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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빌런의 인생2회차-84화 (84/200)

084 실행 [Activity]

발단은 정말로 사소한 것이었다.

『호서해운 상무 김 모 씨,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

지역 일간지에 실린 단신 하나가 모든 것의 시발점이 되리라곤 극소수의 설계자들을 제외하곤 아무도 몰랐다.

『어, 나 2차장이야. 그래. 거 대충 기자들 입 좀 다물게 하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해.』

처음 국정원 제2차장의, 호서해운 김 상무의 구명 활동이 담긴 녹취록이 공개됐을 때까지만 해도, 그저 사람들은 고위 관료의 비리 사건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호서해운 김 상무를 시작으로 국정원 제2차장, 인천서부경찰서 서장 그리고 인천지방경찰청 청장 등이 줄줄이 엮여 나오기 시작하면서 비리 스케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인천지방경찰청 임경호 청장과 인천서부경찰서 이창주 서장 그리고 호서해운 김상엽 상무가 모두 국정원에 한때 몸담았던 사실이 밝혀지며 파장이 커지고 있습니다.』

10년 전 국정원에 파견된 전력이 있던 인천지방경찰청장과 인천서부경찰서장, 그리고 5년 전 국정원에서 퇴직하고 호서해운 상무로 간 김 상무.

비리 연루자들의 연결 고리가 국정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사건은 단순 관료 부패에서 국정원 카르텔의 스캔들로 비화됐다.

이미 이 시점에서 사람들은 심상찮은 무언가가 있음을 하나둘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그래도 국정원 제2차장과 인천지방경찰청장 선에서 꼬리자르기를 시도할 수 있었다.

문제는 몸통과 꼬리 모두 외부의 설계자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 * *

청와대 안가.

늘 모호한 표정 혹은 웃는 얼굴 혹은 무심한 듯 평온한 안색으로 사람을 대하던 현웅렬이 자신의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국정원장과 국정원 외곽조직 중 하나인 호서해운의 회장은 사색이 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어떻게 그게 유출이 된 걸까? 응?”

현웅렬의 시선이 국정원장에게로 향했다.

“이봐, 주철이. 네가 이야기해 봐. 응? 거긴 안전하다며? 응? CIA가 와도 거긴 못 턴다며?”

현웅렬의 말에 국정원장 최주철은 그저 방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용서를 구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각하!”

“그럼 죽어 이 머저리 새끼야!”

퍽-!

현웅렬이 그대로 찻잔을 최주철의 뒤통수에다 집어 던졌다.

청자 사기로 만들어진 찻잔이 국정원장의 뒤통수에 맞으며 수십 조각으로 깨졌고, 그 파편 일부가 그의 뒷목덜미와 뒤통수, 귓가 등에 박혔다.

파편이 박히거나 긁고 지나가 찢어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그 피는 이내 아래로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최주철은 고개를 들지도, 피를 닦지도 않았다.

콧김을 뿜어대며 분을 토해 내던 현웅렬이 시선을 호서해운 회장에게로 돌렸다.

호서해운 회장이 움찔했다.

“우곤아. 내가 분명 이야기했지. 마약을 들여오건 계집애를 들여오건 마력석을 들여오건 조심해라고. 응? 근데 왜 들킨 걸까? 응? 왜 상무 하나 관리 못해서 이 사단이 나게 만든 거야!”

찻잔 하나가 더 날아가 그대로 호서해운 회장 유우곤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다.

깨진 파편이 이마에 박혀 고통을 유발했지만 유우곤은 아픈 티조차 낼 수 없었다.

“일주일 시간 준다. 총대 맬 새끼 하나 구해다가 검찰 출두시키고, 호서해운 쪽은 싹 정리해서 부도 처리해.”

“가, 각하!”

현웅렬의 명령에 유우곤이 당황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현웅렬의 핏발 선 눈이 터질 듯 부들거렸다.

“그거 하나 때문에 우리 조직 다 드러나게 생겼잖아 이 새끼야!”

찻잔 하나가 또 날아갔다.

이번에도 그것은 유우곤의 이마에 정통으로 부딪치며 깨졌다.

“커헉!”

이번에는 유우곤도 고통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마를 부여잡고 앞으로 엎어지는 걸 보며 현웅렬은 이를 갈았다.

그의 시선이 다시 최주철 국정원장에게로 향했다.

“이 선에서 끝내야 해. 재수 없게 우리 조직 전체가 드러나면 우리 죄다 뒤지는 거야. 알겠어?!”

“네, 알겠습니다. 각하.”

최주철의 복종의사를 확인한 현웅렬이 시선을 다시 유우곤에게로 돌렸다.

피 흐르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유우곤도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따르겠단 의사를 표했다.

두 사람으로부터 확답을 받아낸 현웅렬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닫이 문 앞까지 가서, 현웅렬은 멈춰 섰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명심해라. 너희 둘 자살자로 만드는 거, 그거 일도 아니다.”

