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마왕 [Real One]
“……!”
“헉!”
시국의 돌발 행동에 울룰루 툼베베를 지켜보던 모든 헌터들은 경악했다.
공격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들이 이곳까지 온 이유는 울룰루 툼베베를 멸절함에 있지 그와 어떤 외교적 교섭을 하고자 함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소한 전조라도 있어야 했다.
공격을 하더라도 미리 최소한의 신호나 사전 약속 같은 게 있어야 했다.
적어도 헌터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런 측면에서 시국의 공격은 전조도 없었고, 사전 약속도 없는 그야말로 돌발 행동이었다.
“…….”
문제는 울룰루 툼베베였다.
분명 시국이 날린, 어쩌면 최대한으로 힘을 끌어모아 가했을 공격에 그대로 이마가 꿰뚫린 울룰루 툼베베.
여기 있는 그 어떠한 헌터라도, 심지어 이반 이바노프조차도 막을 수 있으리라 여겨지지 않는 그 공격에 정통으로 맞은 마왕은 마치 그 어떠한 데미지도 입지 않았다는 양 해골 가면 너머 무심한 눈으로 시국을 바라볼 뿐이었다.
“제법이구나.”
음산한 영국식 영어가 울룰루 툼베베로부터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의 입은 달싹거리지도 않았다.
시국은 가만히 그를 노려보았다.
“단순히 객기로 던진 것은 아니겠고, 보았느냐?”
마왕의 물음에 시국은 냉랭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본체는 어디 있지?”
시국의 물음에 오히려 놀란 쪽은 헌터들이었다.
“본체라니?”
“그럼 저게 가짜란 말이야?”
헌터들 사이에서 한 차례 파장이 일었다.
울룰루 툼베베는 그것이 즐겁다는 듯 한동안 가만히 헌터들의 웅성거림을 듣기만 했다.
“저 탑에 있나?”
시국이 재차 물었다.
울룰루 툼베베가 이마에 박힌 칼을 뽑아냈다. 칼날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칼을 시국에게 휙 던졌다.
허공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칼을 시국은 잡았다.
“네놈의 잘난 눈으로 한번 찾아보는 게 어떠하냐?”
비웃음과도 같은 마왕의 이야기에도 시국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전시안으로 허상에 불과한 눈앞의 울룰루 툼베베와, 요새 안 어딘가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그의 본체 사이의 연결 고리를 찾아내려 할 뿐이었다.
“울룰루 툼베베! 난 이번 아프리카 해방 공격대 총공격대장이자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인 이반 이바노프다.”
시국과 울룰루 툼베베 사이에 대치가 평행선을 달리자 이반 이바노프가 앞으로 나섰다.
울룰루 툼베베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네놈이 어째서 마왕이라 불리는지, 어떻게 아프리카 대륙의 80%를 장악했는지 이곳까지 오면서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네놈의 강함은 인정하겠다. 하지만 네놈이 강한 만큼, 우리는 더 강하다. 네놈의 본체가 어디에 있건, 우리는 결국 네놈과 언데드 군단으로부터 이 땅을 해방할 것이다.”
처음으로 울룰루 툼베베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조국의 방패는 과묵하고 묵직한 매력이 있다고 들었도다. 그런데 오늘 직접 보니 덩치만 묵직할 뿐, 그 입은 한없이 가볍구나.”
그의 도발에 이반 이바노프는 동요하지 않았다.
“네놈이 뭐라 지껄이건, 오늘 이곳이 네놈의 무덤이 되리란 건 변함없는 진실이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이반 이바노프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금방이라도 싸움에 돌입할 것만 같은 그의 모습을 보며 울룰루 툼베베가 마치 콧방귀 뀌듯 이야기했다.
“검은 도마뱀으로부터 가까스로 살아남은 놈치고는 오만한 발언이로다.”
순간 이반 이바노프가 움찔했다.
“네놈이 저 동양인 없이 어찌 그곳에서 살아남았을 수 있었더냐? 네놈이 스스로가 지배하는 러시아를 서방 세계와 비교할 때 너는 분명 죽음을 각오했었노라. 그때, 저 동양인이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어 망자의 힘을 끌어다 검은 도마뱀을 죽이지 않았더라면, 과연 네놈이 이 자리에서 헛된 소리를 할 수나 있었다고 생각하느냐?”
