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마왕 [Kill the Demon King]
가능한 한 최대한 빨리 헌터들은 요새 내부에서 벗어났다.
그러는 사이 요새는 점차 하나의 거대한 형상을 갖추어 나갔다.
“저, 저건…….”
가장 먼저 탈출에 성공한 시국이 변해 가는 요새의 모습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그의 뒤를 이어 탈출한 올랑드 퐁피두와 A급 헌터들 그리고 이반 이바노프와 류야오방, 줄리아 텍슨도 모두 요새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저건…….”
이반 이바노프도 시국과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살려 줘!”
“기동대장님! 도와주십시오!”
그러는 사이, 미처 탈출하지 못한 일부 B급 헌터들이 요새의 변화에 휘말렸다.
그들은 간절하게 올랑드 퐁피두를 불렀지만, 그는 움직일 수 없었다.
텔레포트로 그들을 구해 내기에는 이미 늦었기 때문이었다.
“살려…….”
콰드드득-!
그들의 목소리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변화하는 요새의 잔해에 가로막혔고, 이내 그들은 잔해 더미 속에 파묻혔다.
“도,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지?”
류야오방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기에 대해 그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탈출한 헌터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마침내 거대한 요새는 하나의 완성된 형태를 갖추었다.
기다란 꼬리에, 커다란 동체, 시커멓게 죽은 눈과 호흡을 할 때마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체의 부패한 가스.
“……용?”
시체로 이루어진 거대한 용이 날개를 펼쳤다.
이반 이바노프가 시국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
시국이 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맞습니다. 모스크바에서의 그놈과 비슷합니다.”
시국의 뇌리로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이곳에서 죽은 헌터들이 언데드가 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던전에서 죽은 이들이 어떻게…….’
모스크바 던전에서 죽은 리이신과 아돌프 란델링거.
그들이 언데드가 됐다면, 거기서 죽은 블랙 드래곤도 언데드가 되지 말란 법은 없으리라.
‘젠장…….’
또 한 번, 죽음의 공포가 시국을 휘감았다.
그때, 시체로 된 용으로부터 울룰루 툼베베의 음성이 방출됐다.
“너희들 가운데 이 모습을 본 이도 있으리라.”
그러면서 용은 시국과 이반 이바노프를 한 차례 바라봤다.
“놈이 실패한 것을 나는 이루어 낼 것이니.”
용이 한 발자국 움직였다.
“모두 전투 준비!”
이반 이바노프가 소리 질렀다.
거대한 용의 위엄에 잔뜩 질려 있던 헌터들은 각자의 무기를 꽉 쥐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놈은 보통 몬스터가 아니야. 의지를 가지고, 인간과 거래를 시도할 줄 아는 몬스터야. 그런 놈이 언데드가 될 리가 없어. 저것은…….’
시국이 전시안으로 천천히 헌터들에게 다가오는 용을 탐색했다.
엄청난 마력이 놈에게서 느껴졌다.
하지만 마땅히 생물이라면 지니고 있어야 할 생명력은 보이지 않았다.
‘저곳, 저곳에 울룰루 툼베베가 있다.’
그리고 유독 마력의 농도가 짙은 부위가 시국의 전시안에 포착됐다.
용의 머리, 마땅히 뇌가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는 짙은 농도의 마력 덩어리.
‘저것만 부수면…….’
시국은 마음을 다잡고 칼을 고쳐 쥐었다.
‘어디까지나 저 모습은 흉내내기에 불과하다. 크기에서 오는 위압감과 마력에서 오는 파괴력은 분명 만만한 건 아니지만 모스크바의 용보다는 약해.’
그런 합리적 판단 속에서 시국도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어리석은 이들이여. 그대들이 아무리 반항한들 요새 전체와 하나가 된 날 이길 수 있으리라 보느냐?”
그렇게 이야기하며 용, 아니 울룰루 툼베베는 아가리를 쫙 벌렸다.
순간 거기서 느껴지는 심상찮은 에너지의 흐름에 시국은 바짝 긴장했다.
긴장하기는 이반 이바노프도 마찬가지였다.
“내 주변으로 뭉치시오!”
그의 외침에 헌터들은 일사불란하게 이반 이바노프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모스크바의 용만큼의 산성은 아니겠지만, 요새를 이루는 시체와 거기서 나오는 시독만으로도 대단한 위력을 보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반 이바노프는 마력을 쭉 끌어올렸다.
“어리석은 것.”
