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빌런의 인생2회차-161화 (161/200)

161 마왕 [The King’s]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한명호가 물었다.

남한석은 뜻모를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총리님. 지금 실수하는 겁니데이. 어데 함부로 부회장님이 죽니 마니 하는 겁니꺼!”

강봉길이 짐짓 노하기라도 한 듯 남한석에게 소리 질렀다.

역시나 남한석은 뜻모를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말을 꺼낸 이가 계속해서 침묵하자 결국 갑갑한 건 한명호와 강봉길이었다.

상대가 D급 초인임을 아는 이상, 차마 폭력을 행사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마, 못들은 걸로 하고 이만 일어나 보겠심더. 한 사장, 가자!”

강봉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눈짓을 받고 한명호도 일어났다.

그제야 남한석이 입을 열었다.

“강 사장님, 보기보다 쇼맨십이 좋으십니다? 허허허.”

그의 목소리가 강봉길과 한명호의 발걸음을 잡았다.

“일단 앉으시지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진 않았으니까.”

강봉길과 한명호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남한석은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 말을 이었다.

“우리 솔직해집시다.”

남한석이 커피 잔을 내려놓고 강봉길과 한명호를 빤히 쳐다봤다.

“솔직히 두 분,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이렇게 닥치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이시국 부회장 때문 아닙니까?”

두 사람은 부정하지 못했다.

“그럼 간단한 거 아닙니까? 이시국 부회장만 없어지면 우리를 막을 사람은 없는 겁니다. 적어도 정부 내각과 JH그룹에선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JH그룹, 전국헌터총연합회 그리고 내각과 의회까지.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유기체처럼, 정교한 기계처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시국이란 통제자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눈에 보이는 A급 헌터로서의 힘과 보이지 않는 자본금의 힘으로, 전국헌터총연합회라는 대한민국 단일 무력집단 중 최강을 자랑하는 단체를 좌지우지하고 그걸 기반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것.

그것이 시국이 가진 지배력의 원천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지금 만약 시국이 사라진다면 그 모든 지배력의 기반이 사라진다는 뜻이었다.

즉, 시국에게 억눌려 조용히 사는 것들이 들고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말은 쉬운데, 그게 어데 가능한 일입니꺼? 내, 나라가 절단난단 말은 믿어도 솔직한 말로 부회장이 없어지니 뒤지니 하는 이야기는 못 믿겠심더.”

강봉길의 말에 남한석이 씩 미소를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A급 헌터니까요.”

남한석은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사의 존재인 것은 아니지요.”

잠자코 있던 한명호가 입을 열었다.

“따로 무슨 조치라도 해둔 게 있습니까?”

“조치라……. 솔직하게 말하죠. 내가 한 건 없습니다. 사실 내가 할 게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그럼…….”

“미국.”

순간 한명호와 강봉길 모두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비록 출신이 깡패이긴 했지만, 지난 세월 동안 JH그룹에서 물산과 건설을 이끈 덕택에 두 사람은 제법 사회 고위층다운 시각을 얻게 됐다.

“아…… 맞네. 미국이 있었네.”

감탄하는 강봉길과,

“확실히 부회장이 러시아랑 가까워지니 외교 정책도 친러로 기울긴 했지.”

분석하는 한명호,

“왜 내가 이렇게 자신만만한지 이제 알겠습니까?”

그리고 그 둘을 바라보며, 살짝 비웃음을 머금은 남한석.

“지금 이시국 부회장이 있는 곳은 아프리카입니다. 세계 최강의 빌런이자 마왕이라고까지 불리는 네크로맨서가 있는 곳이지요. 그곳이라면 아무리 이시국 부회장이 강하다 하더라도 쉽게 견디긴 힘들 겁니다.”

남한석은 커피를 쭉 들이켰다. 그리곤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그곳에서 미국의 A급 헌터들이 일시에 그를 공격한다면…… 과연 그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씩 웃는 남한석을 바라보며 강봉길과 한명호의 표정도 덩달아 밝아졌다.

* * *

풀썩-!

마지막 데스 나이트가 쓰러졌다.

“후우……!”

시국은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칼과 주먹에 만신창이가 된 데스 나이트는 겉보기엔 완전히 기능을 상실한 듯 보였지만 절단난 손가락 관절이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데스 나이트에게 가해진 데미지를 생각해도 30분 내로 일어설 게 농후했다.

