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선언 [Manifesto]
얼핏 광기마저도 보이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그런 말을 내뱉는 시국의 모습에 구성국과 여정연은 순간 바짝 긴장했다.
시국이 자기 잔에 술을 채우고 잔을 든 채 이야기했다.
“협회장님, A급 헌터랑 싸워보신 적 있으십니까?”
시국의 물음에 구성국은 대답하지 못했다.
A급 헌터와 싸운다.
상상도 하지 않았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계열별 공격력과 방어력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A급은 B급인 구성국이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전력을 다하면 10초는 버틸 수 있을까?
대답 없는 구성국을 바라보며 시국이 말을 이어갔다.
“그럼 A급 던전에는 가 보신 적 있으십니까?”
마찬가지로 구성국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시국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가 다시 잔을 채우며 이야기했다.
“A급 헌터와 싸운 적도 없고, A급 던전에 들어가신 적도 없는 분께서…… 등급 외 던전을 클리어하고 살아 돌아온 헌터 앞에서 너무 말을 쉽게 하신단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
“모스크바 던전……. 지금 한창 국제초인협회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는 곳이죠. 과연 여기를 A급이라 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이상의 등급이 아닐까?”
기본적으로 던전의 등급은 초인의 등급과는 달리 객관적으로 딱딱 맞아떨어지진 않았다.
디텍터 스킬로 전투 감각 스킬 등급만 확인하면 되는 초인과는 달리 던전은 그런 식으로 등급 측정이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나타난 던전에서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최대한 계량적 수치화를 한다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전 등급 측정에는 종종 예기치 못한 미스가 발생하곤 했다.
이번 모스크바 던전은 그 미스가 매우 큰 경우였다.
“S급이니 Ex급이니 규격 외니 하는 온갖 소리가 나오는 곳입니다. 거기서 전 되돌아왔습니다. 보스 몬스터를 홀로 사냥해서 말입니다.”
시국의 말에 구성국과 여정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호, 혼자서 보스를 사냥했다고?’
모스크바 던전의 레이드 과정은 철저히 기밀로 부쳐졌다.
국제 초인협회나 국제 공격대 참가국 정부에서는 계속해서 구체적인 레이드 과정에 대한 자료를 러시아 측에 요청했지만 ‘자국 대통령이 관련된 국가 기밀은 공개할 수 없다.’라는 크렘린의 일방적인 통보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생존자들도 모두 그것에 대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랬기에 그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던전 레이드의 구체적인 과정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단지 시국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 정도만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런 모스크바 던전 레이드 과정의 일면이 지금 시국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상 밑에서 구성국의 손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고 있었다.
입 안이 바싹 말라 목이 칼칼했지만 구성국은 물도, 술도 마시지 못했다.
그저 믿을 수 없단 눈으로 시국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구 협회장님의 대의. 전 그걸 이해합니다. 초인이 문명사회 위에,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지 않게 하고자 하는 그 대의에 공감도 하고 말입니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시국의 말투.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본심.
마치 채찍질을 한참 하다가 당근을 던지는 마부와 같은 모습.
구성국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시국 헌터.”
구성국의 물음에 시국이 씩 웃으며 자기 잔을 비웠다.
그 모습을 보며 구성국도 조심스럽게 자기 술잔을 비웠다.
시국이 자기 잔과 구성국의 잔을 채운 후 입을 열었다.
“B급 초인이면 대형 길드 마스터로 당장 가실 수 있죠. 이동석 마스터나 배현일 마스터의 경우를 생각하면 이것저것 다 포함해 연 소득이 30억은 넘어갈 겁니다. 하지만 협회장님은 각성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협회에 몸을 담고 계시죠. 비교적 박봉에 시달리시며 말입니다.”
“…….”
“보통 돈을 외면하고 어려운 길을 가는 사람들은 대단히 강한 신념을 지닌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리고 협회장님의 경우 그간 행동 패턴이나 언론 인터뷰에서 하신 말씀 등을 종합해보면 초인을 민주주의 문명사회에 묶어두려는 대의와 신념을 지니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고 말입니다.”
구성국은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시국을 바라봤다.
시국의 말이 이어졌다.
“저도 그 대의에 공감합니다. 힘의 논리가 통용되는 세상보단 어쨌건 법과 제도의 논리가 통용되는 세상이 보편적으로 살기 좋은 세상일 테니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초인인 사람들이 자식을 낳았을 때, 그 아이도 초인일 거란 보장이 없잖습니까.”
“……. 그런 분이 어째서 그런 행동을…….”
“문명사회를 지지한다 해서 헌터의 권리마저도 포기하겠단 뜻은 아닙니다.”
“…….”
“법과 제도하에서 최대한 헌터의 권익을 증진한다, 이게 제 목표이자 현재의 대의입니다.”
“…….”
“그리고 이번에 제가 하려고 하는 거, 어떻게 보면 구성국 협회장님이 바라던 것이기도 합니다.”