진심이 담긴 섬뜩한 경고에 최주철과 유우곤은 그저 바들바들 떨기만 할 뿐이었다.

* * *

『국정원 직원들만 가입하는 공제회죠. 월영공제회, 이 월영공제회의 투자를 받아 설립된 호서해운이 사실은 국정원의 돈세탁 창구였다는 정황이 담긴 메모가 저희 뉴스테이블 취재진에게 전달이 됐습니다.』

앵커는 정황이 담긴 메모라고 했지만, 실상은 월영공제회와 호서해운 사이에 오간 돈거래 장부였다.

“저거 KBC에서 정권 상대로 간보는 거 아입니꺼?”

시국의 집 거실 소파에 앉아 이강주를 마시며 뉴스를 보던 배현일의 물음에 이동석은 “글쎄요?”라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고, 시국은 차가운 미소만 지으며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일각에서 최주철 국정원장뿐 아니라 전직 국정원 간부들까지 관여돼 있을 거라는 추측이 나오는 가운데, 내일 있을 최주철 국정원장의 참고인 소환은 비공개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이야기가 검찰 측에서…….』

시국이 텔레비전을 음소거로 전환했다.

뉴스를 보던 배현일과 이동석의 시선이 시국에게로 향했다.

시국이 자기 잔을 채우며 이야기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시국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가져온 자료는 극히 일부입니다. 하지만 이 자료만으로도 현웅렬을 보내 버리기에는 충분합니다. 문제는 현웅렬 하나만 보낸다고 해서 우리의 혁명이 완수되는 게 아니란 겁니다.”

남산 지하벙커에 위치한 국정원 안가.

그곳의 심처에 보관돼 있던 국정원 외곽조직의 존재를 증명할 장부와 명부, 회의록.

그중 시국이 들고 나온 것은 전체의 10%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들고 나온 것들 중 10%만으로도 벌써부터 국정원 월영공제회를 중심으로 한 국정원과 외곽조직 간의 연결고리가 터져 나오는 실정이었다.

“현웅렬은 그저 우리를 억압하던 구체제의 일시적 대표자일 뿐입니다. 그 인간 하나를 몰아낸다 해서 구체제 전체가 전복되진 않습니다.”

약간은 낯간지러운 소리라 생각하며 자기 얼굴을 긁은 이동석이 시국에게 물었다.

“그럼 뭐 그 이상도 생각했다는 거예요?”

그 물음에 시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생각해 두었습니다.”

“그게 뭔데요?”

시국은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한동안 이동석과 배현일을 번갈아 바라보다 술잔을 비울 뿐이었다.

시국의 침묵에 배현일이 답답하다는 듯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와 이리 뜸을 들입니꺼? 체제 전복이고 뭐고 그 전에 내 복장 디비지게 만들라 캅니꺼?”

다소 익살스런 그의 말에 시국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레짐 체인지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시국의 물음에 배현일은 눈만 껌뻑일 뿐이었고, 이동석은 뭔가 떠오른 듯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허공에다 대고 손가락질을 했다.

“어…… 어…… 그거. 그거잖아요, 그거.”

구체적인 단어가 생각이 안 난 듯 연신 ‘그거’를 외치는 이동석을 보며 시국은 말을 이어나갔다.

“완전한 의미에서의 체제 전환을 뜻하는 겁니다. 단순히 대표자 몇 명을 날린다거나 여야의 위치를 바꾼다든가 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선에서의 변화가 아닌 완전한 전환 말입니다.”

이동석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현일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까지 우리가 했던 이야기가 그거 아입니꺼?”

“맞습니다. 중요한 건 현 체제를 전복한 후에 어떤 체제를 구축하느냐는 겁니다.”

시국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혁명은 수단에 불과했다.

시국과 이동석, 배현일 그리고 더 나아가 전국헌터총연합회의 목적은 혁명 그 자체보다는 혁명을 통해 헌터의 노동력 착취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즉, 지금 시국이 이야기하는 레짐 체인지라는 것은 결국 전국헌터총연합회가 다루기 수월한 정치체제 구축을 뜻하는 것이었다.

“마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나 보지예?”

배현일의 말에 시국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뭘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거예요?”

이동석의 물음에 시국이 한 차례 더 술잔을 비운 후 20분 간 자신의 구상을 쭉 읊었다.

그 20분 동안, 이동석과 배현일은 그저 멍하니 입만 벌린 채 시국의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이었다.

“이대로만 된다면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 특별결의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착취 구조를 잘라낼 수 있을 겁니다.”

제법 긴 설교를 끝내고 시국은 이강주를 쭉 들이켰다.

이동석과 배현일은 멍하니 시국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헌 어디 뭐 정치 공부라도 했어요?”

가까스로 입을 연 이동석의 첫 물음은 그것이었다.

그 물음에 시국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따로 답변을 하진 않았다.