울룰루 툼베베의 음성과 동시에, 용의 입에서 시커먼 가스를 동반한 독물이 분사됐다.
“우라!”
동시에 이반 이바노프도 전력을 다해 최강의 실드를 전개했다.
콰콰쾅-!
화산이 폭발하듯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용의 아가리에선 끊임없이 검은 가스와 독물이 뿜어져 나왔고, 이반 이바노프의 실드 또한 끊임없이 마력을 공급받으며 헌터들을 보호했다.
한동안 울룰루 툼베베의 시독 가스와 이반 이바노프의 실드가 힘겨루기를 이어갔다.
잠시 후, 용은 아가리를 다물었고, 시독과 가스는 불어오는 바람 속에 흩어졌다.
그리고,
“쿠헉!”
이반 이바노프가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가 유지하던 실드는 그의 마력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행히 가스와 시독에 노출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실드와 가스의 충돌이 일으킨 충격파 속에서 일부 헌터들이 내상을 입기도 했다.
“젠장!”
올랑드 퐁피두가 욕지기를 내뱉으며 마력 물약을 꺼내 이반 이바노프에게 먹였다.
이반 이바노프는 고맙다며 손을 들어 보였다.
“공격하시오!”
이반 이바노프가 외쳤다.
그와 동시에 미리 마법을 준비해 두었던 류야오방의 공격이 먼저 용을 덮쳤다.
엄청난 눈보라가 일어나며 용의 하반신을 얼려 버렸다.
이어서 올랑드 퐁피두가 일으킨 번개가 용의 머리와 상반신을 사정없이 두들겼다.
번쩍이는 번개와 천지를 진동시키는 천둥 속에서 용의 외부를 구성하던 시체들이 불타거나 떨어져 나갔다.
“흐아아압!”
생존한 A급 헌터 중 근접 딜러 계열 헌터들이 B급 근접 딜러들을 이끌고 돌진했다.
그들이 돌진하는 사이 류야오방은 용의 꼬리마저 얼렸고, 올랑드 퐁피두는 등과 목에 번개로 큰불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하압!”
쿵-!
그리고 마침내 용에게 접근한 근접 딜러들이 자신이 가진 무기와 스킬로 용의 하반신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몸놀림이 빠른 자들은 용의 무릎을 타고 올라가 허리 부근을 두들기기도 했다.
‘뭐야? 싱겁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이반 이바노프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껍데기만 빌려 쓴 건가?’
아돌프 란델링거나 리이신처럼, 실제 망자들의 능력치를 그대로 카피했다면 아마 공격대는 모두 사망했을 터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반 이바노프가 보기에, 지금 그들이 적대하는 용은 모스크바에서 시국이 사냥한 용과 비교했을 때 카피본 조차도 되지 못했다.
‘응?’
그때, 이반 이바노프의 눈에 다른 헌터들과는 달리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국이 들어왔다.
“자네는 왜 그렇게 가만히 보고 있나?”
이반 이바노프의 물음에 시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저 심각한 표정으로 용을 때리는 헌터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봐, 자네…….”
“어서 저들을 불러들이십시오, 니콜라예비치. 어서요!”
시국이 이반 이바노프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외쳤다.
순간 이반 이바노프의 표정이 굳었다.
“헌터들! 모두 후퇴! 본대로 돌아오시오!”
이반 이바노프가 목청껏 소리 높여 외쳤다.
“무슨 소리야?!”
용의 발등을 망치로 내려치던 영국인 A급 헌터가 이해가 안 간단 표정으로 이반 이바노프를 바라본 후 계속해서 용의 발등을 내리쳤다.
“어서! 명령이오!”
이반 이바노프가 재차 명령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순간 용의 입가가 살짝 움직였다.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그리고 그다음, 용의 몸이 해체됐다.
시체 더미로 구성된 몸은 해체되며 순식간에 수백만 개의 조그만 썩은 고깃덩어리가 됐다.
“응?!”
가까이에서 용의 몸을 두들기던 근접 딜러들은 아차 하는 사이에 고깃덩어리에 둘러싸였다.
“헉!”
그리고 거기서 뿜어져 나온 지독한 가스와 독에 그들은 질식해 가며 생명력을 급속히 잃었다.
생명력을 잃고 죽어 버린 헌터들은 순식간에 분해돼 고깃덩어리 중 하나가 됐다.
“젠장! 당장 튀어!”
A급 딜러 중 일부가 빠르게 이반 이바노프와 원거리 딜러들이 있는 본대로 후퇴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상에서 용의 발치를 공격하던 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어?! 어?!”