이반 이바노프의 눈이 떨렸다.
그러나 그것은 모스크바 던전 내부에서 자신이 겪은 일이, 지난 5년간 기밀 사항으로 분류하여 공개하지 않았던 사건이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와서가 아니었다.
“네놈이 어떻게 그걸…….”
근본적으로 이반 이바노프의 동요는 울룰루 툼베베가 5년 전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지나치게 상세히 알고 있어서 였다.
“본질적으로 검은 도마뱀과 나는 다름이 없노라. 그의 본질과 나의 본질은 성질 측면에서 같노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이반 이바노프는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지켜보던 시국이 입을 열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라 했어.”
울룰루 툼베베의 시선이 다시 시국에게로 돌아왔다.
시국이 말을 이었다.
“이 요새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요새 전체를 휘감고 있는 이 마력…… 다른 요새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이 마력이 난 분명 낯설지 않았지.”
“역시나 검은 도마뱀을 죽인 놈 답구나. 저 머저리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다니.”
“그 파충류와는 무슨 관계지?”
“말했노라. 본질상 놈과 나의 차이는 없노라고.”
“…….”
울룰루 툼베베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더 이상의 잡담은 필요가 없노라. 이제 네놈들에게 나의 본질적인 힘을 보여주겠노라. 이 시험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자들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곧 울룰루 툼베베는 검푸른 연기가 돼 흩어졌다.
헌터들은 바짝 긴장한 채 사주경계를 하며 언제든 공격을 펼칠 준비를 끝마쳤다.
쿠구구구구구-
별안간 요새 전체가 지진이라도 만난 양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들림은 점차 커져 체력적으로 가장 부족한 힐러들의 경우 옆에서 누군가 부축해 주지 않으면 서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가 됐다.
“모두 전투 준비!”
이반 이바노프가 공격대 전원을 향해 드래곤 로어 스킬을 사용했다.
그 버프를 받아 어느 정도 심적 안정을 되찾은 헌터들이 전투 준비를 끝마쳤을 무렵, 지진은 멈췄다.
쿵-!
그리고 일시에 땅을 뚫고 정확히 살아남은 헌터들의 숫자만큼의 언데드 몬스터가 나타났다.
“키아아아아-!”
하나하나가 A급에서 B급 사이의 능력을 보이는 데스 나이트들이 소름 돋는 귀곡성을 내며 헌터들을 공격해갔다.
“공격!”
이반 이바노프의 외침이 아니더라도, 이미 전투는 시작됐다.
A급 헌터들의 활약과 B급 헌터들의 열세 속에 그렇게 울룰루 툼베베와의 1차전은 시작됐다.
* * *
청와대 총리 관저.
집무실 바로 옆에 딸린 비밀 응접실에서 총리 남한석과 강봉길, 한명호가 나란히 원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많이 바쁘신 분들을 이렇게 오라 가라 해서 여러모로 내 맘이 편치는 않습니다. 허허허.”
남한석의 말에 한명호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희야 뭐 요즘 한가합니다. 박 회장이 워낙에 일을 잘 해서 말입니다.”
약간의 경계심 섞인 한명호의 말에 남한석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박정목 회장은 훌륭한 경영자입니다. 내각 자체 평가에서도 박 회장의 경영 능력은 항상 A로 평가받고 있지요.”
한명호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잠자코 남한석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반면 강봉길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만 주구장창 들이켤 뿐이었다.
“고인이 되신 이정훈 전 회장의 빈 자리를 완벽하게 채워 주진 못하지만, 창업 군주의 뒤를 잇는 수성 군주로서는 확실히 박 회장만 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뭐 기업 경영을 한 적은 없지만, 혁명 지도자이자 혁명 정부의 첫 내각 수장으로서 볼 때는 그렇다는 겁니다.”
계속되는 남한석의 박 회장 칭찬에 강봉길의 표정은 점차 똥이라도 씹은 양 썩어 들어갔다.
바로 맞은편에서 그걸 지켜보던 한명호가 발끝으로 그의 종아리를 툭툭 건드렸지만, 그의 표정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걸 보고 있던 남한석이 웃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기업 경영 측면에서의 높은 능력이 꼭 인사 관리에도 반영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한명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남한석이 한명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선대 회장이 죽고 차기 회장이 등극하면 자연스럽게 선대 회장과 함께했던 그 시대 경영자들은 물러나는 게 맞습니다. 가끔 자기들끼리 골프나 치며 노후를 즐기는 게 이치에 맞지요.”
