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빌런의 인생2회차-142화 (142/200)

142 협상 [Join the Raid]

백악관.

미국 대통령 조나단 스미스는 국무장관 및 CIA 국장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국제연합군 구성은 별 차질 없이 잘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앞장서서 병력을 차출하는 만큼 다른 나라들도 따라올 수밖엔 없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공격대 구성입니다.”

국무장관의 말에 조나단 스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무장관이 말을 이었다.

“테러에 직접 노출된 국가들의 경우 앞장서서 B급 이상의 헌터 및 요원들을 차출하고 있습니다. 영국같은 경우 3명의 A급 헌터가 모두 공격대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보였고, 터키도 자국 국적의 B급 헌터 35인 전부를 차출하겠다고 통보해 왔습니다. 그 외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벨기에, 그리고 최근 테러에 노출된 파키스탄까지 모두 자국의 B급 헌터 및 요원들을 총동원할 예정입니다.”

국무장관이 잠시 숨을 고르며 자기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켠 후 다시 말을 이어갔다.

“문제는 나머지 국가들입니다. 테러 피해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 중 한국과 러시아를 제외하면 대체로 헌터 차출에 부정적인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하며 시간만 보내고 있을 뿐입니다.”

국무장관의 말이 끝나자 조나단 스미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5년 전의 트라우마가 있으니까.”

국무장관이 곧장 말을 받아 이었다.

“맞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강하게 공격대 구성을 주장하기에는 정작 우리나라 헌터들도 참여를 주저하고 있다는 겁니다.”

“명분이 서질 않는단 거군.”

“그렇습니다, 대통령님.”

“명분이라…….”

“일본이나 중국 쪽은 이시국이, 유럽연합과 중동 쪽은 이바노프가 맡아서 설득을 하고는 있다고 합니다만 아무래도 역부족이지 않나 싶습니다.”

국무장관의 말에 조나단 스미스는 시선을 곧장 CIA 국장에게로 돌렸다.

“NAC와는 연락이 닿았나?”

그의 물음에 국장이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했다.

“네, 당장이라도 대통령님과 연락이 가능한 상태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조나단 스미스는 잠시 턱을 쓰다듬다가 이내 국장에게 이야기했다.

“사흘 뒤 저녁에 NAC 고위 인사들과 백악관에서 식사나 한 끼 하고 싶군.”

“네, 이야기해 두겠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 국장을 바라보는 조나단 스미스의 눈가에 순간 묘한 빛이 일렁이다 사그라들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요즘 한국 쪽에서 정보가 상당히 늦게 들어오는 것 같아. 이바노프의 딸과 이시국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한국 기업의 공식 발표로 알게 되고 말이야.”

그 말에 순간 CIA 국장이 흠칫했다.

조나단 스미스가 말을 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전임 존슨 행정부 때만 하더라도 한국 쪽 정보는 보통 늦어도 공식발표 하루 전에는 대통령 집무실로 날아들었었지.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한국 쪽에서 날아오는 정보의 질과 양에 문제가 생기더니 이젠 아예 공식발표 이후에나 알게 되는 수준으로 전락했단 말이지.”

그러면서 조나단 스미스는 말없이 국장을 바라봤다.

해명할 게 있으면 해명해 보란 듯.

CIA 국장은 침을 꿀꺽 삼킨 후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도 아시다시피 혁명으로 한국의 현웅렬 행정부가 무너지고 7공화국 남한석 내각이 들어서면서 비공식적으로 운영되던 한국 정보기관과 우리 사이의 소통창구가 사라졌습니다. 한국 정보기관은 이미 그 기능을 모두 잃고 그저 껍데기만 남은 상태이고, 그 기능을 이어받은 경찰과 초인협회는 우리가 제대로 침투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국장은 살짝 조나단 스미스의 눈치를 살폈다.

대통령은 여전히 납득하지 못하겠단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국장은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 말을 이어갔다.