‘…….’

시국의 시선이 다른 헌터들에게로 향했다.

여전히 많은 A급 헌터들이 살아 숨쉬고 있었지만, 상당수의 B급 헌터들은 시체가 돼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시체를 도시가 집어 삼키고 있었다.

“젠장…….”

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B급 헌터들의 시체를 바라보며 이반 이바노프가 이를 갈았다.

그 옆에서 질린다는 표정으로 올랑드 퐁피두가 마력 물약을 마셨다.

류야오방은 지친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스태프에 몸을 기댄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데스 나이트와의 싸움에서 별 도움을 주지 못한 줄리아 텍슨은 말없이 총을 어루만지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전투를 준비해야 합니다.”

시국이 분노한 표정으로 콧김을 내뿜고 있던 이반 이바노프에게 다가가 이야기했다.

이반 이바노프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30분입니다. 길어야 30분 안에 놈들은 다시 깨어날 겁니다.”

“제기랄…….”

이반 이바노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대로 또 싸워 봐야 그나마 남아 있는 B급 헌터들이나 죽겠지. 제기랄…….’

아무리 생각해도 의미 없는 소모전에 불과했다.

언데드 군단은 소환자를 죽이지 않는 이상 계속해서 부활하는 만큼, 헌터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환경이었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점차 표정에 우울함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이반 이바노프에게 시국은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번 한 번만 버텨 주십시오. 소환자의 위치가 거의 파악이 다 됐습니다.”

이반 이바노프의 시선이 시국에게로 획 돌아갔다.

“그게 무슨 말인가?”

“설명하긴 힘듭니다. 다만 이번 한 번만 버텨주신다면 그다음엔 제가 소환자를 제거하겠습니다, 니콜라예비치.”

시국의 표정에는 그 어디에도 농담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이반 이바노프는 잠시 잠자코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생존자 전원! 전투 준비!”

드래곤 로어 스킬로 살아남은 헌터들에게 버프를 걸어주며 이반 이바노프는 이어질 데스 나이트와의 2차전을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 시국은 슬그머니 모습을 감추었다.

쿵! 쿵! 쿵!

30분 후, 다시 짧은 지진파가 땅을 뒤흔들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다시 일어난 데스 나이트들과 땅속에서 새로이 솟아난 데스 나이트들이 헌터들을 향해 공격해 들어왔다.

“우라!”

이반 이바노프가 함성을 내지르며 헌터 전원에게 버프를 걸어 주었다. 그리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데스 나이트의 머리통을 주먹으로 날려버렸다.

올랑드 퐁피두는 허공으로 떠올라 마법을 난사했고, 류야오방은 데스 나이트들을 냉기 마법으로 얼려 버린 후 근접 딜러들이 깨부수게 해 주었다.

살아남은 다른 A급 헌터들과 B급 헌터들은 최대한 서로에게 의지한 채 데스 나이트와의 2차전을 치렀다.

퍽-!

원자화 스킬로 모습을 감춘 시국도 눈에 띄는 데스 나이트 몇 놈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다.

- 주인님. 찾았습니다.

그러는 사이, 시국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소식이 사역마를 통해 전달됐다.

‘좋아. 납치 스킬로 날 소환해.’

- 네, 알겠습니다.

곧 시국은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잡아당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기분 나쁜 느낌에도 시국은 말없이 몸을 내맡겼다.

곧 눈앞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음침한 어둠 아래에서 헌터들과 데스 나이트 군단이 싸우던 전장이 아닌, 더 어두운 어둠 속에 잠긴 공간에서 시국은 원자화 스킬을 유지한 채 전시안 스킬을 사용했다.

‘저거다.’

어둠 속에서, 시국의 전시안에 한 물체가 포착됐다.

그것은 사람이라기보단 물체라 부르는 게 더 나았다.

사람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생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국은 조용히 그것에게 다가갔다.

그것은 시국이 다가옴에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멍한 표정으로 동그란 어두운 구슬을 손에 쥔 채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건 껍데기다. 소환자 역할을 하는 건 저 구슬이고.’

껍데기에 불과한 존재를 무시하고 시국은 그대로 검은 구슬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깡-!

스파크가 튀며 검은 구슬에 흠집이 생겼다.

그것을 들고 있는 물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흡사 마네킹과도 같은 놈을 무시한 채 시국은 다시 칼을 휘둘렀다.

