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용봉 [Side Step]
류야오방의 주변으로 마력의 파장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치 아지랑이처럼 그의 몸과 주위를 감싸며 공간을 굴절시키고 왜곡시켰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표정에선 더 이상 여유로운 미소와 평온함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파르르 떨리는, 굳게 닫힌 입술과 두 눈에서 중국의 붉은 용이라 불리는 A급 헌터의 끓어오르는 분노가 표출되고 있었다.
그런 류야오방을 바라보는 시국의 표정은 비록 분노로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표정은 냉랭했지만 되려 여유로웠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서 긴장어린 침묵이 멤돌았다.
둘 다 금방이라도 서로를 향해 자신이 가진 최상의 스킬과 전투력을 폭사시킬 기세로 상대방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 침묵은, 여전히 분노로 떨고 있는 류야오방에 의해 장장 30분 만에 깨졌다.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 군.”
류야오방의 말에 시국은 여전히 냉랭한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이런 건 오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라고 하지.”
“이바노프 대통령이 사윗감으로 점찍어 뒀다지? 그러니 적당히 명성을 부풀려 줬겠지. 과장된 자신의 명성이 실제 실력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참으로 큰 실…….”
류야오방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번쩍인 시국의 눈을 본 순간, 온몸이 굳어 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무슨……!’
최대한 마력을 끌어올려 굳어가는 몸을 풀어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류야오방의 얼굴이 점차 시뻘게졌고, 관자놀이에 핏줄이 돋아나기 시작했으며, 이마에선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의자 팔걸이를 잡은 그의 두 손이 미친 듯이 떨리며 힘줄을 드러냈다.
“A급 초인은 A급 초인인가 봅니다. 이 정도로 방어를 하시다니.”
시국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쳐졌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러나 류야오방은 거기에 화를 낼 겨를이 없었다.
‘저 눈…… 저 눈에 뭐가 있다. 누, 눈을 감아야 해. 눈을…….’
묘한 빛을 발하는 시국의 눈.
그 눈이 자신의 몸을 점차 돌처럼 딱딱하게 만든다는 것을 간파한 류야오방은 눈을 감고자 하는 의지를 품었다.
그러나 그러한 의지는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그의 눈은 감기지 않았다.
아니, 감기기는커녕 깜빡거리지도 않았다.
덕분에 그의 눈은 건조해져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눈물 따위가 아니었다.
‘……!’
류야오방의 마력은 시국의 스킬, 메두사의 눈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했다.
그저 뇌와 심장만큼은 석화되지 않도록 하는 게 그의 마력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실상 인지기능과 혈액순환 기능을 제외한 모든 기능이 마비된, 살아있는 돌덩어리나 다름없는 류야오방을 바라보며 시국이 말문을 열었다.
“A급도 다 같은 A급이 아닙니다, 류 주석. 중국이란 대국의 초인들을 총괄 관리하는 분인 만큼 잘 이해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시국이 류야오방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찻잔을 들었다.
살짝 식은 차를 한 모금 넘긴 후 시국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여기서 당신을 죽인다 한들 세상은 절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한국 유일의 A급 헌터 이시국은 중국 초인협회 주석 류야오방이 살해당한 시간에 신뢰할 만한 사람들과 함께 중요한 미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
“물론 세상은 당신을 살해했으리라 여겨지는 유력한 용의자의 신상을 파악하여 추적에 나설 겁니다.”
그 순간 시국의 얼굴이 김양기의 것으로 바뀌었다.
“중국이 구축한 최고의 사회 감시 시스템은 이 남자를 류야오방 주석 살해 유력 용의자로 지목할 겁니다.”
시국의 입가에 진득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얼굴이 다시 본래의 것으로 되돌아왔다.
“아니면 당신은 흔적도 없이 증발시킬 수도 있습니다. 한 사람을 영원히 증발시키는 데 특화된 존재가 있는데, 그 녀석에게 부탁하면 아무리 당신이라 하더라도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영원히 찾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공간과 공간 사이의 이차원에서 사역마가 미소를 지었고 녀석의 감정은 그대로 시국에게 전달됐다.