“무엇보다도 남한석 내각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이시국이 전통적인 외교 관계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전히 조나단 스미스의 표정이 변하지 않자 가만히 눈치를 보던 국무장관이 국장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맞습니다. 실제로 한국의 전현직 고위 외교관들이 말하길 7공화국 출범 이후로 한국 외교부 내의 미국파와 일본파의 비중이 줄고 러시아파와 동남아파의 비중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단순히 한국 정보기관의 약화로 인한 제휴 단절이 아닌, 한국 정권 자체의 외교 정책 노선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제야 조나단 스미스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납득간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마시곤 국무장관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내가 알기론 한국의 남한석 내각은 국정자문회의라는 기구의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알고 있소. 그리고 국정자문회의는 이시국이 사실상 장악한 조직이고. 맞나?”

그 물음에 국무장관과 CIA 국장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나단 스미스가 말을 이었다.

“즉, 현재 한국의 외교 정책은 내각 그 자체보다는 이시국 개인의 성향에 따른 문제라 봐도 된다는 거지. 그 이야기는, 당장에는 이시국의 힘 앞에 숨죽이지만 언제든지 기회만 되면 다시 한국의 노선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고위 공직자들이 여기저기 있다는 소리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국무장관과 CIA 국장은 가만히 조나단 스미스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나단 스미스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 * *

“하하하. 결혼 축하드립니다, 이시국 헌터.”

베이징 외곽에 있는 드넓은 전통 중국식 저택의 현대식 누각에서 중국 초인협회 주석이자 용봉회의 수장인 류야오방이 시국을 맞이했다.

다소 편한 복장을 한 류야오방의 환대를 받으며 시국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곧 몇 가지 간단한, 비싸 보이는 북경식 중화요리와 도수 높은 중국 전통주가 테이블에 깔렸다.

공예 전문가가 본다면 눈이 휘둥그레졌을 만큼 정교하게 장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수제 도자기에 담긴 음식과 술병, 술잔을 쳐다보지도 않고 시국은 가만히 류야오방을 바라봤다.

류야오방은 늘 그렇듯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시국의 잔과 자신의 잔을 술로 채웠다.

두 사람이 가볍게 건배를 한 후 첫 잔을 비웠다.

첫 잔을 비우자마자 류야오방은 다시 잔을 채웠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시국은 젓가락으로 붉은 양념과 육즙이 흐르는 오리 고기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생각보다 매운맛에 살짝 인상을 찌푸린 시국은 술로 매운 혀를 달랜 후 티슈로 입을 닦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국제연합 안보리에서 결의안이 통과됐다는 소식, 들었지요?”

시국의 말에 류야오방은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시국은 말을 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시작된 테러는 파키스탄까지 때렸습니다. 그 이후로 잠잠하다곤 하지만 언제 또 터질지 모르지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조만간 중국 입장에선 안타까운 일을 넘어서서 분개할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순간 류야오방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러나 그는 웃음을 잃지는 않았다.

그가 시국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이야기했다.

“부디 우리 중국 인민들에게는 그런 비극이 없길 바랄 뿐입니다. 실제로 협회와 길드가 공안 및 인민해방군과 함께 주요 도시를 실시간으로 경계하고 있기도 하고 말입니다.”

“런던의 초인 테러 경비는 세계 최고 수준임에도 손쉽게 뚫렸습니다. 워프 게이트를 타고 넘나드는 것들을 무슨 수로 잡을 겁니까?”

시국은 팔짱을 꼈다.

류야오방이 씩 웃으며 돼지고기 한 점을 집어 먹었다.

술로 입가심까지 한 후 그는 자기 잔을 채우며 이야기했다.

“베이징까지 직접 오신다길래 결혼 축하 받자고 오는 건 아니겠거니 했는데……. 그래도 축하 인사 정도는 먼저 받아 주고 시작하는 게 상호 예의 아닙니까? 하하하.”

“예의를 차리기엔 현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더 예의를 차려야 합니다. 세상이 혼탁하다고 하여 예의마저 잃는다면 혼세 이후는 어찌 되겠습니까?”

뜬구름잡는 소리를 하며 말을 피하는 류야오방의 모습에 시국의 표정은 점점 싸늘해져갔다.

