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동경 [Lover]
2024년 6월 1일.
도쿄타워와 그 주변이 훤히 보이는 프라이드 호텔 스위트룸.
그해 초, 당시 만 24세에 불과한 나이에 일본 열도의 야쿠자 조직을 통합하여 하카이야마구치를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식 위계 구조를 구축한 쿠로카와 미노리는 일본 8대 야쿠자 조직의 두목들을 앉혀 놓고 기강 다지기를 하고 있었다.
같은 C급 빌런이자 그녀의 충실한 수하이기도 했던 사카모토를 뒤에 세워 둔 채 다소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회합은 진행되고 있었다.
『앞으로 적어도 일본에서만큼은 제가 모르는 폭력조직이나 빌런들의 범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명령은 저에게서 나오고, 모든 보고도 저에게 올라올 겁니다.』
24세의 젊은 미녀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이 지긋한 8대 야쿠자 두목들을 위협했다.
통합 과정에서 그녀가 보여 준 가공할 무력과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성에 기가 눌려 있던 두목들은 그 어떠한 반론조차 제기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의 훈시를 듣고 있어야만 했다.
『그럼 당신만 무너뜨리면 일본의 범죄단체는 내 소유가 되는 거야?』
그리고 그때, 시국이 스위트룸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히 시국과 그녀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그리고 결과는 아주 당연하게도 시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결정해. 내 명령에 복종하며 일본에서 종주권을 행사하든가 아니면 명예롭게 할복이라도 하시든가.』
D급 빌런 3명이 포함된 8인의 두목들을 전투불능 상태로 만들어 놓고 쿠로카와 미노리마저 손쉽게 제압한 후 시국은 그녀에게 항복을 종용했다.
명예로운 할복을 택하기엔 그녀의 정신세계는 딱히 소위 말하는 무사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따르겠어요. 당신을.』
그 자리에서 그녀는 8인의 두목들과 함께 시국에게 절하며 복종을 맹세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장에 살고자 택한 행동이었을 뿐, 진심에서 우러나온 행위는 아니었다.
시국과 종종 연락을 하고 그의 명령을 받을 때마다 그녀는 언젠가 그의 뒤통수를 치고 그날의 수치를 갚아 줄 것이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지만 그가 북한과 러시아, 일본 그리고 한국을 연결하는 마력석 밀매 루트를 개척하고 거기서 막대한 수입을 거둬 그녀에게 배당하자 복수심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차 시국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복수의 대상에서 일 잘하는 상전으로, 매력적인 인간으로, 안기고 싶은 남자로 변해 갔다.
그리고 2026년 2월 13일.
그녀의 26번째 생일날.
마침내 쿠로카와 미노리는 시국에게 안기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시국을 윗사람이자 애인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 * *
2031년 2월 12일 23시.
화려한 도쿄의 야경을 뒤로한 채 어둠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항만.
그 구석에, 유일하게 불 켜진 냉동창고.
“끄아아아악-!”
십수 명의 정장 입은 사내들과 쿠로카와 미노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 남자에 대한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고 있었다.
푹-!
“끄으으아아악-!”
손등을 찌른 송곳이 손바닥을 뚫고 나오자 중년 남성은 온몸을 비틀며 비명을 내질렀다.
“야마오카 씨. 계속 버텨 봐야 무의미합니다. 지금이라면 당당한 8대 보스의 일인으로서 명예롭게 가실 수 있으십니다.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신다면 그 명예마저도 사라질 겁니다.”
하카이야마구치의 부두목 사카모토의 말에 중년 남성, 야마오카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일본의 야쿠자 피라미드 체계에서 정점에 위치한 하카이야마구치 바로 아래 층계에 있는 8대 조직.
그중에서도 도쿄를 기반으로 가장 큰 세력을 유지하던 도쿄미나미구치의 보스 야마오카는 원한 가득한 눈으로 쿠로카와 미노리를 노려보았다.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앞뒤로 흔들던 쿠로카와 미노리는 그 시선을 받고도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 개 같은 년! 조센징 밑에서 개처럼 좋다고 아양 떤 암퇘지년!”
야마오카의 입에서 험악한 말이 나오자 사카모토를 비롯해 직접 고문을 하던 조직원들이 아연실색했다.
“이 미친놈이!”
뻑-!
조직원 하나가 야마오카의 입을 발로 걷어찼다.
“커헉!”
야마오카의 상체가 뒤로 넘어갔다.
