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조우 [Summit]
러시아 대통령의 상대국 정상 길들이기는 전임 블라디미르 푸틴 시절부터 국제사회에 유명했다.
일부러 회담 시간보다 한참 늦게 들어온다거나, 회담장에 맹견을 풀어놓고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만든다거나 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였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뒤를 이어 러시아의 대통령이 된 이반 이바노프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초인으로 각성하기 전에도 거대한 덩치를 자랑했던 그는 자신의 체격을 무기 삼아 은근히 상대국 정상의 머리통을 가슴팍에 두고 내려다보며 윽박지르듯 이야기하는 구도를 연출하곤 했다.
초인으로 각성한 이후에는 그 정도가 더 심해져, 회담이 자기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싶으면 은은한 마력을 뿌리는 행위를 서슴지 않기도 했다.
‘우리가 러시아보다 약소국이다, 이건가?’
마르코스는 남몰래 이를 갈며 한 차례 이반 이바노프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명백하게 느끼고도 이반 이바노프는 모른 척 시국과 러시아어로 대화를 나누며 마르코스를 고의로 무시했다.
‘나 정도는 국방장관 정도가 제격이다 이건가?’
마르코스는 결국 쓴웃음을 지으며 국방장관 라브로프를 바라보았다.
“반갑소. 방사모로 공화국 국가 이맘 마르코스라고 하오.”
마르코스가 손을 내밀었고, 라브로프가 그 손을 잡았다.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뵙게 돼 영광입니다.”
적당히 기름 발린 라브로프의 칭찬에 마르코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래도 러시아는 장관급이 상대하게 해 주니. 더구나 이 사람 이바노프 정권의 실세 중 하나이자 차기 대권주자라고도 하니…….’
수왕이라는, 마르코스 개인의 명성과는 별개로 남필리핀의 국제적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좋게 봐야 아직까지도 국가로 인정도 받지 못하는 대만 수준.
막후 지원자라는 미국은 마르코스를 상대할 때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를 보냈고, 일본은 외무성 차관을 보냈다.
그에 비해 러시아는 정권 실세라 불리는 국방장관이 자신을 상대해 주니 앞의 두 국가들보단 좀 더 우위로 쳐주는 격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당장 아쉬운 건 나니까.’
중국의 지도부 교체가 끝나고, 공산당 내부 파벌 다툼이 정리되면 그들은 대대적으로 남필리핀에 대한 공작을 감행할 터였다.
그 전에 러시아로부터 국가 승인과 더불어 정치적 지원을 받고 동시에 시국이 주도하는 아시아 빌런 카르텔에 속해야만 했다.
그렇게 마르코스는 위안을 삼으며 속을 가라앉혔다.
“너무 강하게 나가는 거 아닙니까?”
라브로프의 악수를 나누며 가끔 광대를 씰룩이는 마르코스를 바라보며 이반 이바노프에게 러시아어로 말했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선 서로의 상하관계를 명확히 해야 해. 안 그러면 제대로 된 거래가 불가능하거든. 그건 뭐 일반 비즈니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거고 말이야.”
그 말에 시국은 시선을 이반 이바노프에게로 돌리며 피식 웃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강대국의 횡포입니까?”
“횡포라…… 힘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다, 정도로 해 주면 고맙겠어. 어차피 자네도 마찬가지잖아. 상대방과의 상하관계를 명확히 설정하는 거 말이야.”
“글쎄요…….”
“당장 저 둘만 봐도 자네가 사람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그려지는데?”
“네?”
시국이 의문을 표하자 이반 이바노프가 턱으로 여정연과 쿠로카와 미노리를 가리켰다.
시국의 눈이 빠르게 두 사람을 훑었다.
커다란 원탁에서, 시국의 좌우에 앉은 두 여인은 은근슬쩍 시국과의 관계를 과시하며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회담장까지 와서…….’
시국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최대한 그것을 티 내지 않고자 그저 씩 웃어 보였다.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두 여인과 자신의 관계는 수직적으로, 두 여인 서로의 관계는 수평적으로, 그렇게 만듦으로써 여자들끼리 서로 견제하게 하고 자신은 그 위에서 군림하며 자연스럽게 둘 모두를 품에 안고……. 바람을 피우는 주제에 계속해서 여자들한테 사랑받는 비법 아닌가?”
“저한테 사람이라도 붙여 놓았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 겁니까?”
“공항에서부터 호텔까지, 대놓고 그 짓을 하는데 내가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나?”
이반 이바노프의 말에 시국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고, 이반 이바노프도 마찬가지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러시아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세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고, 말을 알아들은 라브로프는 부럽다는 표정으로 한 차례 시국을 바라보았다.
