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빌런의 인생2회차-98화 (98/200)

098 작업 [the City of Anarch]

2020년,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와 초인이 나타나며 전 세계는 일시적인 혼란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후 2021체제가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의해 성립되면서 대부분의 선진국과 중진국은 무난히 혼란기를 끝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제3세계 및 대다수의 개도국은 혼란을 쉽게 극복하지 못했다.

베트남이나 태국, 인도처럼 그나마 어느 정도 국가적 통일성과 안정성을 갖춘 나라들은 괜찮았다.

하지만 내전이나 분리주의 단체 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통일성을 유지하지 못하던 국가들은 2021체제 성립 이후에도 혼란을 겪어야만 했다.

『위대한 알라께서 우리의 지하드를 이끄신다!』

그중에서도 특히 필리핀은 고질적인 남부 민다나오 섬의 무슬림 반군의 저항이 격변 이후 폭발해 버리며 국가가 남북으로 분열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위대한 이맘 마르코스의 영도하에 우리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은 방사모로 공화국의 재건을 선포한다!』

2023년, B급 드루이드 빌런 마르코스의 영도 하에 민다나오 섬의 이슬람 반군,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은 민다나오 섬과 주변 군도를 접수한 후 방사모로 공화국의 재건을 선포했다.

방사모로 공화국은 민다나오 섬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의 빌런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민다나오 섬은 동남아시아의 고담 시티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빌런들이 들끓는 곳이 됐다.

2024년, 마르코스는 빌런들로 이루어진 지하드 전사단을 이끌고 북진을 감행했다.

그 결과 파나이, 사마르, 세부, 보홀, 네그로스 등 5개 섬이 마르코스의 손아귀에 떨어졌고, 발등에 불이 붙은 필리핀 정부는 중국을 끌어들이며 군사·외교적 해법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이 루손 섬의 필리핀 정부를 돕고 나서자 미국과 일본이 민다나오 섬의 방사모로 공화국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미일과 중국의 대립 속에서 마침내 2025년, 마르코스의 방사모로 공화국과 루손 섬의 필리핀 정부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해안을 따라 남북 군사분계선이 설정됐고, 필리핀과 방사모로 사이의 마스바테 섬은 필리핀에 속하지만 사실상 독립적인 지위를 구가하는 자치령이 돼 남북 연락소 역할을 하게 됐다.

북필리핀과 남필리핀으로 나뉜 필리핀의 두 공화국은 서로를 불법 무장 단체로 규정하며 끊임없이 대립했다.

그 대립은 역설적으로 서로의 체제를 더 공고화시켜 주고 지배계급의 지배력을 강화시켜 주는, 지배층 입장에서는 순기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수왕(the King of Animals) 마르코스는 이상주의자입니다. 그가 집권한 후로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의 노선에 서구 녹색당이나 주장하는 환경주의가 추가됐고, 또 실제로 마르코스가 지배하는 영역에는 대대적인 녹화사업이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다른 무슬림 반군 세력과는 달리 서방 세계와도 충분히 대화가 되는 상대란 의미죠.』

전직 미 국무부 차관보는 그런 식으로 언론에 인터뷰를 하며 마르코스를 마치 친환경 녹색주의자인 양 띄워 주었다.

『중국에 기울어진 북필리핀보단 그래도 비교적 서방 세계의 이념 중 하나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남필리핀이 정상 국가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미국은 전직 관료의 입을 통해 은근하게 남필리핀을 정통 정부로 인정한다는 메시지를 알리곤 했다.

하지만 마르코스는 엄연히 국제초인협회가 지명수배한 빌런이었고, 그를 중심으로 뭉친 빌런들에 의해 남필리핀이 동남아 마력석 밀거래의 중심지가 된 만큼 공개적으로 미국이 남필리핀을 국가로 인정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다만 방사모로 관계법 등의 제정을 통해 실질적인 국가 대우를 해주며 중국의 남서태평양 진출을 막는 방파제로 만들 뿐이었다.

* * *

마스바테 섬은 북필리핀에 속한 하나의 자치령으로서 세계에서 유래 없는 자유도를 자랑하는 장소가 됐으며, the City of Anarch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자유와 방종 간의 경계가 사라진 모습을 보였다.

“…….”

마스바테 자치령의 수도, 마스바테 시티의 유흥가.

라스베가스 같은 화려함도, 마카오 같은 웅장함도 없지만 특유의 퇴폐적인 느낌과 마치 90년대를 연상시키는 풍경이 전 세계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곳.