시국이 차를 쭉 들이켠 후 말을 마무리했다.
“그러니 류 주석님. 혹시라도 할 말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하십시오. 제가 적당히 편집해서 유언장 형태로라도 남겨 드리겠습니다.”
그 순간 시국의 안광이 살짝 변화를 일으켰고, 류야오방의 입술과 혀는 자유를 얻었다.
“…….”
그러나 류야오방은 곧장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떨리는 눈으로 시국을 바라보며 입을 살짝 벌릴 뿐이었다.
따다다다닥.
류야오방의 윗니와 아랫니가 빠르게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시국은 빈 찻잔을 채우고 그 향을 잠시 즐겼다.
“할 말이 없으신가 봅니다?”
차를 흠향하던 시국이 류야오방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류야오방은 결국 대답을 했다.
“아까는…… 내가 경솔했습니다.”
류야오방의 말에 시국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죽기 전에 겸손의 미덕을 회복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내 경솔을 용서하시고…… 다시 협상을……”
“이보세요, 류 주석.”
“…….”
“난 지금 당신과 협상을 하려는 게 아니야. 단지 당신의 유언을 들으려는 것뿐이야.”
“…….”
“그러니 협상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빨리 유언이나 이야기해. 뭐, 중국의 초인들이나 인민들에게 할 말이 있다든가, 중난하이의 높으신 양반들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든가, 하다못해 애인들한테 못다 한 고백이라도 있다든가 할 거 아니야? 어?!”
그렇게 이야기하며 시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품에서 꺼낸 단검이 들려 있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검을 든 채 다가오는 시국을 향해 류야오방은 절규하듯 소리 질렀다.
“미안합니다! 살려 주세요!”
안구의 건조 때문인지,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다는 인지에서 비롯된 공포와 슬픔 때문인지 감지도 못하는 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런 류야오방을 바라보며 시국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에 감돌던 묘한 빛이 사라졌고, 류야오방의 석화된 신체가 점차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시국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단검을 품에 집어넣은 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류야오방에게 이야기했다.
“살려는 드리겠습니다.”
시국이 잔을 내려놓고 다리를 꼰 채 말을 이었다.
“다시 처음부터 대화를 시작해 볼까요, 류 주석님?”
그의 입가에 퍼지는 승자의 미소를 바라보며 류야오방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야만 했다.
* * *
2032년 10월 10일.
대한민국 초인협회는 언론에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중화인민공화국 초인협회와 초인범죄 방지를 위한 MOU를 체결하기로 했음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물론 그 이야기는 그리 큰 화제를 몰고오진 못했다.
최근 급증하는 초인범죄, 즉 빌런의 범죄와 관련하여 한국 초인협회가 주변 국가 초인협회와 협력 MOU를 맺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대중들의 무관심과 언론의 의도적인 축소 보도 속에 서울과 베이징 사이에선 MOU를 공식적인 협정으로 만들기 위한 실무 협상이 진행됐다.
중국 초인협회에 전폭적인 협력과 양보 속에 마침내 2032년 10월 21일, MOU 체결이 발표된 지 11일 만에 한중 양국 초인협회 간의 공식적인 협력 협정이 맺어졌다.
“중화인민공화국 초인협회는 초인범죄 방지를 위해 관할 내 초인범죄 관련 정보를 실시간으로 대한민국 초인협회와 공유할 것이며, 이는 대한민국 초인협회도 마찬가지이다. 각국 국가 안보 및 기밀과 연관된 정보의 경우 민감한 내용을 제외한 부분만 우선적으로 전달하고, 민감한 부분의 공유에 관하여서는 각국 정부 당국과의 조율을 거쳐 결정하기로 한다.”
서울과 베이징에서 동시에 여정연과 류야오방에 의해 선포된 협정문은 한동안 양국 초인협회의 공식 홈페이지에 게재됐다가 슬그머니 구석으로 사라졌다.
미국과 영국 언론에선 한중 초인협회의 협정문을 두고 한중 간 냉랭한 기류가 초인협회의 협력 협정 체결을 매개로 해소되는 것 아니냐는 추측성 보도가 기사화되긴 했지만, 그들 또한 그 이상의 관심을 표명하진 않았다.