깡-!

이번엔 제법 크게 스파크가 튀며 검은 구슬이 살짝 갈라졌다.

퍽-!

시국이 세 번째 칼을 내리치자 비로소 구슬 전체에 금이 갔다.

퍽-!

마지막으로 시국이 칼을 휘두르자 마침내 검은 구슬은 반으로 갈라졌다.

반으로 갈라진 검은 구슬은 곧 산산조각이 나며 깨졌다.

‘바깥 상황은?’

시국의 물음에 시국을 이곳에 소환시켜두고 바깥에 나가 있던 사역마가 텔레파시로 응답했다.

- 데스 나이트가 모두 쓰러졌습니다, 주인님.

‘됐어. 다시 날 그곳으로 소환해.’

- 분부 받들겠습니다.

다시 사역마가 납치 스킬을 사용했다.

놈이 들고 있던 시국의 머리카락을 매개로 놈이 있는 곳과 시국이 있는 공간 사이에 연결점이 생겼다.

그 연결점을 뛰어넘어 시국은 전장 한가운데에 소환이 됐다.

“이겼다!”

헌터들은 환호를 지르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한창 힘겹게 싸우는 도중 데스 나이트 군단이 모두 기능을 잃고 허물어졌으니까.

그러나 이반 이바노프를 비롯한 공격대 간부들의 표정은 마냥 밝지는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시국은 원자화 스킬을 푼 채 다가갔다.

이반 이바노프가 시국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아직 이 요새는 멀쩡한 걸 보면 울룰루 툼베베는 죽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그러자 올랑드 퐁피두와 류야오방, 줄리아 텍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 이바노프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여러분들께서는 헌터들 대비 태세를 강화해 주십시오. 놈은 언제 어디서 나올지 모릅니다.”

세 사람은 고개를 끄덕인 후 흩어졌다.

이반 이바노프가 시국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저 탑 내부 모처에 데스 나이트 군단을 지휘하는 구슬이 있었습니다. 그걸 들고 있던 네크로맨서로 보이는 작자는 사실상 시체나 다름없었던 걸 보면 그 구슬이 핵심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젠장……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로군. 울룰루 툼베베는?”

“따로 찾아보진 못했습니다.”

“하긴…….”

그들이 대화를 하는 사이 올랑드 퐁피두와 류야오방, 줄리아 텍슨은 살아남은 것에 잔뜩 들떠 있는 B급 헌터들의 대열을 재정비했다.

다른 A급 헌터들도 모두 고분고분 그들의 말에 따랐다.

마침내 그들이 대열 재정비를 끝마쳤다.

그걸 확인한 시국과 이반 이바노프가 헌터들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크흐흐흐흐흐흐…….”

어디선가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헌터들은 모두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사방을 둘러봤다.

그러나 웃음소리는 어디에서나 들렸고,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

헌터들은 모두 바짝 긴장했다.

이 기괴한 현상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단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흐흐흐흐…… 제법이구나. 어리석은 것들이여.”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만큼, 이반 이바노프는 역시나 사방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울룰루 툼베베! 네놈의 전력은 이제 사실상 끝났다.”

“크흐흐흐흐…… 그것이 네놈들이 가진 오만의 결정체이며, 그것에서 비롯된 잘못된 판단이니라.”

“…… 무슨 소리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이 어리석은 것아.”

그 순간, 요새를 둘러싼 성벽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보일 만큼 빠르게 움직이며 성벽은 하나의 형상을 갖추어 나갔다.

“이, 이게 무슨……!”

이반 이바노프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점차 무언가의 꼬리 부분처럼 변해 가는 성벽을 바라봤다.

“어서 요새 밖으로 도망쳐! 빨리! 최대한 빨리!”

그때, 시국이 굉장히 당황한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어서! 최대한 빨리 탈출해야 해!”

그렇게 이야기하며 시국은 가장 먼저 달려 나갔다.

이반 이바노프와 류야오방이 그 뒤를 따랐고, 곧 줄리아 텍슨도 따라 요새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올랑드 퐁피두는 마력 물약을 연거푸 두 병 들이켠 후 살아남은 A급 헌터들을 이끌고 요새 밖으로 텔레포트를 했다.

이도 저도 아닌 B급 헌터들은 최대한 자기 나름의 최고 속도를 내며 요새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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