“자, 서로 바쁘신 분들인 만큼 회담을 시작하도록 합시다.”
시국이 원탁을 가볍게 치며 사람들을 집중시켰다.
그가 영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미리 제가 다 이야기 드렸지만, 오늘 이렇게 바쁘신 분들이 이곳에 모인 까닭은 아시아 빌런 카르텔의 설립을 위함입니다.”
시국의 말에 참가자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제가 배부해 드린 협정문 초안을 모두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가자들이 모두 시선을 자기 앞에 놓인 협정문으로 내렸다.
한국어와 러시아어, 영어, 일어로 작성된 협정문을 쭉 읽어 내려가며 참가자들은 시국의 이야기를 들었다.
“카르텔의 구조는 간단합니다. 카르텔 대표로는 제가, 그 아래에 각국 대표로는 한국과 일본, 방사모로 공화국의 대표분들께서 자리하실 겁니다.”
마르코스가 이반 이바노프와 라브로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러시아는?”
시국이 마르코스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러시아의 경우 단순 투자자입니다. 카르텔의 사업에서 얻은 수익금을 지분에 따라 배당만 받을 뿐, 카르텔의 운영과 관련된 일에는 일체 개입하진 않습니다.”
“단순히 지분만 가진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흐음…….”
마르코스가 의문을 보이자 라브로프가 직접 나섰다.
“우리의 경우 초인이 직접 이 일에 참여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자금 및 기타 러시아의 국력으로 가능한 지원을 해 줄 뿐입니다. 그래서 운영에는 간섭하지 않고 배당금만 받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입니다.”
라브로프의 설명에도 마르코스는 뭔가 찜찜하다는 표정이었지만 별다른 말 없이 시선을 다시 협정문 초안으로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시국이 다시 말을 이었다.
“편의상 카르텔의 직책은 기업에서 쓰는 걸로 따왔습니다. 저의 경우 회장으로, 각국 대표분들의 경우 이사로 말입니다.”
이후로 시국의 설명은 쭉 이어졌다.
카르텔 회장과 이사의 관계는 수직적 상하 주종관계가 아닌, 각자 역할과 권한의 차이만 존재하는 평등한 관계가 될 것이란 점.
카르텔 성립으로 동북아에서 생산돼 남필리핀을 거쳐 아프리카와 중동으로 이어지는 마력석 및 기타 품목의 밀무역 루트가 하나로 통합될 것이란 점.
밀무역 루트 통합은 비용 절감을 가져올 것이며, 그것은 고스란히 카르텔 전체의 수익으로 직결될 것이란 점.
수익 배분은 각자의 지분만큼 이루어질 것이며 지분 구조 변동은 매년 회의를 통해 조정될 것이란 점.
카르텔은 단순한 밀무역 동맹을 넘어 서로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는 안보 동맹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
그 외 여러 가지 카르텔의 유익한 점과 서로의 권한 및 역할에 대한 점 등.
근 40분 가까운 시간 동안 시국은 참가자들 앞에서 카르텔 협정문에 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이상 여기까지가 카르텔 협정문 초안에 대한 설명입니다. 총론에 별다른 이의가 없으시다면 각론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시국의 물음에 참가자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부터 협정문 초안에 관한 자구 수정이 있겠습니다.”
이후로 대략 2시간 동안 지겹고도 지겨운 자구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평소에는 시국과 친구로, 애인으로, 정치적 동지로 존재하던 이들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치 모두가 각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라도 된 양 치열하게 자구를 최대한 자기들 유리한 방향으로 수정하려 애썼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 자구 수정 작업도 끝나고, 마침내 협정문 최종안이 도출됐다.
영문과 각국 언어로 배부된 협정문 최종안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며 시국이 이야기했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이로서 우리는 최초의 빌런 카르텔 출범이라는 역사적 순간 위에 서게 된 겁니다. 국제초인협회로부터 빌런이라 낙인찍힌 자들, 초인협회에 신고하지 않고 활동 중인 예비 빌런들 모두를 포괄하는 카르텔이 비로소 탄생한 겁니다.”
시국의 말에 빌런에 해당하는 자들, 즉 마르코스와 쿠로카와 미노리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고 공식적으로는 초인협회 협회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빌런이라 할 수 있는 여정연은 이도 저도 아닌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 투자자로서 지분만 들고 있는 이반 이바노프의 경우에는,
“으으윽! 드디어 끝난 건가?”
기지개를 펴며 홀가분하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각양각색의 모습을 바라보며 시국은 씩 웃었다.
