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전복 [Overthrow]
“어서 오십시오, 협회장님.”
시국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구성국이 그의 손을 맞잡아 악수한 후 그의 안내를 따라 청담동 펜트하우스 안으로 들어섰다.
“이거, 갑작스럽게 급한 일로 오신다고 해서 미처 제대로 대접할 준비는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갑작스럽게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불쑥 뵙자고 해 죄송합니다.”
“하하. 일단 들어오십시오.”
시국과 함께 부엌으로 들어선 구성국.
집주인은 손님에게 원탁에 앉을 것을 권유했다.
손님이 원탁에 앉자 집주인은 홍차를 그의 잔과 자기 잔에 따른 후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갑자기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겁니까? 이 시간에 저와 만나야 할 급한 일이란 게?”
구성국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그저 차를 한 모금 들이켜 그 향을 음미할 뿐이었다.
시국은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구성국을 바라볼 뿐이었다.
차 한 모금을 넘긴 후 구성국은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향이 일품입니다. 개인적으로 홍차 마실 일이 많아서 이것저것 많이 맛봤는데 그중에서도 탑에 들 만한 수준입니다.”
급한 일이 있답시고 찾아와서 뜬금없이 차향 타령이나 하는 모습에 황당할 법도 하건만 시국은 그저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협회장이라곤 하지만 경제적으론 그리 여유롭진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고급 차 같은 경우 얻어 마실 때를 제외하면 자주 접하진 못합니다.”
“종종 찾아오십시오. 좋은 차는 많으니까. 뭐, 오신 김에 몇 가지 챙겨 드릴 수도 있고요.”
시국의 말에 구성국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차를 한 모금 더 넘긴 후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시국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돈도, 명예도, 그리고 젊음도. 그 모든 것을 이시국 헌터는 가지고 있습니다.”
시국은 가볍게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구성국의 말이 이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소란을 멈춰 주십시오.”
구성국의 말에도 시국은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시국은 차를 한 모금 넘긴 후 찻잔을 든 채 구성국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정국의 혼란을 수습하는 건 어디까지나 정치인들의 몫 아니겠습니까? 뭐, 전국헌터총연합회 명의의 대국민 호소문 발표라도 바라신다면 그 정도는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태연하게 이야기하는 시국을 바라보며 구성국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JH그룹에서 권정용 의원을 밀어주고 있다는 사실, 이미 현웅렬 대통령도 알고 있습니다.”
“뭐, 다른 재벌들처럼 이제 우리도 여의도에 라인 하나는 놔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
“뭐, 아직까지 권 의원님이 우리 쪽 청탁을 들어준 건 없습니다, 하하. 당선되고 나서 딱히 청탁을 들어줄 여유가 없으셨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요.”
능청떠는 시국의 모습에 순간 구성국은 혼란을 느꼈다.
‘……대통령이 잘못 짚은 건가?’
시국은 너무도 당당했다. 그 태도가 구성국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저것도 기만인 건가? 이제 겨우 스물다섯 청년이, 이 정도 노회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구성국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들어 차를 쭉 들이켰다.
시국이 그의 빈 잔을 채워 주었다.
잠시 떨리는 눈으로 시국을 바라보던 구성국은 심호흡을 한 후 다시 입을 열었다.
“현웅렬 대통령은 이시국 헌터가 이번 사태의 배후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상대는 A급 헌터다.
거기다 20대 초반부터 JH그룹 부회장이자 종합기획실장으로서 온갖 불법적인 일을 도맡아 했던 인간이다.
그런 사람이 작정하고 시치미를 떼면 진솔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런 판단이 섰기에 구성국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구성국은 가만히 시국의 표정을 살폈다.
시국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을 뿐, 별반 표정의 변화를 보이진 않았다.
시국이 차 한 모금을 넘긴 후 느긋한 어조로 구성국에게 물었다.
“협회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다소 애매한 시국의 반응에 순간 구성국은 또 흔들렸다.
잠시 입을 다물고 시국을 바라보던 구성국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는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이번 사태의 배후 세력이라면 설득이라도 하려고 이 시간에 홀로 찾아오신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헛걸음하신 겁니다.”