구성국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국이 술잔을 들고 씩 웃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모레 창단되는 전국 헌터 총연합회는 기존에 양승준이 주도하던 전국 헌터 연합회와는 많이 다를 겁니다.”
시국이 술을 쭉 들이켰다.
미심쩍은 표정으로 구성국도 잔을 비웠다.
말없이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와 시국의 일방적인 연설을 듣던 여정연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술잔을 비웠다.
* * *
2028년 12월 24일 20시.
인천 송도 우성호텔 20층 대강당.
1천5백 명까지 수용 가능한 이 넓은 공간에, 예년에 비해 3배나 늘어난 900여 명의 헌터와 요원은 물론 50여 명의 기자들이 격식 있는 파티 복장을 한 채 모여 샴페인과 와인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후우…….”
대강당 한쪽에 딸린 부스에서 이동석이 땀을 줄줄 흘리며 원고를 눈으로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긴장됩니꺼?”
옆자리에 앉아 메이크업을 받는 배현일의 물음에 이동석이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대학 다닐 때도 발표는 별로 안 했는데, 이것 참……. 500명 앞에서 발표하려니 떨리네요.”
“마, 맴 편하게 생각하소. 그래 봐야 몇 명 빼면 다 아는 얼굴들 아입니꺼?”
“그래도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어요. 하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이동석은 다시 시선을 원고로 돌렸다.
“메이크업 들어갈게요.”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말에 이동석이 원고를 내려놓고 고개를 바로 든 채 눈을 감았다.
자기 얼굴 땀을 닦고 기초화장부터 시작하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길을 느끼며 이동석은 끊임없이 속으로 원고 내용을 반추하고 또 반추했다.
“반갑습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쿠, 아닙니다. 이런 귀한 자리에 불러주셔서 오히려 저희가 다 감사합니다.”
시국은 대강당을 돌아다니며 행사에 참여한 중소 길드 마스터들 및 기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
그리고 구석에서 협회 요원들과 함께 여정연은 조용히 샴페인을 마시며 시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대강당은 여느 해 헌터들의 밤 행사와 마찬가지로 북적이는 분위기가 지속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에서 메이크업을 마치고 이동석과 배현일이 나오자 시끌벅적했던 분위기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시국과 이동석, 배현일이 단상 위 의자에 앉자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공식적인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제5회 헌터들의 밤 행사 겸 전국헌터총연합회 창단 행사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때부터 여느 행사에서 그렇듯 식순에 따라 국민의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애국가 1절 제창 등이 이어졌다.
“그럼 지금부터 전국헌터연합회 회장이시자 전국헌터총연합회 창립 발기인이신 이동석 삼화 길드 마스터의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이동석이 연단에 올라섰다.
잔뜩 긴장해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가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마이크를 잡고 원고를 보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헌터 동지 여러분 그리고 늘 이 사회의 정의를 위해 힘써주시는 협회 요원 여러분 우선 이 자리를 빛내 주신 점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
형식적이면서도 굉장히 정제된 단어들로 구성된 인사말을 가까스로 끝내고 이동석이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다음은 전국헌터연합회 부회장이시자 전국헌터총연합회 창립 발기인이신 배현일 현성 길드 마스터의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배현일도 최대한 어색하게나마 표준어를 구사하여 원고를 읽어 인사말을 전한 후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마지막으로 전국헌터총연합회 창립 선언서 발표 및 추인이 있겠습니다. 발표에는 이시국 JH길드 마스터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사회자의 소개에 시국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연단에 올라섰다.
시국은 자신을 바라보는 헌터들과 요원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뭐, 인사말은 앞의 두 마스터께서 충분히 해 주셨던 만큼 전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시국은 곧장 품에서 원고를 꺼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전국헌터총연합회 창립 선언.”
제목을 시작으로 시국은 지난 10월 13일 이동석, 배현일과의 술자리를 시작으로 작성에 들어가 일주일 전 완성한 선언문 발표를 시작했다.
“하나, 우리는 모든 대한민국 헌터의 단결과 협력, 연대에 힘쓴다.”
“둘, 우리는 비효율적인 던전 입찰 시스템의 효율화를 위해 길드 간 협업 체계 구축에 힘쓴다.”
“셋, 우리는 대형 길드와 중소 길드 간의 격차 해소와 노하우 공유, 레이드 공조 등에 힘쓴다.”
“넷, 우리는 헌터의 정당한 목소리를 대변할 것이며, 헌터의 권익 보호와 증진을 위해 힘쓴다.”
그렇게 열 가지 선언문 조항을 낭독한 후 시국은 가만히 연단에 서서 헌터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박수는 이내 대강당 곳곳에 자리 잡은 헌터 모두에게로 전파됐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국이 씩 미소를 지었다.
