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빌런의 인생2회차-113화 (113/200)

113 작당 [Band Together]

‘이 인간이 술에 취했나?’

최도, 박도.

생각은 같았다.

그만큼 한 원장의 아이디어란 것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최대한 표정을 숨긴다고 숨겼지만, 너무도 어이없고 근본 없는 한 원장의 말은 나름 베테랑임을 자처하는 두 요원들이 제대로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황당함에 일그러져 가는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던 한 원장이 주먹으로 탁자를 쾅-! 소리 나게 내려쳤다.

“왜 표정들이 그 모양이야! 내가 지금 개소리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술이 넘치며 상 위에 흘렀다.

최와 박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였다.

한 원장이 씩씩거리며 신경질적으로 술을 한 모금 넘겼다.

그럼에도 성에 차지 않는지 병째 식도에 부어 넣고는 순식간에 비어 버린 병을 탁자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붉게 상기된 채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한 원장이 최와 박에게 이야기했다.

“이것들이…… 내가 그래도 월영공제회하고 의리도 있고 또 네놈들이 나름 그쪽에서 성골, 진골까진 아니더라도 6두품 정도는 되는 놈들이라 비싼 밥 처먹여 가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데 이 새끼들이…… 지금 장난해?!”

한 원장의 역정에 최와 박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새끼…… 진심이다.’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서로 눈빛 교환을 하던 최와 박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최가 금방 터질 것만 같은 한 원장의 시뻘건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죄송합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디어라 그만…….”

최의 말을 박이 받아 이었다.

“저희가 그동안 펜대만 굴리다 보니 감을 잃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두 사람이 저 자세로 나오자 한 원장은 몇 차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씩씩거리더니 이내 물 한 모금을 먹고 호흡을 가라앉혔다.

‘연기력이 제법 대단해.’

곁에서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시국이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한 원장이 입을 열었다.

“그래. 갑작스럽겠지. 늘 CIA하고나 일하던 것들이니까.”

“…….”

“그래도 이 자식들아. 대놓고 날 미친놈 보듯이 보는 건 아니잖아!”

“죄송합니다.”

최와 박의 사과의 한 원장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가 술 한 병을 더 따서 자기 잔을 채웠다.

참치 회 한 점과 술 한 잔을 넘긴 후 한 원장이 다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얼마 전에 국안부 스파이 하나를 잡아냈어. 덕분에 한국에 암약한 놈들의 조직과도 접촉할 수 있었지.”

유명무실해진 국정원이 무슨 수로? 라는 생각이 최와 박의 뇌리를 동시에 때렸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맞은편의 에이전트 홍에게로 향했을 때, 그 의문은 순식간에 해소됐다.

‘저 인간이면 뭐 충분히 가능은 하겠지.’

한 원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서 우리는 저쪽에 제안을 했어. 우리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걸 도와달라고 말이야.”

쿠데타라는 단어가 또 한 번 나오자 최와 박은 또 흠칫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어깨가 움찔거리는 정도로나 표출됐을 뿐, 표정으로 드러나진 않았다.

하지만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까지는 어떻게 통제할 수가 없었다.

‘외세를 끌어들이는 쿠데타라고?’

현직 국정원장의 입에서 쿠데타란 단어가 나오는 것도, 그 주체가 유명무실해진 국정원이란 것도, 그 배후에 중국 국가안전부를 둔다는 것도.

두 사람에게는 쉽게 받아들이긴 어려운 내용의 아이디어였다.

최와 박은 한 원장의 표정과 눈빛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과 표정에선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미친 새끼…….’

‘돌았네.’

최와 박은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쿠데타 모의 자체도 사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판국에 거기에 외세를 끌어들인다는 구상은 도저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론 수용이 불가능했다.

“어차피 남한석 내각은 약점이 많아. 아니, 7공화국 자체가 약점투성이야. 내가 적당히 내부에서 총질을 좀 하고, 국안부에서 자기네들 세포 조직 활용하면 충분히 엎어 버릴 수 있어.”

한 원장의 확신에 찬 말에 최와 박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잘못 걸렸다.’

‘이건 미친 거야.’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던 한 원장이 피식 웃었다.