* * *
2032년 10월 22일 18시.
잠원 마리안느 펜트하우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나연이, 생일 축하합니다.”
유달리 더운 가을날, 야외 테라스에선 나연이의 26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조촐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촛불을 끄는 나연이를 바라보며 시국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축하해, 나연아.”
“축하해.”
“축하한다.”
애인인 황준기와 자신을 마음으로 키운 이정훈-유서영 부부의 축하를 받으며 나연이는 환하게 웃었다.
“축하해요, 나연 씨.”
그리고, 올해 처음으로 나연이의 생일 파티에 참석한 이방인, 폴리나의 축하에 나연이는 역시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마워요, 폴리나 씨.”
“폴랴라고 하세요. 그리고 말 낮춰도 돼요. 시국 씨 동생이라지만 저보단 언니잖아요.”
폴리나의 말에 나연이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아직은 어색하기만 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좀 더 적극적으로 나연이와 친해지기 위해 다가서는 폴리나의 노력에 대견함을 느끼며 시국은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고급 와인과 위스키가 사람들의 잔을 채웠고, 순식간에 빈 병이 생겨났다.
“꾹이라고? 어후, 너무 닭살 돋는 칭호 아니야?”
“왜? 애칭으론 딱 좋은데. 언니는 남자친구랑 따로 애칭 같은 거 부르는 거 없어?”
술의 힘으로 나연이와 폴리나가 친해졌고, 두 사람은 서로 애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가만히 있던 황준기를 대화에 끌어들였다.
“준기 씨, 언니한테 애칭 하나 안 만들어 줬던 거예요? 사귄 지 10년 도 넘었다면서?”
황준기를 압박하는 폴리나.
곁에서 뭐가 좋은지 까르르 웃는 나연이.
당황해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황준기.
그 모습을 보며 말없이 웃고 있는 유서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시국과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잠시 거실에서 따로 보자는 신호를 보내는 이정훈.
시국은 이정훈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이정훈이 먼저 거실로 들어가자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따라 들어갔다.
“애인이라고?”
“그런 셈이지.”
“동거까지 한다고?”
“뭐, 문제 될 건 없잖아?”
시국의 말에 이정훈이 피식 웃었다.
“다 큰 성인 남녀가 동거하는 게 뭐 문제는 아니지. 단지…… 여자의 아버지가 러시아 대통령이라는 게 문제일 뿐이지.”
“뭐, 니콜라예비치한테 허락은 받았으니까.”
“혹시 저 여자와 결혼이라도 할 생각이야?”
이정훈이 다소 진지한 표정으로 시국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그를 잠시 빤히 쳐다보던 시국은 이내 씩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니콜라예비치는 그걸 바라는 눈치야. 뭐, 나도 언젠가는 결혼을 해야 할 거고, 이왕 할 거면 전략적 가치가 높은 사람과 하는 게 좋겠지.”
다소 애매모호 하지만 대강이나마 시국의 속내가 드러나는 답변에 이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내가 네 연애사업에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생각은 없지만…… 결혼을 할 거라면…… 그 전에 애인들은 다 정리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순간 시국의 눈썹이 살짝 위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며 이정훈은 곧장 말을 이어 뱉어냈다.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오고 있어. 아무래도 내가 네 아버지다 보니, 그리고 최측근으로 분류되다 보니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다들 이야기하는 눈치더라고.”
시국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까르르 웃는 나연이와 폴리나를 바라보며 이정훈에게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다들 알고 있어. 심지어 폴랴까지도.”
이정훈이 흠칫하며 시국을 바라봤다.
시국이 미소 가득한 표정으로 이정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마음에 방이 여러 개란 이야기를 하니까, 다들 납득을 하더라고.”
그 말에 이정훈은 어이없다는 듯 한 차례 웃어 보였다.
“그래도 안방은 하나뿐이란 걸 잊지 마. 양부이기 이전에 그래도 인생 1년이라도 오래 산 선배로서 이야기하는 거야.”
이정훈의 충고에 시국은 미소를 지을 뿐, 가타부타 별말을 하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