이후 형식적인 추인 절차를 걸쳐 만장일치로 선언문을 채택하는 것을 끝으로 전국헌터연합회를 대체할 전국헌터총연합회 창단식이 막을 내렸다.
사전에 협의했던 대로 초대 지도부로 회장에 이동석, 부회장에 배현일, 사무총장에 시국이 지명됐다.
형식적인 승인 절차가 이어졌고, 전국헌터총연합회 회원 만장일치로 지도부 인선이 마무리됐다.
그 이후로는 진정한 의미에서 헌터들의 밤 행사가 시작됐다.
그간 대형 길드 및 그들의 하청 길드를 중심으로 행사가 열렸던 것과는 달리 전국 방방곡곡에서 올라온 중소 길드 및 영세 길드 헌터들에다 기자들까지 어우러지면서 행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흥이 더해졌다.
젊은 남녀가 헌터와 기자 할 것 없이 함께 술을 마시다 하나둘 객실로 사라졌다.
전국헌터총연합회 초대 지도부가 된 시국과 이동석, 배현일은 길드 마스터들과 논설위원급 기자들의 축하 인사를 받았고, 그들과 일일이 술잔을 기울이며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
그리고 한동안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여정연은 어느 틈엔가 소리 소문 없이 대강당은 물론 우성호텔에서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12월 25일 00시 15분.
은은한 캐럴이 울려 퍼지는 청와대 응접실.
대통령 현웅렬이 홍차 한 모금을 넘긴 후 자기 앞에 앉은 사람에게 이야기했다.
“협회장이 과연 막지 못한 걸까요? 아니면 막지 않은 걸까요?”
그의 물음에 앞에 앉은 사람은 대답하지 못했다.
현웅렬이 말을 이었다.
“전국헌터총연합회. 취지는 좋아요. 대형 길드와 중소 길드의 상생을 도모하며, 비효율적인 던전 입찰 시스템을 개선하고 헌터들의 권익 증진 및 보호를 도모하고. 뭐, 취지는 좋지요. 근데요.”
현웅렬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앞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헌터들이 국가 권력의 통제를 벗어나겠다는 소리를 좀 더 고급스럽게 포장한 것밖에 더 됩니까?”
“…….”
“비효율적인 던전 입찰 시스템을 개선하겠다. 이거 결국 앞으로 던전 입찰에 관하여서 전국헌터총연합회 차원에서 대응하겠단 소리잖습니까. 그럼 이게 입찰이 의미가 있습니까? 사실상 독점인데? 자기네들이 독자적으로 입찰해서 내부적으로 알아서 분배하겠다, 그것밖에 더 됩니까?”
“…….”
“권익 증진 및 보호를 도모한다고? 마력석 국가 독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게 권익 증진입니까?”
현웅렬이 홍차를 쭉 들이켠 후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았다.
그가 살짝 광기 어린 눈빛으로 앞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며 한 단어, 한 단어 힘주어 이야기했다.
“일단 정연 씨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구성국 협회장 감시하고, 추가로 이시국 헌터도 감시하세요.”
현웅렬의 말에 앞에 앉은 사람, 여정연이 움찔거리며 그를 바라봤다.
“겁납니까?”
“……. 네, 솔직히 조금…….”
“모스크바 던전에서 보스를 잡았단 말 때문에?”
“…….”
“정연 씨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요?”
“…….”
“난 좀 허세 가득한 소리 같다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어차피 이시국 헌터의 독단적인 주장일 뿐이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그럼 뭐가 불안합니까? 내가 정연 씨보고 이시국 헌터를 암살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감시하라는 거잖아요.”
“……. 저는 협회 요원이라서……. 어떻게 감시할 명분이나 방법이 마땅치…….”
“그럼 몸이라도 바쳐서 꼬셔 보든가요. 원래 한 침대에서 벌거벗은 채 누워 있으면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오는 법이거든요.”
현웅렬의 말에 순간 여정연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웅렬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싫습니까?”
“…….”
“싫으면, 당장 구성국 협회장에게 이야기를 해 줄까요? 정연 씨가 7년 전에 무슨 짓을 했었는지를?”
“…….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래야지요.”
현웅렬이 자기 잔에 홍차를 따르며 말을 이었다.
“정연 씨, 20년 뒤에 당신이 이 자리에 앉으려면 지금부터 내 말 잘 듣고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내가 임기 끝나기 전에 정연 씨 협회장 자리에 올려 줄 거고, 또 내 후임으로 이 자리에 앉을 인간이 당신 금배지 달아주고 하면 20년 뒤에 충분히 당신도 여기에 앉을 수 있어요.”
“…….”
“근데 내 말 안 듣고 그러면 곤란해요. 각성하자마자 아버지부터 죽인 여자를 이 세상 사람 누가 좋아하겠어요?”
여정연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 뿐, 별말은 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현웅렬의 얼굴에는 그녀를 향한 경멸 어린 조소와 약간의 광기가 배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