남한석이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눈치가 그리 빠르지 않은 강봉길도 뭔가 남한석이 심상찮은 말을 한단 걸 깨닫고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수직 계승됐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에서 자식으로 혹은 할아버지에서 손자로 말입니다. 회장과 같은 세대 내부에서 이루어진 승계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단 겁니다.”
남한석이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한명호와 강봉길을 바라봤다.
대번에 자기가 무슨 말을 할 건지를 눈치챈 한명호의 반짝이는 눈과 아직까진 미심쩍어하지만 대충 감을 잡은 강봉길의 의심 섞인 눈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박정목 회장은 이정훈 전 회장과 같은 세대입니다. 즉, 한 사장님이나 강 사장님과 같은 세대란 겁니다. 경영 능력이 인정받아 일시적으로 회장직을 꿰차게 됐다면 마땅히 다음 세대인 이시국 부회장이 회장직에 오를 때까진 최대한 이정훈 전 회장의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게 도리에 맞는 겁니다.”
묘한 기대감과 의심이 한명호와 강봉길 사이를 지나가며 공기를 이상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두 분 사장님은 이정훈 전 회장과는 구로구 클로버파 시절부터 함께했던 사이 아닙니까? JH지주가 세워지고, 계열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전문경영인으로 고용된 박정목 회장과는 차원이 다른, 뭐랄까 진골 귀족 아니겠습니까?”
한명호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커피를 한 모금 쭉 넘겼다.
강봉길은 여전히 의심하는 눈으로 남한석을 바라보았다.
“분하지도 않으십니까? 일개 전문경영인이 창업 공신 중의 공신인 두 분을 식물 사장으로 만들어놓은 게?”
남한석이 두 사람의 정곡을 찔렀다.
어떠한 희망을 가지게 된 한명호나, 여전히 강한 의심을 품고 있는 강봉길이나 모두 그 대목에서는 공감을 했다.
이정훈 사후 시국의 뜻에 따라 박정목은 시국을 대신해 JH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한창 카르텔 구축으로 바쁘게 움직이던 시국 입장에선 JH그룹 회장직에 올라 그룹 일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적당히 부회장으로서 감투를 유지하며, 박정목 회장에게 거시적인 명령만 내리고 나머지 미시적인 부분은 그에게 일임한다는 게 시국의 구상이었다.
문제는 인사 문제까지도 박정목에게 위임했다는 것이었다.
“박정목 회장은 이시국 부회장의 눈치를 봤기에 인사권을 들고 있음에도 두 분을 사장직에서 쫓아내진 못했습니다. 대신 물산과 건설 이사회에 모두 자기 사람을 심고, 그들이 부사장을 중심으로 자기들끼리 뭉치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두 분 사장님을 식물 사장으로 만들었지요.”
남한석의 말은 한명호와 강봉길이 지난 3월부터 가지고 있던 불만을 살살 긁어주었다.
결국 한명호가 참지 못하고 말을 내뱉었다.
“총리 각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시니 꽉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입니다. 사실 그동안 저희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박 회장, 그 사람의 처사는 분명 문제가 많습니다. 당장 건설이나 물산에서는 물론 지주에서도 배제된 임원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바꿔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평 승계로, 임시로 회장직에 오른 사람이면 임시직답게 보수적인 인사를 하도록 말입니다.”
그러자 잠자코 듣기만 하던 강봉길이 다소 냉소적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어떻게 바꿀 겁니꺼? 막말로 총리님도 꼭두각시 아입니꺼?”
순간 한명호가 화들짝 놀라 강봉길을 바라봤다.
“부회장이 눈 딱 뜨고 박정목이 뒤 봐주고 있는데 우리끼리 모여가 이래 씨부리 봐야 뭐 개코나 만질 수 있을 것 같십니꺼?”
그 말에 남한석은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잔을 내려놓으며 강봉길을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그 이시국이 죽는다면…… 그래도 불가능할 것 같습니까?”
순간 한명호는 물론 강봉길까지도 표정이 굳어 버렸다.
손까지 달달달 떠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남한석은 자기 잔에 남은 미지근한 커피를 쭉 들이켠 후 주전자를 들어 다시 따뜻한 커피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