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전우 [Call me Nikolaevich]
시국은 살짝 경계하며 이반 이바노프에게 물었다.
“각하께서 저와 거래할 내용이라면……. 혹시 JH그룹의 극동 개발 투자 건과 관련된 것입니까?”
이반 이바노프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시국을 바라봤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시국으로선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었다.
“그 건은 JH물산 쪽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부회장이라곤 하지만 실제 그룹의 구체적인 투자 업무는…….”
시국이 짐짓 발뺌하며 말을 돌리자 이반 이바노프가 그의 말을 끊으며 한마디 툭 내던졌다.
“블라바츠키 합자 회사.”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시국은 말을 멈추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반 이바노프는 미소를 지은 채, 시국은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병실에 내렸다.
담배 한 대 피울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시국이 말문을 열며 마침내 침묵은 깨졌다.
“……. 어디까지 알고 계십니까?”
상대는 러시아의 대통령이다.
비록 러시아가 푸틴 와병 이후 분열돼 있는 상태라곤 하지만 러시아 대통령의 권력은 다른 민주 국가 지도자의 권력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강했다.
특히 이반 이바노프가 어디 출신인가를 생각하면 확신에 찬 그 앞에서 다른 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시국의 물음에 이반 이바노프가 소리 내 웃으며 이야기했다.
“FSB 극동 지부와 극동 개발부, 북한 국가 보위부 그리고 JH그룹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란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사실상 다 안다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시국은 허탈하게 웃었다.
“FSB 극동 지부와 극동 개발부는 각하의 영향력 밖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맞아. 거긴 이고르 세친 쪽 사람들이 장악한 상태지. 근데 러시아 내 정보기관이 FSB뿐인 건 아니잖아?”
이반 이바노프의 말에 시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반 이바노프에게 물었다.
“어디입니까? SVR? GRU?”
연방보안국(FSB) 이외에 이 극동에서 이루어지는 밀거래 커넥션을 파악할 러시아 정보기관은 대외정보국(SVR)과 군 정보총국(GRU) 정도일 터였다.
“내가 어디 출신인지는 알고 있겠지?”
이반 이바노프의 되물음에 시국이 웃으며 대답했다.
“정보총국.”
이반 이바노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국 또한 ‘역시.’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도 망한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제 기능을 했던 게 군이었으니까.’
시국이 이반 이바노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자네가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럼 제법 오래전부터 알고 계셨던 건데……. 왜 방치하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동안은 침묵하고 계시다가 이제야 말씀하신다는 건…… 막을 방법이 생겼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습니까?”
시국의 물음에 이반 이바노프가 호탕하게 웃으며 침대를 손바닥으로 몇 차례 내려쳤다.
들썩이는 침대 시트의 진동을 느끼며 시국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반 이바노프가 검지로 살짝 맺힌 눈물을 닦으며 이야기했다.
“자네는 참 재미있는 사람이야. 너무 앞서간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건가? 어찌 됐건 재미있어. 하하하하!”
영문 모를 소리만 하는 그의 모습에 시국은 인상을 찌푸렸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극동은 푸틴이 소치의 별장에서 요양하기 시작한 뒤로 모스크바와는 전혀 별개로 굴러가고 있어. 정보총국이나 대외정보국이 어느 정도 정보망을 구축해둔 상태라곤 하지만 손을 쓰기에는 어렵지. 당장 FSB 극동 지부 인사는 루뱐카에 있는 FSB 본부가 아니라 하바롭스크에 있는 극동 개발부 청사에서 이루어지고 있잖아.”
언젠가 사업 파트너이자 주한 러시아 대사관 참사관으로 와 있는 FSB 요원 드미트리에게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였기에 시국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시국이 이반 이바노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뭘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블라바츠키 합자 회사의 사업과 관련된 거래를 원하시는 것 같으신데……. 맞습니까?”
“그래, 맞아.”
“무슨 거래를 하시려는 겁니까?”
시국의 물음에 이반 이바노프는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뜬금없는 질문을 시국에게 던졌다.
“자네, 애국자인가?”
“네?”
너무나 뜬금없는 질문에 시국은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자네의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투철하냔 말이야.”
시국은 가만히 이반 이바노프를 바라보았다.