헐벗은 매춘부들의 유혹과 건들거리는 삐끼들의 호객 행위로 시끄러운 곳.

“……”

그곳에 서서 시국은 한동안 추억에 잠긴 눈으로 거리를 바라보았다.

‘옛날 생각나네.’

2017년 5월, 가리봉동 오락실 골목이 떠오르는 길목에서 그렇게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시국은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회상에서 깨어났다.

“안내해.”

“네, 알겠습니다.”

사카모토가 앞장서서 걸어 나갔고, 시국은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4$! 4$! Come on! Come on!”

매춘부의 유혹과 삐기의 호객 행위를 지나쳐, 북적이는 인파를 뚫고, 간간이 보이는 소매치기의 손목을 작살내 가며 거리 안쪽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이내 제법 큰 규모의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가 에스페란사 유니온의 본부이자 그들이 운영하는 도박장입니다.”

마스바테 자치령의 갱단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만큼 그들이 본부로 쓰는 건물은 주변 유흥가 건물들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1층부터 4층까지가 도박장이고 5층부터 7층까지는 숙박시설이며 8층부터 10층까지가 조직원들이 쓰는 공간입니다.”

사카모토의 설명을 들으며 시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지.”

“네.”

그대로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 입구에 들어섰다.

입구를 막고 서 있던 삐끼가 금속 탐지기를 두 사람에게 갖다 댔다.

아무런 반응도 나오지 않자 삐끼는 둘을 들여보냈다.

“흐음…….”

커다란 원형 분수대를 중심으로 주르르 배치된 테이블에선 온갖 종류의 도박 게임이 펼쳐지고 있었다.

룰렛부터 포커는 물론 심지어 섰다까지.

“섰다?”

백인과 황인, 흑인이 섰다 치는 장면을 보며 시국이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을 보며 사카모토가 부연 설명을 했다.

“이곳에 한국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특히 돈 많고 나이든 사람들이 주 고객인데 그들이 섰다를 자주 쳐서 저렇게 정식 게임 종목으로 선정이 됐습니다.”

“그래?”

잠시 흑백황 3인이 섰다 치는 모습을 보던 시국이 사카모토를 바라보며 물었다.

“사카모토 씨는 섰다 칠 줄 알아?”

“아내한테 배워서 대충 룰은 알고 있습니다.”

“아, 맞다. 사카모토 씨 부인 한국인이었지? 그럼 저쪽으로 가지. 포커보단 섰다가 나도 익숙하니까.”

“네.”

시국과 사카모토는 1만 달러치 칩을 구매해 섰다판으로 가 앉았다.

‘5달러와 쪽지는 지금 가능하단 보장이 없다. 그렇다면 결국 사카모토의 말대로 눈에 띌 정도로 돈을 따내는 수밖에 없겠지.’

패가 돌아가며 게임이 시작됐다.

‘전투감각.’

그리고 게임이 시작됨과 동시에 시국은 전투감각 스킬을 활성화시켰다.

시각과 청각이 극대화되며 판에 앉은 자들의 맥박과 호흡은 물론 그들의 눈동자에 비친 패 종류까지도 순식간에 파악이 가능했다.

“Die.”

“Call.”

“Half.”

“Quater.”

그랬기에 시국은 자기 이익을 극대화시키는 베팅만 할 수 있었고 그것은 사카모토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국과 사카모토는 서로에게 돈을 몰아주는 식으로 순식간에 흑인과 백인, 황인의 돈을 모두 흡수해 그들이 자리를 뜨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몇 차례 반복되자 1층의 도박꾼들의 시선이 점차 섰다판에 쏠리기 시작했다.

“저 인간들 뭐야?”

“얼마를 딴 거야?”

“아까 보니까 잃은 적이 거의 없던데?”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커질수록 두 사람에게 도전하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그중에는 딱 봐도 정체를 감춘 초인-빌런인지 여행 온 요원이나 헌터인지 모를 자들이 섞여 있었지만 역시 그들도 시국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국과 사카모토가 최초의 70배에 달하는 돈을 땄을 무렵, 한 남자가 두 사람에게 다가와 정중히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유니온 카지노의 매니저 스티브라고 합니다.”

깔끔한 정장 차림의 매니저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은근슬쩍 자신의 팔목에 새겨진 문신을 드러내 보였다.

그리고 그 문신을 보는 순간 시국과 사카모토가 순간적으로 서로를 쳐다보며 씩 웃었다.

