 거 아니야?”
시국의 물음에 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모르겠어요.”
옷도 제대로 못 입을 만큼 기초적인 문명의 지식이 없어 멍청해 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괴해 보이는,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그로테스크한 귀여움이 느껴지는 별이의 모습에 시국은 한 차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그녀는 별다른 짜증을 내지 않고 그저 머리를 몇 차례 만진 후 자기 할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빠가 저한테 자주 이야기했었어요. 저 같은 사람이 제일 위험하다고.”
“위험?”
“네. 강하지도 않으면서 애매하게 이상한 능력을 부릴 줄 알면 되레 쉽게 사냥당한다고요.”
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문명의 종말이 현실이 된 이 시대뿐 아니라 당장 인류 문명이 격변의 시대에 적응했던, 헌터의 시대에도 E급들은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맨주먹 다툼에선 초인인 만큼 일반인이 어찌할 수 없었지만, 총알 한 방에 생명력이 바닥이 나며 죽어 버리기도 하는 그런 존재였다.
‘아무리 그놈들이 원시인 수준이라 해도 수십 명이서 한꺼번에 짱돌이며 몽둥이며 들고 덤비면…… 뭐 E급은 그냥 죽었다 봐야지.’
그가 E급 초인의 약함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별이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내뱉었다.
“거기 아이들하고 같이 있던 할머니도 저 같은 사람이죠? 낙원 사람. 뭐, 지금 낙원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긴 했지만…….”
시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었다.
“그래. 너 같은 사람이야.”
“그리고 아저씨 같은 사람이고요.”
“그렇지.”
“근데 제일 센 건 아저씨죠?”
“잘 아네.”
시국이 다시 한 번 더 그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 주었다.
타앙-!
그 순간, 고막을 찢을 듯한 총성이 전방에서 들려왔다.
시국과 별이 모두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타앙-! 타앙-! 타앙-!
연달아 세 발의 총성이 더 울리자, 시국은 곧장 앞으로 달렸다.
별이도 당황하지 않고 시국의 뒤를 바짝 쫓으며 달렸다.
타타타타타타-!
달려가는 사이에도 총성은 끊임없이 들렸다.
키에에에에에엑-!
그리고 점차 총소리의 진원지에 가까워짐에 따라 총성에 묻혀 있던, 몬스터 혹은 짐승의 것으로 보이는 괴성도 들려왔다.
‘여유로울 리가 없지.’
조금 전까지의 여유가 당연하지 않았던 것임을 상기하며 시국은 속력을 높였다.
곧 그는 상당히 넓은 공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쩌면 한때 시민들을 위한 광장이었을지도 모를, 아니면 노점상으로 가득했을지도 모를 그곳에서 시국은 볼 수 있었다.
키에에에에에에엑-!
멧돼지만 한 크기의 개미 세 마리와,
타앙-!
놈들의 외골격 연결 부위에다 정확하게 탄환을 맞추는 백발의 노인 사수를.
“어?!”
그리고 뒤늦게 도착한 별이는 거대 개미가 아닌 백발의 노인을 보며 화들짝 놀랐다.
시국은 분명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떨리는 눈을.
“아빠!”
그리고 그녀의 부름에 개미에게 집중하던 노인이 시선을 그녀와 자신에게로 돌린 것을.
그 노인의 얼굴에 반가움과 놀라움이 동시에 떠오른 것을.
* * *
박성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없이 커피를 마시기만 했다.
여정연은 눈앞의 위임장들을 가만히 검토하며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 시간은 흘러갔고 마침내 여정연은 위임장 검토를 완료했다.
“완벽해요. 이 정도면 일단 남한석이 한명호와 강봉길을 이용해 JH를 장악하려는 걸 막을 수 있어요.”
여정연이 위임장을 다시 박성준에게 건네주었다.
“그게 원본인가요?”
그녀의 물음에 박성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사본이죠, 당연히.”
“잘했어요. 원본은요?”
“금고에 숨겨 뒀어요.”
“잘했어요. 앞으로 원본은 주총에 대비해 끝까지 잘 숨겨두셔야 해요. 어차피 변호인이 따로 한 통 들고 있어서 분실해도 당장 문제는 없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요.”
“당연히 그래야죠.”
여정연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다행이야. 일단 JH만 남한석으로부터 지켜내면 돼. 남한석이 JH의 자금 흐름과 비자금 규모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당장 놈이 무언가 음모를 꾸미는 건 막을 수 있어.’
그러면서 여정연은 박성준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 과연 시국 씨의 통치 자금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박성준은 시국이 비상시 SG펀드의 주주권을 위임할 정도로 신뢰하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평소에는 그룹 업무로부터 일부러 떼어 놓은 사람이기도 했다.
『아직 애잖아. 나중에 나이 먹으면 알아서 배우게 돼 있어.』
시국이 박성준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여정연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인가 봐요? 저 애가 알아서 배우게 될 타이밍이…….’
시국의 부재를 또 한 번 뼈저리게 느끼며 여정연은 감정을 억누른 채 가만히 차만 들이켰다.
달달한 차향도 오늘따라 씁쓸하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