그런 시국의 표정을 바라보며 류야오방이 이야기했다.

“하하하…… 제가 냉기 계열 마법에 능해서 추위를 잘 타진 않는데, 이거 이 헌터님의 얼굴을 보니 저절로 오한이 듭니다. 하하하.”

그렇게 이야기하며 류야오방은 술을 한 잔 또 넘겼다.

그런 그를 향해 시국이 이야기했다.

“언데드를 처치할 방법은 두 가지뿐인 걸로 압니다.”

시국이 팔짱을 풀고 술잔을 들었다.

“하나는 힐러, 그중에서도 종교적 신앙심이 독실한 B급 이상의 힐러가 뿜어대는 마력으로 버프를 받은 무기로 썰어 대는 것이고, 둘은 냉기로 얼려 버린 후 그대로 깨부숴 버리는 것이지요.”

“안타깝습니다. 리카르도 로드리게스 헌터가 살아 있었다면 큰 힘이 됐을 텐데 말입니다.”

류야오방은 별 생각없이 한 말이었지만, 찔리는 게 있는 시국은 표정을 감추고자 술을 그대로 쭉 들이켜며 술잔을 비웠다.

자기 잔을 채워 주는 류야오방을 보며 시국은 말을 이었다.

“현존하는 힐러들 중 첫 번째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바티칸에서 B급 힐러인 하인리히 추기경을 공격대에 보내 주기로 했지만 한계가 분명합니다.”

시국이 젓가락을 들어 류야오방이 먹었던 돼지고기를 한 점 집어 먹었다.

간장 양념이 돼 있어서 맵지도 않고 적당히 달달하여 시국의 입맛에 딱 맞았다.

시국은 그대로 한 점을 더 집어 먹은 후 젓가락을 내려놓고 이야기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죠. 공격대에 참여하십시오, 류 주석.”

이미 시국의 입에서 언데드 퇴치 방법이 나온 순간부터 눈치를 채곤 있었지만 류야오방은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진 못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국이 처음에 먹었던 매운 오리고기를 한 점 집어 먹었다.

그는 잠시 시국을 바라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이거, 익히 예상은 했는데…… 직접 들으니 당혹스럽습니다.”

“러시아는 이바노프 대통령이 참전하고, 한국은 내가 참전합니다. 그 외에 영국의 3대 A급 헌터들이 참전하고 말입니다.”

“허허허.”

“프랑스마저도 A급 헌터를 보내는 마당에 미국과 중국만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류야오방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국이 말을 이었다.

“용봉회의 수장이자 중국 초인협회의 주석인 류 주석이 솔선수범하여 참전을 선언한다면, 잠자코 추이를 지켜보는 나머지 A급 헌터들도 모두 참여할 거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미국으로서도 마냥 가만히 있을 순 없겠죠. 자존심이란 게 있으니 말입니다.”

시국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돼지고기를 한 점 더 집어 먹은 후 술로 입가심을 하곤 팔짱을 꼈다.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시국을 보며 류야오방은 미소를 지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류야오방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기에 그야말로 현대적 감성과 고전적 감성이 어우러진 누각 내부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그 무거운 침묵은 5분간 이어졌다.

“하하하.”

침묵은 류야오방의 웃음으로 끝났다.

그는 술잔을 들어 술을 식도로 넘긴 후 잔 표면을 엄지로 만지작거리다 시국에게 이야기했다.

“좋습니다. 참석하겠습니다.”

의외로 너무 쉽게 수락하자 오히려 당황한 쪽은 시국이었다.

시국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류야오방은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러자 시국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류야오방은 자기 잔과 시국의 잔을 술로 채운 후 돼지고기 한 점을 집어 먹은 후 살짝 웃음기 가신 표정으로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조건은 간단합니다. 이시국 헌터께서 보스로 있는 조직의 사업에 저를 포함시켜 주십시오.”

순간 시국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었다.

그를 중심으로 은은하게 살벌한 마력의 파장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야오방은 태연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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