용의 등판에 올라 대검을 찔러넣고 있던 영국인 A급 헌터 하나는 그대로 독과 가스에 노출이 됐다.
A급답게 제법 오래 버텼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큰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끄아아악!”
A급 헌터의 신체마저 녹이고 썩게 만드는 가스와 독극물에 노출된 채 천천히 생명력을 잃으며, 죽는 그 순간까지 고통에 시달리다 마침내 그는 부패한 시체 덩어리의 일부가 됐다.
“젠장!”
이반 이바노프의 표정이 썩어 갔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살아남은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표정이 썩어버린 건 시국이었다.
- 어리석은 존재여. 네놈이 가진 얄팍한 스킬은 멍청한 티아마트를 상대로나 소용이 있었노라. 헌터의 모든 것을 흡수해 버리기만 하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것이 네놈의 스킬이노라.
명백하게 시국이 가진, 최강의 스킬이라 할 수 있는 암흑군단의 행군을 두고 하는, 울룰루 툼베베의 텔레파시에 시국의 인상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 티아마트의 얼굴을 빌렸음에도 네놈들은 내게 항복하지 않았노라. 나는 티아마트와는 달리 근본은 인간이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네놈들을 내 수하로 삼아 줄 수도 있었노라. 루돌프 크라우프에게 그러했듯, 네놈들에게도 막강한 힘까지 줘 가며 내게 충성할 기회를 줄 수 있었노라.
시국은 주먹을 꽉 쥐었다.
- 허나 네놈들이 그러한 기회를 거부한 만큼, 나는 왕의 권능으로, 네놈들에게 심판을 내리겠노라.
시국은 이를 갈았다.
그러는 사이, 자신의 몸에 붙어 있던 헌터들을 모두 흡수한 울룰루 툼베베의 본체는 다시금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었다.
이번에는 용이 아닌, 한 명의 거인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러는 사이 지칠 대로 지친 A급 근접 딜러들이 본대에 도착해 쓰러지듯 엎어졌다.
순간 그들을 바라보는 시국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사역마.’
시국의 부름에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사역마가 응답했다.
- 네, 주인님.
‘준비해라.’
-무얼 말씀이신지요?
‘흡수할 준비.’
그다음 순간, 시국은 빠르게 바닥에 쓰러진 A급 딜러들에게 접근했다.
“응?! 이, 이봐! 뭐 하는 거야!”
그런 시국을 발견한 올랑드 퐁피두가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시국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시국의 칼이 바닥에 쓰러진 A급 헌터의 목을 찔렀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는 그 일격에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 즉시 검붉은 연기와 함께 나타난 사역마가 그를 흡수했다.
“이, 이시국 헌터…… 다, 당신 설마…….”
올랑드 퐁피두가 시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순간, 시국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푹-!
“억!”
순식간에 올랑드 퐁피두의 배후로 간 시국은 그의 등을 칼로 깊게 찔렀다. 그리곤 순식간에 수십 차례 난도질을 해댔다.
방어력이 처참할 정도로 낮은 마법사답게, 올랑드 퐁피두는 그 일격에 죽어 버렸다. 그리고 그 시체는 그대로 사역마에게 흡수됐다.
“이봐요! 미쳤어요!”
줄리아 텍슨이 시국에게 소리쳤다. 순간 시국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흡칫 놀란 그녀가 총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격발보단 시국의 칼이 더 빨랐다.
푹-!
“허억!”
그녀의 심장에 박힌 시국의 칼.
줄리아 텍슨은 순식간에 생명력이 50%나 빠져나가는 걸 느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뭐 하는 겁니까, 이시국 헌터!”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시국의 갑작스런 팀킬을 바라보던 류야오방이 앞으로 나섰다.
그 순간, 그와 시국 사이에 거대한 불의 장벽이 생겼다.
사역마가 만든 것이었다.
- 주인님의 전략이오. 그대마저도 제물이 되기 싫다면 가만히 있으시오.
자신을 향한 사역마의 텔레파시에 류야오방은 흠칫 몸을 떨었다.
’도, 도대체 저것은…….‘
시국이 직접 죽인 헌터 말고도, 다른 여러모로 지쳐 있는 헌터들을 불태워 죽이거나 하는 사역마를 바라보며 류야오방은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이시국 헌터는…….‘
불길 너머에서, 줄리아 텍슨을 죽이고 다른 사냥감을 찾아 나서는 이시국을 바라보며 류야오방은 공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