시국의 말에 순간 구성국의 동공이 한 차례 지진이라도 만난 양 크게 떨렸다.
“대통령도, 협회장님도 이번 소요 사태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
“가서 대통령님한테 전해 주십시오. 엉뚱한 헌터를 의심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시위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입니다.”
“…….”
“이번 사태의 배후 세력은 딱 하나입니다. 이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
시국이 차를 쭉 들이켠 후 찻잔을 다시 채우며 말을 마무리했다.
“협회장님께서 진실로 이 나라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신다면 절 찾아올 시간에 어떻게든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에게 이 사태를 수습할 대책을 내놓으라고 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할 말 다 했다는 듯 시국은 구성국에게서 시선을 떼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켜 그 향을 음미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구성국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 * *
2029년 11월 4일 전국에 경비계엄이 선포되며 일각에선 사태의 진정을 기대하는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경비계엄 선포 후 2주일이 지난 11월 18일에도 여전히 주요 도시에선 무장 시위대와 계엄군 간의 총격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못 살겠다! 갈아 보자!”
“87년 체제를 종식시키자!”
“7공화국은 국민의 손으로!”
이제는 인셀 폭도와 구별이 되지 않는 무장 시위대의 구호는 단순히 특정 정권의 타도를 넘어 대한민국의 체제 그 자체의 변혁에 대한 요구로 바뀌었다.
구호가 바뀌며 투쟁 방식도 변했다.
“시청을 점거해!”
“지역 방송국부터 장악해!”
“군부대로 진입하란 말이야!”
전국적으로 조직화된 무장 시위대는 체계적으로 관공서와 방송국 그리고 지역 사단에 대한 점령 계획을 세웠고 그것을 이루어 나갔다.
무장 시위대의 거의 전부가 능숙하게 화기를 다룰 줄 아는 예비군 혹은 민방위였던 만큼, 한번 구심점이 생기고 조직화가 되자 그 능률은 엄청나게 높아졌다.
“우린 국민을 향해 총구를 들이밀고자 군인이 된 게 아닙니다.”
거기다 지방 사단을 중심으로 일선 지휘관들의 항명 사태가 이어지기 시작했고, 그 틈을 타 무장 시위대는 손쉽게 지역 사단본부까지 접수했다.
“우리의 목표는 현웅렬과 그 잔당들을 처단하고 우리 손으로 직접 제헌의회를 다시 만들어 제2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군인 장병 여러분들과 우리는 모두 한 동지입니다.”
각 지역에서 무장 시위대를 이끄는 지도자들은 사단본부를 접수한 후 군 장병들마저도 시위대에 합류시키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순식간에 육군 53사단, 50사단, 39사단, 31사단, 35사단이 시위대에 합류했고, 32사단과 37사단은 부대 문을 걸어 잠그고 시위대와의 충돌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반란군 새끼들! 공군은 뭐해! 당장 그 새끼들 사단본부 폭격하라 그래! 해군은 뭐 하고 있어! 미사일 뒀다가 부식이라도 바꿔 먹을 거야!”
지역방위사단의 그러한 행태에 분노한 현웅렬은 공군과 해군까지 동원하려 했다.
“공군은 동북아연합사령부의 지시가 있기 전까진 별도의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제주도 해상에서 중국 해군과 일본 해자대의 움직임이 심상찮습니다. 따로 병력을 뺄 여력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공군은 동북아연합사령부, 즉 미군과의 협정을 이유로, 해군은 안보를 이유로 현웅령의 명령을 거부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에 불과했고, 현웅렬 또한 그것을 알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전방 사단 빼! 어차피 북한 새끼들 둘로 쪼개져서 뭐 내려오지도 못할 거잖아! 썅, 어차피 미군이 평택에 처박혀 있는데 어떻게 내려올 거야!”
결국 현웅렬은 육군 전방 사단을 서울로 호출하기까지 했다.