그런 시국을 향해 이반 이바노프가 이야기했다.
“협정문도 완성됐고, 조직도 공식적으로 출범했으니 이제 이런 지겨운 서류 작업은 끝내고 간단하게 한잔하는 게 좋지 않겠어?”
그 말에 시국이 시간을 확인하곤 황당하단 표정을 지어 보이며 이야기했다.
“이제 점심시간인데 벌써 말입니까?”
“뭐, 식사를 겸해서 간단히 곁들이는 거지.”
“식사를 술에 곁들이는 거 아닙니까?”
“뭐, 그렇게 생각하시든가. 자, 다들 갑시다.”
이반 이바노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브로프가 따라 일어났다.
의문스런 표정을 짓는 여정연과 쿠로카와 미노리, 마르코스를 바라보며 시국이 이야기했다.
“이바노프 대통령께서 반주를 곁들인 점심을 제공해 주신답니다. 다들 일어납시다.”
* * *
이반 이바노프는 일행과 함께 대통령의 비밀 별장으로 들어갔다.
위성도, 카메라도, 음파탐지기도, 심지어 마력탐지기도 다 막아버리는 최강의 보안 능력을 자랑하는 러시아 대통령 관용차를 타고 별장으로 들어선 이들은 이반 이바노프의 안내에 따라 별장 내 밀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카르텔 결성 축하를 겸한 조촐한 연회가 열렸다.
공식적으로 아시아 빌런 카르텔의 회장으로 취임한 시국의 건배사를 시작으로 대낮부터 대대적인 술판이 벌어졌다.
“방사모로 공화국의 국가 승인 문제는 최대한 빠르게 처리할 예정입니다. 이미 외무부에서 검토를 끝낸 상태입니다. 빠르면 8월 초에는 공식적으로 국가 승인을 선포할 겁니다.”
“러시아의 국가 승인도 우리에겐 큰 힘이 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제연합 차원에서의 승인입니다.”
“그 부분은 일단 이바노프 각하께서 9월에 열릴 국제연합 총회에 참석하시어 기조연설을 통해 촉구하실 예정입니다. 안전보장이사회 회의를 통해서도 방사모로 공화국의 국제연합 가입을 공식 안건으로 올릴 예정이고 말입니다.”
마르코스는 자신의 대화 파트너인 라브로프와 나란히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일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어찌 보면 마르코스에게 있어서 빌런 카르텔보다 더 중요한 문제에 대한 논의였던 만큼 그쪽의 분위기는 상당히 심각했다.
“어머? 저보다 언니셨네요? 그것도 모르고…… 아까는 제가 좀 무례했죠?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야말로 정연 씨한테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 것 같아 송구스럽네요.”
“어쩜 언니는 말에서도 품위가 느껴져요. 근데 언니 정말 동안이시다. 저는 저보단 어릴 거라 생각했거든요. 아니면 동갑이든가.”
“정연 씨도 충분히 동안이에요.”
“말 편하게 하세요, 언니.”
“아니에요. 전 이게 편해요.”
“그럼 최소한 정연이라고 불러 줘요.”
공항에서부터 회담장까지, 회담장에서 별장 밀실까지.
시종일관 서로를 견제하던 여정연과 쿠로카와 미노리는 술이 들어가자 긴장이 풀렸는지, 금새 서로를 향한 벽을 허물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둘 다 C급 초인이니 술에 취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인간인지라 술이 들어가면 대체로 늘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질투와 경쟁심은 다소 완화됐다.
그 모습을 창가에 서서 바라보며 시국은 피식 웃었다.
“의도대로 돼서 좋은가 봐?”
이반 이바노프의 말에 시국이 뒤로 돌아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뭐, 어쨌건 두 사람 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들이고 또 우리 카르텔의 귀중한 자산들이니 만큼 친하게 지내길 바랄 뿐이죠.”
“다 좋은데 폴랴 눈에서 눈물만 나게 하지 마. 헤어지더라도 자네가 차이는 쪽으로 해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반 이바노프의 입에서, 아주 오래전 자신이 나연이의 애인인 황준기에게 했던 말이 튀어나오자 시국은 한 차례 소리 내어 웃었다.
“웃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반 이바노프도 씩 웃었다.
그렇게 한동안 웃던 두 사람은 들고 있던 잔을 비운 후 서로를 바라보며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우페이링. 그 여자 말이야. 굉장히 재미있더군.”
이반 이바노프의 입에서 폴리나의 곁에 붙어 있는 중국 측 스파이, 저우페이링이 언급되자 시국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