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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빌런의 인생2회차-102화 (102/200)

102 수왕 [Guarantee]

2031년 4월 23일 16시 23분.

모스크바 크렘린 대통령 집무실.

“최근 미국 셰일 업체의 연쇄 부도로 인해 유가가 다시 상승할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가즈프롬이나 로스네프트의 영업이익 적자가 어느 정도 해소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입니다.”

에너지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유가 추이와 국영 에너지 기업의 적자 해소 문제를 청취하던 이반 이바노프는 느닷없이 울리는 스마트폰 진동에 잠시 손을 들어 그들의 입을 막았다.

그가 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시국이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당신들은 잠시 나가 있어.”

이반 이바노프의 말에 에너지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은 군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반 이바노프는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

“전화가 온 걸 보니 일이 순조롭게 잘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에 수화기 너머로 다소 여유로운 시국의 러시아어가 들려왔다.

- 잘되다마다. 뭐, 자세한 건 나중에 따로 말하겠지만 중국 국안부 애들이 끼어들었다 길래 살짝 긴장했는데 의외로 허접합니다.

국안부란 말에 이반 이바노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쳐졌다.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국방장관하고 이야기를 나눴었지.”

- 뭐 덕분에 우리 입장에선 좀 더 수월하게 협상 테이블에 상대를 앉힐 수 있었고 말입니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됐지? 수왕이 자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나?”

- 보증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서 니콜라예비치 당신에게 전화를 건 거고요.

보증이란 말에 이반 이바노프는 한 차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좋아. 바꿔 줘. 내가 직접 그 자와 이야기하지. 근데, 그 양반 러시아어는 할 줄 아나?”

- 러시아어를 할 줄 알면 제가 이렇게 러시아어로 이야기도 안 했죠. 영어로 대화하시면 됩니다.

“그래. 러시아식 영어와 필리핀식 영어의 대화겠군. 소통이나 잘 되려나 모르겠어.”

- 실수로 선전포고나 하지 마십쇼.

시국은 썰렁한 농담을 뒤로하고 전화를 마르코스에게 넘겼다.

- 방사모로 공화국 국가 이맘 마르코스라고 하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깔끔한 영어에 이반 이바노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반갑소. 러시아 연방 대통령 이반 이바노프라고 하오.”

* * *

마르코스와 이반 이바노프의 대화는 10여 분간 이어졌다.

“그럼 다음에 적절한 장소에서 같이 만납시다.”

- 그렇게 합시다. 어쩐지 우리는 마음이 좀 통할 것 같단 느낌이 드오.

“마찬가지입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통화가 끝났고, 시국은 마르코스로부터 대포폰을 받아 품 안에 넣은 후 입을 열었다.

“이만하면 충분한 보증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만하면 충분하오.”

“그럼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마르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태여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러시아의 국가 승인이 확실한 이상, 향후 중국의 집요한 공작이 확정적인 이상 이 제안을 거부하는 게 멍청한 짓이었다.

“방사모로 공화국의 국가 이맘으로서, 그대의 제안에 찬동하는 바요.”

시국이 씩 웃었다.

마르코스가 곧장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명색이 공화국인 입장에서 국가의 이름을 걸고 참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주시오. 대신 위장조직을 통해 참가하겠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도 한국이나 JH그룹 이름으로 참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러시아나 일본 측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손을 잡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국의 말에 그제야 마르코스의 표정이 풀렸다.

그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서로 뜻이 통한 만큼 어느 정도는 마음을 열어 둬야 할 것 같은데 말이오.”

“저는 얼마든지 열려 있습니다. 항상 오픈 마인드죠.”

마르코스가 시국의 눈을 바라봤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의 눈에선 그 어떠한 흔들림이나 초조함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시국이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보증은 아니었다.

그러나 마르코스는 일단 시국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당장 시국이 거짓을 말한다 한들 그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시국이 무얼 의도하건 관계없이 마르코스에게 있어 최우선 과제는 자신이 다스리는 방사모로 공화국의 국가 승인이었다.

‘러시아가 우리를 인정해 준다면, 그리고 그걸 지렛대로 국제연합에서 우리를 독립 국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인다면, 지금의 난국을 충분히 타개할 수 있다.’

남필리핀이 빌런 천지가 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국가 승인을 받지 못하다 보니 국가 대 국가의 무역이란 게 거의 불가능했다.