“지금 너희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잘못 걸렸다고, 이대로 빨리 도망가서 남한석이한테 다 일러바쳐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한 원장의 말은 두 사람의 속내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이번에도 둘은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그 모습을 보며 둘을 한 차례 비웃은 한 원장은 에이전트 홍을 바라보며 턱짓을 했다.

에이전트 홍이 곧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볼펜과 함께 두 사람에게 건넸다.

엉겁결에 종이와 펜을 받은 최는 한 원장과 에이전트 홍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펼쳐 봐.”

한 원장의 말에 최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펼쳤다.

“……!”

“이, 이건…….”

종이의 내용물을 보고 당황하는 최와 박을 향해 한 원장이 이야기했다.

“연판장이야. 거기에 두 사람 이름 적으면 돼.”

한 원장의 말에 최와 박이 그를 바라보았다.

“워, 원장님…… 저희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최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에이전트 홍으로부터 가공할 마력 파장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마치 호랑이의 포효에 담겨 있는 저주파처럼, 인간을 순간적으로 마비시켜 버리는 초인의 마력 앞에 최와 박은 그저 벌벌 떨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한 원장이 이야기했다.

“거기 이름 적어.”

“…….”

최와 박은 그제야 깨달았다.

애초에 여기 온 순간 이 말도 안 되는 쿠데타 작당에 가담한 것임을.

‘안 돼. 이건 미친 짓이야.’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손은 펜을 들어 연판장에 이름을 적어 넣고 있었다.

한 원장의 이름 옆에 나란히 자기들의 이름을 적은 최와 박은 종이를 다시 에이전트 홍에게 건넸다.

그는 그것을 품에 집어넣은 후 마력 파장을 갈무리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너희들을 시작으로 사람을 모을 거야. 적당한 숫자가 된다 싶으면 곧장 국안부하고 협의해서 구체적인 계획을 잡을 거고.”

한 원장이 그렇게 이야기하며 잔을 들었다.

에이전트 홍도 잔을 들었다.

최와 박은 침울한 표정으로 겨우 잔을 들어 올렸다.

“비록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거대할 거야. 다시 우리의 영광을 되찾아 오자고!”

한 원장의 건배사 같지 않은 건배사를 끝으로 넷은 동시에 잔을 비웠다.

‘젠장…….’

‘오지게 걸렸어.’

최와 박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다.

* * *

2031년 6월 14일 11시 30분.

명동 저우페이링의 오피스텔.

거실 소파에 앉은 저우페이링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부주석님과 연락이 됐어. 공식적으로 우리가 드러나지 않는 선에서 얼마든 도와주라 하시더군. 큰 기대는 안 하니 적당히 한국에 혼란 정도만 야기해 주면 된다고 하셨어.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말고, 적당히 우리 쪽 역량을 부풀려서 최대한 뽑아 먹을 건 뽑아내게. 알겠나?』

주한 중국 대사 겸 한국 내 국안부 스파이를 총괄하는 리궈핑의 말을 떠올리며 저우페이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저우페이링이 긴장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잘못하면 A급 헌터한테 맞아 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

소위 국정원의 쿠데타 음모란 것은 애초에 성공 가능성이 0에 수렴하는, 무모한 짓이었다.

쿠데타의 목표는 표면적으로는 남한석 내각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배후에 있는 국정자문회의였다.

그리고 국정자문회의에는 A급 헌터 시국이 사무총장으로 있으며 모든 실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이시국이 쿠데타에 동조해 준다면 모를까…….’

만약 시국이 국정원의 쿠데타에 동조해 준다면 일은 쉽게 진행될 터였다.

그러나 이미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시국이 구태여 그런 짓을 할 이유는 없었다.

남한석 내각이 마음에 안 들면 갈아치우면 그만이니까.

대통령제가 아닌 의원내각제인 만큼 총리 하나 실각시키는 건 별다른 절차를 밟을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치고 빠지기만 한다지만…… 아니, 애초에 치고 빠질 이유나 있나? 국정원한테 뭘 더 뽑아먹을 게 있다고…….’