웃음 뒤에 숨겨진 진의를 읽고 싶었지만, 쉽사리 그것은 웃음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말 그대로야. 자네, 애국자인가?”
한동안 미심쩍은 눈빛으로 이반 이바노프를 바라보던 시국은 결국 솔직한 대답을 내놓았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별로 애국심 같은 건 딱히 없습니다.”
시국의 대답을 들은 이반 이바노프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야기가 좀 통하겠어.”
이반 이바토프가 보호자용 의자를 끌어 거기에 앉아 물을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국제법에 따른다면 던전 부산물 중 몬스터 사체 부산물 같은 건 자네에게 다 양도가 될 거야. 한국 몫으로 분배될 70% 중에서 말이야.”
시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 이바노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력석이나 스킬 페이퍼는 온전하게 한국 정부의 곳간으로 들어가겠지. 뭐, 스킬 페이퍼야 결과적으로 자네에게 돌아가겠지만, 마력석은 모두 한국 정부의 소유가 되겠지. 자네가 목숨을 바쳐가며 클리어한 던전에서 나온 가장 가치 있는 보물이 말이야.”
시국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이반 이바노프를 바라보았다.
일국의 지도자가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시국을 바라보며 이반 이바노프가 말을 마저 이어갔다.
“배 아프지 않겠어?”
“…….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현재까지 던전에서 채굴한 마력석은 200톤이야. 향후 추정치를 합하면 총 300톤의 마력석이 저 던전에서 채굴되겠지.”
전 세계 연간 마력석 채굴 규모의 20%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분배 계획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가만히 앉아서 210톤의 마력석을 꿀꺽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중 30%를 블라바츠키 합자 회사에 넘겨주지.”
이반 이바노프의 말에 시국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니, 채굴된 마력석을 어떻게 일반 기업체에 넘긴단 말씀이십니까?”
“30% 정도 뒤로 빼돌리는 것도 못 할 만큼 러시아가 약해지진 않았어.”
너무도 당당하게 러시아가 아직 그 정도 도둑질할 힘은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러시아 대통령의 모습에 그만 시국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황당하단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국을 보며 이반 이바노프가 말을 이었다.
“결제 대금은 블라바츠키 합자 회사가 발행하는 회사채로 받도록 하지. 30년 만기로.”
지나치게 좋은 조건이었다.
시국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가 이반 이바노프의 두 눈을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빼돌릴 마력석 90톤을 넘기는 대가가 겨우 30년 만기 회사채일 리는 없고……. 진짜로 원하시는 게 뭡니까?”
시국의 물음에 이반 이바노프도 웃음기 싹 사라진 진지한 얼굴로 시국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극동 개발부 장관과 FSB 극동 지부장을 제거해주게.”
“…….”
시국은 말없이 가만히 이반 이바노프를 바라봤다.
이반 이바노프도 입을 굳게 다문 채 시국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내렸다.
“…….”
“…….”
이번엔 제법 오랜 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서로 입을 다문 지 10분이 지났을 무렵, 시국이 천천히 입을 열며 침묵을 깼다.
“내게 그것을 맡기는 이유는?”
“탱커보단 레인저류 딜러가 암살에 더 적합하니까.”
“……. 기한은?”
시국의 말에 이반 이바노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2030년 초에 대선이 있어. 그전에는 처리해 줬으면 좋겠군.”
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 이바노프가 환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시국에게 손을 내밀었고, 시국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선금으로 마력석 50톤을 먼저 보내지. 자네가 두 사람을 제거하고 나면 나머지를 보낼 거고. 괜찮지?”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이바노프 대통령 각하.”
시국의 말에 이반 이바노프가 씩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앞으로 사석에선 니콜라예비치라 불러. 말도 편하게 하고.”
그 말에 시국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하죠, 니콜라예비치.”
* * *
2028년 9월 17일 19시 55분.
청와대 응접실.
원탁에 마주 앉아 대통령 현웅렬과 초인협회장 구성국이 뉴스를 보고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20개국 대표단 회의가 던전 부산물 분배에 관한 최종 결정에 합의하지 못한 상황에서 일각에서는 20개국 정상이 직접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현웅렬이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껐다.