“잠시 사장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시국이 사카모토에게 슬쩍 텃짓을 했다.

사카모토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곤 매니저를 바라보며 영어로 이야기했다.

“사장이 왜 우리 같은 사람을 보자는 겁니까?”

“저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그쪽 사장이 보자 한다고 우리가 꼭 가야 합니까?”

“가시는 게 신상에 이로우실 겁니다.”

매니저는 협박성 메시지를 아주 공손하게 잘 전달했다.

사카모토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만나면 나쁠 건 없겠지. 갑시다. 앞장서십시오.”

시국도 사카모토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니저는 가볍게 고개 숙인 후 두 사람을 이끌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대로 10층까지 올라간 두 사람.

“저 문을 지나시면 사장님이 계실 겁니다.”

매니저는 그렇게 둘을 내려준 후 엘리베이터를 닫고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시국과 사카모토는 서로를 바라보며 일본어로 대화했다.

“느껴지나?”

“네, 느껴집니다.”

“못해도 C급은 될 것 같은데…… 저 사람이 박쥐인가?”

“박쥐는 D급입니다. 애초에 전령의 역할이었던 만큼 전투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셈이지요.”

“그럼 누굴까? 에스페란사 유니온의 두목은 빌런이 아니라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 들어가 보면 알겠지.”

대화를 끝낸 후 두 사람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는 아바야를 입고 얼굴에 니캅을 둘러 눈만 내놓은 무슬림 여성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민소매 티셔츠를 입어 상반신 문신이 다 드러나는 베트남 계통 동양인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을 보며 사카모토가 시국에게 귓속말을 했다.

“제가 알던 보스가 아닙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동양인이 강한 억양의 영어로 이야기했다.

“뭘 그리 귓속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 모습을 보며 사카모토가 입을 열었다.

“왜 부르신 겁니까. 용건이라도 있으시다면 빨리 이야기를……”

사카모토의 말을 동양인이 잘라먹었다.

“어디서 보낸 거지?”

사카모토는 당황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반응했다.

“보내긴 뭘 보냈단 겁니까?”

“그렇게 대놓고 마력을 뿜어 대며 사람을 자극해 놓고 발뺌할 건가?”

동양인의 직설적인 발언에 사카모토는 잠시 시국을 바라보았다.

시국이 살짝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박쥐 어디 있어?”

시국의 말에 순간 동양인이 움찔했다. 그리고 시국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박쥐라니? 여긴 도박장이지 동굴이 아니야.”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돌리려는 동양인.

시국이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시끄럽고, 박쥐 어디 있어?”

“말했을 텐데? 박쥐는 동굴에서 찾…….”

그 순간, 시국이 자리를 박차고 돌진했다.

“커헉-!”

그리고 시국은 니캅을 쓰고 있던 무슬림 여성의 면상을 발로 걷어찼다.

콰당탕-!

여성은 그대로 뒤로 날아가 장식장에 부딪히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머리와 몸 위로 장식장에 전시돼 있던 고급 잔과 술들이 떨어져 내리며 깨졌다.

시국이 다시 시선을 동양인에게로 돌렸다.

“박쥐 어디 있어?”

순식간에 C급 빌런을 전투불능 상태로 만든 시국의 무력에 동양인은 바들바들 떨며 침을 꼴깍 삼켰다.

시국이 천천히 동양인에게 다가갔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박쥐 어디 있어?”

시국이 뿜어대는 위압감에 동양인은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 다, 당신들은 어, 어디……”

“이 새끼가 정신을 못 차리네?”

뻑-!

그대로 시국은 동양인의 가슴팍을 발로 찼다.

“끄억!”

동양인은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가며 바닥에 누웠다.

“꺽-!”

시국은 동양인의 목을 밟고 선글라스 너머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박쥐 부를래? 아니면 그냥 이대로 뒤질래?”

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밟으며 발에 힘을 주는 시국.

동양인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부, 부, 부르겠습니……다…….”

그제야 시국은 발을 떼 놓았다.

“진즉에 그랬어야지.”

그렇게 이야기하며 시국은 사카모토를 바라보며 일본어로 이야기했다.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는 것도 좋고 대화를 통해 분위기 파악하는 것도 좋지만 이런 상황에선 폭력이 제일 나은 처방이야. 부두목이라면서 그런 것도 모르나? 미노리는 잘 아는 것 같던데.”

그 말에 사카모토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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