이빨 잃은 늑대를 넘어, 노쇠한 사냥개 수준으로 전락한 국정원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낸다는 발상에도 그녀는 회의적이었다.

‘어차피 자기도 정체가 드러난 상황인데…… 나만 전면에 내세우는 건…….’

무엇보다도 이런 큰일에 특별한 지원 인력도 없이 자기와 리궈핑, 단둘이서 모든 걸 통제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로서는 너무나도 당혹스러웠고, 정신적으로 큰 압박이 됐다.

‘망할 노친네들.’

그녀의 분노가 실무자의 어려움에 무관심한 공산당의 늙은 지도부에게로 향할 무렵이었다.

‘응?’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없어야 할 집에서 갑자기 타인의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저우페이링은 바짝 긴장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력을 끌어올렸다.

“접니다.”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선글라스를 낀 사내, 에이전트 홍이 나타났다.

그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우페이링은 마력을 다시 가라앉혔지만 긴장의 끈은 놓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올 수도 있었을 텐데?”

대신 그녀는 에이전트 홍을 노려보며 항의했다.

그런 그녀에게 에이전트 홍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기계적인 대답을 할 뿐이었다.

“제 신분이 노출되면 곤란합니다.”

“그럼 나는 노출돼도 된단 건가?”

“당신의 신분 노출을 막기 위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갑자기 들어오면 나도 모르게 공격이 나갈 수 있단 걸 명심해.”

“당신 공격 정도는 충분히 막을 능력은 됩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에이전트 홍의 모습에 저우페이링의 표정은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에이전트 홍은 입꼬리조차 움찔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기 할 말만 계속해서 할 뿐이었다.

“중난하이에서 지령이 내려왔습니까?”

그 물음에 잠시 저우페이링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이전트 홍도 구태여 거듭 묻지는 않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곧 저우페이링에 의해 깨졌다.

“……내려왔으니까 당신을 불렀겠지.”

“뭡니까?”

“당신들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란 지시가 내려왔어.”

“그것뿐입니까?”

“뭐?”

다시 저우페이링의 인상이 험악해지려 했다.

“인력이나 자금 지원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습니까?”

에이전트 홍은 정말 중요한 걸 묻고 있었다.

애초에 인력과 자금 측면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런 위험천만한 쿠데타에 외세를 끌어들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저우페이링은 거기에 아무런 답변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아무런 지원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건 국정원에서 얼마나 준비가 됐느냐에 따라 결정될 문제겠지?”

대신 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에이전트 홍의 질문을 흘려 넘겼다.

에이전트 홍도 별다른 추가적인 질문을 하지는 않았다.

“국정원 쪽에선 얼마나 준비가 됐지?”

그녀의 물음에 에이전트 홍은 즉답했다.

“현직 베테랑 요원 두 사람을 중심으로 과거 외곽조직에서 일했던 자들, 월영공제회 관계자들 그리고 군 내 국정원 세포 조직들이 뭉치고 있습니다.”

“그 규모는?”

“양적으로는 중대 규모지만 질적으로는 사단 규모입니다.”

에이전트 홍의 말에 저우페이링은 속으로 살짝 감탄했다.

‘아직 이 정도 여력은 된다고?’

에이전트 홍의 존재부터, 쿠데타 가담자의 양적 질적 규모까지.

‘우리가 너무 그동안 국정원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오히려 그다지 신통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말했다.

“그 정도로 쿠데타에 성공이나 할 수 있겠어?”

“중난하이에서 충분한 지원만 해 준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 말에 저우페이링은 대꾸하지 않았다.

에이전트 홍도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말을 이어 질문했다.

“국안부 측 책임자는 당신입니까?”

“무슨 의도로 하는 질문이지?”

“말 그대로입니다. 책임자가 당신인지 아니면 리궈핑 대사인지를 묻는 겁니다.”

“……실무 책임자는 나고 최종 지휘권은 대사님에게 있어.”

에이전트 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저우페이링이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쿠데타 작전은 언제부터 시작하는 거지?”

그 물음에 에이전트 홍은 잠시 뜸을 들이다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양측 최종 지휘권자가 협상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으로 저우페이링이 그의 말에 진심으로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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