그리곤 커피를 한 모금 넘긴 후 구성국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우리에게 70%를 분배하겠다는 안은 이미 확정이 됐습니다. 지금 최종 합의에 이르지 못하는 건 어디까지나 30%를 어떻게 분배할 거냐에 대해 중국과 미국, 러시아 사이에 이견이 발생해서 그런 것뿐이고요.”
현웅렬의 말에 구성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웅렬이 말을 이었다.
“현재까지 러시아 측에서 발표한 대로라면 마력석의 총량이 200톤에 이를 것이라고 하니 대충 잡아도 130톤은 들어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기분 좋게 웃는 현웅렬을 보며 구성국도 미소를 지었다.
현웅렬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참 운이 좋습니다. 골칫덩어리였던 양승준도 죽어주고 또 대부분의 헌터들이 죽는 와중에 우리나라 헌터는 양승준 빼곤 모두 생존한 데다 러시아 대통령이 직접 우리 쪽 공로를 인정하여 70%를 분배받게 됐으니 말입니다.”
구성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시국 헌터가 그야말로 발군의 활약을 보여줬기에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지만 이바노프 대통령의 말에 따르면 보스 사냥은 전적으로 이시국 헌터가 혼자 다 했다고 하니 말입니다.”
“왜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현웅렬이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구성국도 녹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현웅렬이 잔을 내려놓으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에 어쩌면 세계 최강이라 불릴지도 모를 헌터가 있다는 게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또 불안해집니다.”
구성국이 의아한 표정으로 현웅렬을 바라보며 물었다.
“불안…… 하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통령님?”
“이시국 헌터는 더 이상 단순한 A급 헌터가 아닙니다. 국제 공격대 최정예 헌터 415명 중 411명이 죽어버린 던전에서 살아 돌아온 헌터란 말입니다. 그것도 홀로 보스를 사냥해 던전 클리어까지 이끈 그런 헌터 말입니다.”
“…….”
“그런 자가 좋은 마음가짐을 가진 채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면 모를까, 혹여나 나쁜 마음을 먹는다든가 하면 그야말로 국가적 재앙이 되지 않겠습니까?”
“대, 대통령님 그게 무슨…….”
“협회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매년 국제 초인협회 정기총회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지, 국제연합 특별안보총회 비공개 회의에서 무슨 의제가 다루어지는지. G20 정상회담 비공개 만찬에서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말입니다.”
“…….”
“다들 대놓고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두들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시한폭탄과도 같은 헌터들을 말입니다.”
구성국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현웅렬의 말마따나 헌터에 대한 두려움은 비각성자들을 중심으로 점차 퍼져가는 추세였다.
“지금이야 그들이 국가 권력의 통제에 순응하고 있다지만…….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요?”
현웅렬의 물음에 구성국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현웅렬이 말을 이었다.
“자그마치 411명이 죽었습니다. 그것도 주요 20개국에서 보낸 헌터들 411명이 말입니다.”
“…….”
“혁명적 사상은 혁명적 계급을 기반으로 한다고 그 옛날 칼 맑스가 이야기했듯이 어쩌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혁명적 사상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혁명적 계급은 이미 나타났다. 무려 8년 전에.
그동안은 국가 권력과 국제 사회가 어떤 식으로든 이들을 통제하려 노력했고 실제로 통제했다.
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까?
“저는 그 혁명의 중심에 이시국 헌터가 있을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하는 겁니다.”
“…….”
어떻게 보면 현웅렬의 과대망상일 수도 있었다.
‘대통령은 예전부터 헌터들을 안 좋게 보고 있었지.’
현웅렬이 품은, 헌터에 대한 피해의식에 가까운 편집증적 사고를 고려해본다면 어쩌면 이는 현웅렬의 과대망상에 가까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구성국은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헌터들에겐 몰라도 적어도 요원을 통솔하는 협회장에게 대통령은 슈퍼 갑이었기 때문이었다.
커피를 마저 쭉 들이켠 후 현웅렬이 구성국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곧 이시국 헌터가 귀국할 겁니다. 그리고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겠지요. 그가 국민의 영웅으로 계속 남게 할 전략 전술이 필요한 때입니다.”
“……. 귀국하기 전에 방법을 찾아 보고하겠습니다.”
구성국의 대답에 현웅렬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기 잔에 커피 한 잔을 더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