“최근 강원도 방면 군사분계선에서 동북한군의 움직임이 심상찮습니다. 경기도 쪽 군사분계선의 경우 따로 서북한군의 움직임이 감지되진 않고 있지만, 주말마다 해안포문이 1시간 정도씩 열리는 실정인 만큼 경계를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전방 사단을 빼는 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전방 사단도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현웅렬은 머리끝까지 분노했지만 뾰족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 * *
2029년 9월부터 시작된 한국의 혼란이 내전으로까지 비화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는 증권거래소 폐쇄나 경제활동 중단 같은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그런 조치를 취했다간 우리가 불안하다는 메시지만 대외적으로 던지게 될 뿐이야. 얼마가 떨어지건 상관없어. 그냥 열어 두게 해! 어디까지나 이건 불법폭력시위이자 폭동에 불과해. 내전이 아니란 말이야!”
그것은 대내외적으로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려는 현웅렬의 고집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의외로 한국의 증권시장은, 하락하기는 했지만 급락하진 않았다.
초반에 잠깐 코스피가 1700대로 주저앉았을 뿐, 이후로 사태가 내전 직전까지 가고 있었음에도 코스피 지수는 1700에서 1800 사이를 유지했다.
“거 봐! 국민 대다수는 날 아직도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경제에 타격이 그리 크지 않은 거잖아. 안 그래?”
현웅렬은 그 지표를 그런 식으로 해석했다.
하지만 해외 전문가들의 의견은 달랐다.
“한국 경제는 근본적으로 이런 정치적 소요에 쉽게 그 잠재력이 깎일 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정치적 부담으로 어느 정도 하향 조정은 있겠지만 곧 정국이 안정되면 다시 주가는 회복될 거라 전망됩니다.”
월가의 증권 애널리스트들은 입을 모아 한국 경제가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전망했다.
“내전에 준하는 상황이라곤 하지만 제3세계의 내전과 비교하면 내전보다는 차라리 국지적 소요사태라는 말이 더 정확할 겁니다. 생각만큼 사망자가 많이 나오지도 않았고, 지방정부의 관공서가 점령당한 걸 제외하면 주요 기간 시설이나 기업의 자산에 대한 약탈도 없었습니다.”
“한국인들의 시민 의식은 높은 수준입니다. 제3세계 반군처럼 국가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릴 정도의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현웅렬 정권에 대한 시민저항의 성격이 강한 만큼 현웅렬 정권만 무너지면 곧 한국 사회는 정상 궤도에 오를 것입니다.”
미국의 한국 전문가, 전직 국무부 고위 관료들도 하나같이 곧 한국이 회복할 것이란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빠른 시일 내에 이 혼란이 수습되길 바라며 우리부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주요 재벌 대기업 회장들과 이사들은 앞다퉈 임금반납을 실천하며 고통 분담에 대한 의지를 표현했다.
“핵심은 곧 이 사태가 종식될 거란 믿음입니다. 만약 이 믿음이 배신당하고 현웅렬 대통령이 버틴다면 결국 한국 경제는 침몰하고 말 겁니다.”
“어차피 현웅렬 대통령의 임기는 2032년 5월까지입니다. 이제 3년도 남지 않았단 말입니다. 현명한 지도자라면 벌써 결단을 하고도 남았을 시점이지요.”
주한 미국 대사와 러시아 대사의 언론 인터뷰 발언은 청와대로부터 정제되지 않은 항의를 불러일으켰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2029년 12월 5일.
계엄군의 핵심이던 수도방위사령부마저 현웅렬 정권에 등을 돌리며 경기 남부에 진을 치고 있던 무장 시위대-국민저항군이 서울로 진입했다.
지역방위사단과 하나가 돼 전차와 장갑차까지 끌고 서울로 들어온 국민저항군은 그 어떠한 제지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국회의사당과 정부종합청사를 장악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서울로 진입한 무장 시위대가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을 점거했을 무렵, 시위대는 자연스럽게 애국가를 불렀다.
일부는 감정이 벅차올랐는지 눈물을 흘렸고, 일부는 애써 눈물을 감추며 애국가를 4절까지 완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