방사모로 공화국의 직인이 찍힌 문서로는 통관도 되지 않았고, 심지어 일부 친중 국가에서는 물품이 압류되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자연스럽게 공화국은 밀무역에 의존하게 되었다.

2020년 격변 이후 세계 밀무역 시장은 빌런들이 장악한 상태였기에 자연스럽게 빌런들이 방사모로 공화국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정상 국가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일단 빌런부터 정리해야겠지.’

마르코스가 차를 쭉 넘긴 후 찻잔을 다시 찻물로 채우며 입을 열었다.

“일단 카르텔에 참여하기 위해선 우리 쪽에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오.”

시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요. 저도 뭐 당장 급하게 출범시킬 생각은 없습니다.”

“산개해 있는 빌런들을 하나의 조직 아래에 통합하려면 3개월 정도는 시간을 줘야 하오. 괜찮겠소?”

“얼마든지요.”

마르코스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국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밖에 중국 애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마르코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대답했다.

“염려할 필요 없소. 어차피 파나이와 보홀, 세부의 반군은 별거 아닌 것들이오. 우리 지하드 전사단의 용사들이 나서면 일격에 온몸이 난도질당해 죽을 것들에 불과하지. 더구나 파나이 같은 경우 그대가 중국 놈들을 모두 이블리스의 품으로 보내줬고 말이오.”

“제 말은 여기 모스크를 포위하고 있는 중국 애들을 말한 겁니다.”

“그것도 너무 염려 마시오. 숲이 있는 이상, 그리고 야수들이 있는 이상 저들은 이곳에 한 발짝도 들어서질 못하오. 비가 계속 오는 만큼 화공도 불가능하고 말이오.”

“비가 그친 다음에는?”

“그때쯤이면 지하드 전사단이 이곳으로 집결할 거요. 역으로 저들이 포위당하는 셈이지.”

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가 중국 국안부 요원들의 처리 방법을 물은 것은 진짜로 그 방안이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소문만 무성한 수왕 마르코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듣기 위함이 질문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만족이었다.

‘괜히 전생에 내가 뒤질 때까지 남필리핀의 왕 행세를 한 게 아니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시국이 차를 한 모금 넘긴 후 입을 열었다.

“뭐, 당신의 생각도 좋습니다. 하지만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겠단 생각이 드네요.”

“전략적 승리를 위해선 인내도 필요한 법 아니겠소?”

“맞는 말이긴 하지만 당장 눈앞에 최강의 전술병기가 있으면 구태여 인내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순간 마르코스는 시국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국이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카르텔에 합류해 준 기념으로 제가 깔끔하게 청소해 드리죠.”

* * *

모스크 데 다바오.

그곳을 중심으로 반경 3km에 이르는 펼쳐진 숲 혹은 정글.

그 외곽을 둘러싸고 진을 친 채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는 중국 국가안전부 제0국 요원과 반마르코스계에서 보낸 병사들.

그 모두를 지휘하는 B급 요원 장진밍.

그는 지금 자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단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깻죽지까지 잘려나간 왼팔은 더 이상 그의 인지 능력 속에 있지 않았다.

‘마, 말도 안 돼!’

처음 남쪽 주둔지에서 통신이 두절됐을 때에는 변덕스런 날씨와 그로 인한 통신장비의 결함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다음 동쪽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에 뭔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닐 것이며 곧 관련 보고가 올라오리라 여겼다.

하지만 서쪽 주둔지와도 통신이 두절되자 비로소 장진밍은 무언가 큰 문제가 생겼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실까?』

거대한 악마와 함께 무심한 눈빛으로, 조소 가득한 미소와 함께 장진밍이 속한 북쪽 주둔지를 찾아온 존재.

한국의 A급 헌터 시국.

피 묻은 칼을 든 채 주둔지로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서 장진밍은 이미 남·동·서의 주둔지가 그의 손에 깔끔하게 정리됐음을 깨달았다.

‘도대체 왜?!’

그 물음은 시국이 칼로 그의 왼팔을 썰 때부터, 반마르코스계 병사들과 그와 함께 있던 C급 요원을 시체로 만든 뒤에도, 그리고 지금 그가 부리는 사역마가 시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것을 보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강하게 울리고 채우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가 궁금하지?”

마치 장진밍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시국이 그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장진밍은 뒷걸음질 쳤다.