바닥에 누운 그를 조직원들이 무자비하게 밟기 시작했다.
“끄억! 커헉!”
손에 송곳을 꽂은 채 야마오카는 한동안 감정 실린 폭력에 노출됐다.
“그만.”
그리고 그 폭력은 쿠로카와 미노리의 짧은 명령이 있고 나서야 끝이났다.
조직원들이 다시 야마오카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입술이 부르트고 치아 몇 개가 날아간 채로 야마오카는 고통에 신음하며 피를 뱉어냈다.
그를 바라보며 쿠로카와 미노리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넌 죽어. 감히 외부 조직을 끌어들여 우리의 위계질서를 파괴하려 한 죄는 그 어떠한 것으로도 참회할 수 없으니까.”
“…….”
“만약 네가 여기서 그 외부 조직의 정체를 이야기한다면 최소한 마지막 가는 길, 명예롭게 해 줄 순 있어. 하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 이렇게 버틴다면 그 명예마저도 함께 도쿄만에 가라앉겠지.”
한동안 야마오카는 부들거리며 그녀의 차디찬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씹어뱉듯 말했다.
“조센징 서방한테나 물어봐.”
뻑-!
사카모토가 발로 야마오카의 뒤통수를 걷어찼다.
“크크크크크…….”
야마오카는 바닥에 이마를 처박은 채 실성한 양 웃어 댔다.
그런 그를 싸늘한 눈길로 내려다보던 쿠로카와 미노리는 사카모토를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끄아아아아아악-!”
야마오카의 처절한 비명 소리를 뒤로하고 그녀는 겉옷을 살짝 걸친 채 창고 밖으로 나갔다.
‘눈이네.’
선혈이 낭자한 창고와 달리 바깥에는 흰 눈이 내려와 땅에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잠시 그녀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그것을 쓸쓸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비서가 다가와 그녀에게 우산을 씌우려 했지만 외려 그녀가 만류했다.
그렇게 한동안 쓸쓸하게 눈을 맞던 쿠로카와 미노리는 이내 표정을 풀고 차에 올라탔다.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무실로 가시겠습니까?”
조수석에 탄 비서의 물음에 그녀는 무심한 얼굴로 “집”이라고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차는 조심스럽게 눈 내린 거리를 내달렸다.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쿠로카와 미노리는 도심의 야경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행복한 표정으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는 연인, 양쪽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행복한 미소를 보이며 걸어가는 부부.
소박한 소시민의 행복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눈길에 정체된 도로에서 거북이 주행을 하는 와중에 1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사이 사카모토로부터 야마오카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 혀를 깨물었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쿠로카와 미노리는 그를 죽이고 바다에 빠뜨리란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그녀가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이미 2월 13일 자정을 넘긴 뒤였다.
“들어가십시오. 아, 그리고 생일 축하합니다.”
비서의 축하인사에 쿠로카와 미노리는 그녀의 어깨를 한 차례 툭툭 쳐 준 후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소리 없이 빠르게 엘리베이터는 상승했다.
곧 그녀가 사는 50층에서 엘리베이터는 멈춰섰고, 그녀는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퇴근이 늦네?”
현관에서 막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던 쿠로카와 미노리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하긴 눈길에 도로가 막혔을 테니……!”
그대로 쿠로카와 미노리는 집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사내, 시국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시국은 가만히 그녀를 마주 안아 줄 뿐이었다.
* * *
폭풍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모두가 잠든 2월 13일 새벽.
시국과 쿠로카와 미노리는 킹 사이즈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야마오카가?”
“네. 외부 조력자가 분명 있는 것 같은데 결국 실토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어요.”
“흐음…… 외부 세력이라……. 짐작 가는 놈들은 없고?”
“최근에 일본으로 중국계 빌런들이 대거 입국했다는 정보가 있기는 해요. 그것 때문에 초인협회랑 경시청이 골머리를 앓고 있기도 하구요. 우리한테까지 협조를 요청할 정도니까요.”
“흐음…… 중국이라…….”
“물론 야마오카의 배후에 중국계 빌런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다만 지금으로선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거예요.”
시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채 쿠로카와 미노리가 물었다.
“그나저나 러시아에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됐나요?”
“크렘린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어.”
“정말요?”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시국을 바라봤다.
시국은 가만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몇 가지 쓸데없는 단서가 붙기는 했는데 핵심만 두고 이야기하자면 확실히 우리 쪽에 지분을 태우기로 했어. 덕분에 그 동물애호가 놈을 끌어들이기가 한층 수월해졌지.”