“마 그 부분은 사무총장이 알아서 하소. 듣기만 했는데도 대가리에 쥐가 내릴라네.”

배현일이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두 사람이 적당히 이해하고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시국이 말을 마무리했다.

“신체제 구축은 일단 제게 맡겨 주십시오. 두 분 마스터께서는 제가 저번에 이야기한 대로 삼화그룹과 현성그룹 오너 일가를 설득해 우리 편으로 만드는 데 힘써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시국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염려 안 해도 돼요.”

“마 맡겨만 주이소. 나 회장 설득하는 건 마 이골이 났심더.”

자신만만한 두 사람의 대답을 들으며 시국은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 *

2029년 8월 24일 22시30분.

경기 고양시.

즐비한 불 꺼진 공가 사이로 드문드문 불 켜진 가정집이 보이는 언덕 주택가.

오피스 룩을 입은 초인협회 C급 요원 여정연이 고개를 숙인 채 터덜터덜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

그녀의 뒤를 세 남자가 밟고 있었다.

팔뚝에 문신을 한 남자들은 희마한 가로등 아래에서 서로를 향해 눈짓하며 천천히, 최대한 여정연이 눈치 못 챌 정도의 거리를 둔 채 그녀를 쫓아갔다.

한참을 걷던 여정연이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조그만 주택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마치 잠이라도 자는 듯 가만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와 약 10미터 정도 거리를 둔 채 마찬가지로 멈춰 서 있던 사내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대놓고 당당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누가 보낸 거예요?”

여정연이 그들을 향해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그 말은 또렷하게 사내들의 귀에 날아가 박혔다.

순간 사내들이 움찔했다.

그러나 그들이 놀란 건 여정연의 질문 내용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내들 중 리더로 보이는 자가 껄렁껄렁한 자세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뭘 누가 보내.”

그 말에 옆에 있던 자들이 실실 웃어보였다.

여정연이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약간 눈이 풀린 상태에서 그녀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마력은커녕 단련 흔적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분명한 목적은 있지만 그 목적이란 게 너무도 하찮을 게 뻔한 사내들의 모습에 여정연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거렸다.

“대충 눈치 깠으면 빨리 끝내지? 어차피 여기서 네가 암만 소리 지르고 별 지랄병을 해 봐야 짭새 오려면 1시간도 더 걸리거든.”

그렇게 이야기하며 사내는 씩 웃었다.

자신의 얼굴과 가슴, 허리, 허벅지를 훑어보는 사내의 음탕한 눈길에 여정연의 표정이 굳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렸다 판단했는지 사내들은 낄낄 웃으며 여정연에게 다가갔다.

“우리 말 잘 들으면 곱게 보내 줄게. 알았…… 컥!”

그의 겁박이 끝나기도 전에, 여정연의 조그만 손이 그의 목을 잡았다.

“커어억! 커헉!”

여정연의 손아귀가 사내의 목을 졸랐다.

사내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사내가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순간 여정연의 눈빛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우드득-!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그녀의 손에 잡힌 사내의 목이 허공에서 꺾여 버렸다.

사내는 더 이상 허우적거리지 않았다.

더 이상 음탕한 눈길로 여정연을 보지도 않았고, 고통에 신음하지도 않았다.

시체가 된 사내를 집어 던진 후 여정연은 나머지 두 남자를 쳐다봤다.

순식간에 벌어진 친구의 죽음 앞에서 두 사람의 사고가 일시적으로 정지했다.

그 사이를 여정연의 손이 파고들었다.

“커헉!”

“컥!”

양손으로 두 남자의 목을 잡은 그녀는 천천히 둘을 들어 올렸다.

남자들은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고통에 신음했고, 이내 둘 다 목이 꺾여 죽었다.

두 사람의 시체를 처음 죽인 자의 시체 옆에 던져둔 여정연은 한동안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범하려는 마음을 먹었던 자들을 내려다봤다.

순간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참 아름답지 않니? 너희 같은 쓰레기를 이렇게 치워버릴 수 있다는 게.”

여정연이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녹색 빛 무리가 일렁이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빛 무리는 곧 사내들을 감쌌다.

그리고 사내들의 몸은 녹색 연기를 피어 올리며 살과 장기 그리고 뼈까지 남기지 않고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10분 만에 세 남자의 시체가 여정연이 날린 독 기운에 모조리 녹아내렸다.

그들이 남긴 거라곤 얼마 남지 않은 녹색 체액과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하는 초록빛 연기 그리고 고기 썩는 냄새뿐이었다.

치아를 드러낸 채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강간미수범들의 최후를 바라보던 여정연이 코를 막으며 열쇠로 집 문을 열었다.

‘창문 못 열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막 그녀가 현관을 지나 방 안에 들어섰을 때였다.

“사람을 죽이는 걸 제법 즐길 줄 아시네요, 여정연 요원님.”

싸늘한 조소를 머금은 시국이 그녀를 반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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