풀썩-!

“끄윽…….”

장진밍은 돌부리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자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런 그를 향해 시국은 천천히 다가갔다.

턱-!

결국 굵직한 나무에 퇴로가 막힌 장진밍은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시국을 올려다보았다.

“도, 도대체 왜…….”

그의 물음에 시국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 그러는 너희는 왜 여기에 있니?”

“…….”

대답없는 장진밍의 앞에 서서 시국은 쭈그려 앉았다.

그가 칼의 면으로 장진밍의 뺨을 툭툭 쳤다.

‘저우페이링은 아니었네. 하긴 그년이었다면 비가 오건 말건 숲부터 태우고 봤겠지만.’

A급이 된 지금도 전생에 저우페이링이 펼친 꺼지지 않는 불꽃만 떠올리면 소름이 돋는 시국이었다.

가벼운 조소와 함께 그 소름을 날려 버린 시국이 장진밍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진밍.”

“……!”

“항저우 출신이네? B급이고 탱커와 딜러가 섞인 혼합 계열…… 흐음…….”

“어, 어떻게…….”

“그런 게 있어.”

전시안을 펼치자 보이는 장진밍에 관한 모든 정보.

그의 생명력과 마력은 물론이고 보유 스킬과 등급, 심지어 신상정보까지 모든 것을 보이게 해주는 스킬.

‘참 편리한 스킬이야.’

물론 신상정보라 해 봐야 이름과 출생년도, 출신지 정도만이 전부였지만 이런 식으로 상대방의 정신에 타격을 주기엔 충분했다.

공포와 혼란으로 흔들리는 장진밍의 멘탈을 확인한 시국은 곧장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드래곤 피어.’

은은한 파장이 그를 중심으로 뻗어나왔다.

그 파장에 정면으로 노출된 장진밍은 눈을 부릅뜨며 온 몸을 바들바들 떨어댔다.

“이 일을 기획한 놈이 누구지?”

“……끄으으으……”

남은 한 손으로 바닥의 잡초를 움켜쥐며 저항하는 장진밍.

그런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시국이 다시 강한 어조로 물었다.

“이 일을 기획한 놈이 누구지?”

“끄으으…… 즈…… 즈…… 즈랑…… 덩즈랑 부, 부장…….”

덩즈랑.

현 국가안전부 부장이자 차기 정치국 후보위원 후보 중 하나인 중국 정계의 실력자였다.

“말고. 정치국 상무위원 중 누가 기획자이지?”

“……”

장진밍은 대답하지 못했다.

특별히 그의 의지가 강하거나 한 것이 아니었다.

‘모르는 모양이네.’

사실 딱히 무언가 대단한 기밀을 기대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하기야 어차피 중국에는 발에 치이는 게 B급이니…….’

전 세계에 1만 명 정도밖에 없는 B급 초인.

그중 3천 명이 중국 국적을 지닌 요원 혹은 헌터였다.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수의 B급 초인을 보유한 만큼 장진밍 정도 되는 인사가 중국 공산당의 내밀한 정보를 알 턱이 없었다.

“키힛! 키히히힛!”

별안간 장진밍이 침을 흘리며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드래곤 피어의 부작용 중 하나인 백치화였다.

시국은 드래곤 피어를 거두고 사역마를 바라보았다.

여기 오는 사이 100여 명이나 되는 인간들을 먹어 치워놓고도 녀석은 여전히 배가 고픈 듯 보였다.

‘치워.’

시국의 명령에 사역마는 즉각 반응했다.

놈의 아가리가 사방으로 벌어졌고, 그 속에서 굵고 튼실한 혀가 튀어나와 장진밍을 감쌌다.

“키히히히힛!”

사역마의 아가리로 붙들려 들어가면서도 장진밍은 미친 듯이 웃어 댔다.

와그작-!

‘이런 걸 보면 참 정연이도 대단하단 말이야. 저 인간보다 정신력이 좀 더 좋다고 해야겠지? 안 미친 걸 보면?’

드래곤 피어에 당하고도 미치지 않은 여정연을 떠올리며 시국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지. 이미 미친 건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시국은 사역마를 돌려보냈다.

‘대충 여기 일은 마무리됐네.’

비 내리는 대지 위에서, 뒤에서 느껴지는 짐승들의 야생적 흉성을 흘리며 시국은 시선을 동북쪽 하늘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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