동물애호가란 말에 쿠로카와 미노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수왕 마르코스를 그렇게 부르는 건 당신이 유일할 거예요.”
“짐승의 왕이란 호칭보단 동물애호가란 호칭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본인도 더 좋아할 거고.”
“그만 웃겨요.”
쿠로카와 미노리가 찰싹 소리가 나게 시국의 가슴팍을 쳤고, 시국은 그저 기분 좋게 웃으며 그녀를 한 팔로 끌어 안아주었다.
“러시아 대통령의 지분은 얼마나 챙겨 줄 생각이에요?”
“뭐, 계산기 두드려 봐야 알겠지만 못해도 10%는 챙겨 줘야겠지. 외교적 무리수를 각오하고 우리를 도와주는 건데 그 정도는 챙겨 줘야 하지 않겠어?”
시국의 말에 쿠로카와 미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국의 계획, 아시아 빌런 카르텔 결성을 위해 강대국의 외교적 역량까지 동원해 배후 지원을 해주는 사람에게 10%의 지분은 결코 많은 게 아니었다.
“마르코스하고 협상하려면 어려움이 많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시국은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가 살짝 정색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그는 대단히 자존심이 강한 이상주의자니까요. 그런 사람에겐 단순히 물질적 보상만 이야기한다고 일이 성사되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시국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이상주의자라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국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상에 절대 권력을 쥐고도 이상주의자로 남는 인간이 있을까?”
“…….”
자기 말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는 쿠로카와 미노리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한 시국은 다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남필리핀의 동물애호가가 우리에게 합류하면 일단 아시아 지역에서의 카르텔 형성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게 되는 거야. 극동 러시아와 북한, 한국, 일본 그리고 남필리핀을 잇는 라인이 구축되면 곧 주변의 해양국가들은 자연히 흡수될 거야.”
시국의 입맞춤에 살짝 홍조를 띤 쿠로카와 미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미 마르코스는 인도네시아와 말라카 해협 쪽 빌런들로부터 종주권을 인정받은 상태니까 그 사람만 합류한다면 해안 중심으로 카르텔이 형성되겠죠.”
“그래. 그러고 나면 대륙 쪽에도 진지를 구축할 수 있게 될 거야.”
“중국…… 과연 가능할까요? 인도차이나 반도 쪽 국가에다 먼저 교두보를 마련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시국이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어차피 그 동네는 중국만 장악하면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오게 돼 있어. 지금은 힘을 집중할 때지 분산할 때는 아니지 않을까?”
“그건 그래요.”
시국이 다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지금은 마르코스와의 교섭에나 집중하면 돼.”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뭐, 일단 말로 설득을 해야지. 근데 그게 안 통하면…….”
“안 통하면?”
시국이 쿠로카와 미노리를 향해 웃어보이며 말을 마무리했다.
“뭐, 그땐 빌런의 방식으로 교섭을 해야겠지?”
그 말에 쿠로카와 미노리도 웃어 보였다.
“마르코스와 접촉하려면 마스바테에서 박쥐를 찾아야 해요.”
“알아. 에스페란사 유니온이던가? 그 갱단하고 거래한다는 남필리핀 관료, 맞지?”
“관료로 추정되는 사람이죠. 아무튼 그 사람과 접촉하지 않으면 남필리핀 정부와의 접선은 불가능하다 보면 돼요. 일단 그 부분은 저희 쪽에서 한번 알아볼게요.”
“그렇게 해 주면 고맙지.”
그렇게 일 이야기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쿠로카와 미노리가 시국의 가슴과 배꼽 사이를 손가락 끝으로 간질거리며 말했다.
“필리핀으로는 언제 가실 생각이신가요?”
“한 4월에서 5월 정도로 예상하고 있어. 아무래도 한국에서도 처리해야 할 일들이 좀 많아서 말이지.”
“그럼 당분간 일본에는 오기 힘드시겠어요?”
“그렇겠지.”
“그럼 오늘 이후로 한동안 저와 같이 잘 일도 없겠네요?”
“그래도 종종 전화할 테니까.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
시국의 말에 쿠로카와 미노리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아직 해 뜨려면 시간이 좀 많이 남은 것 같지 않나요?”
그녀의 눈에 피어오른 욕망을 바라보며 시국은 씩 웃었다. 그리고 그는 진한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