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빌런의 인생2회차-74화 (74/200)

074 보스 [Legion of Darkness]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 오래된 한국 속담은 2030년에 약간의 수정을 거치게 된다.

기술의 발달로 하나의 문구가 더 추가된 것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며, 초인은 죽어서 마력을 남긴다.>

비단 초인뿐 아니라 격변 이후 세상에 나타난 판타지적 존재들은 모두가 죽어서 마력을 남겼다.

예컨대 마력 100짜리 몬스터나 초인이 죽으면 그 자리에 딱 100만큼의 마력이 남게 되는 식이었다.

마치 죽은 자의 혼령과도 같이 마력은 한동안 그 주인이 죽은 장소에서 머물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흩어지곤 했다.

그 사실을 인류는 격변 후 9년이 되던 2029년에서야 겨우 알게 됐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2028년 말 한국의 카이스트와 미국의 MIT에서 공동 개발에 성공한 마력 측정기가 2029년 상용화돼 보급되기 전까지 마력을 비롯해 몬스터나 초인에 관한 정보 획득은 온전히 디텍터 스킬을 가진 디텍터들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소수의 인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다 보니 알려지지 않았다가 기계가 인간의 자리를 대체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려지게 된 케이스였다.

죽은 존재의 마력이 일정 기간 그 장소에 맴돈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인류는 어쩌면 자기들이 반영구적인 동력원을 찾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죽은 자, 그것이 초인이건 몬스터건 관계없이 그들의 마력이 남는다면 그 남은 마력을 수집해서 동력원으로 삼을 수도 있을 거란 상상 때문이었다.

물론 그러한 상상은 그저 상상에 그쳤을 뿐이었다.

적어도 시국이 사형당하던 2042년 5월 1일까지, 죽은 존재의 마력을 수집할 방법은 이론상으로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고문기술자 이시국, 알림 사건, 스킬 암흑 군단의 행군, 발동 조건 충족.]

그 메시지를 받자마자 시국의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숫자가 떠올랐다.

<1007000/1000000>

‘…….’

시국은 가만히 그 숫자를 바라보았다.

메시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마치 이 조건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던 양, 그 이후로 아무 이야기도 없었다.

‘암흑 군단의 행군…….’

도대체가 그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이 D등급 스킬.

그에게 날아온, 발동 조건 충족이란 메시지와 눈앞에 떠오른 정체 모를 숫자.

‘…….’

가장 먼저 시국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죽은 자들은 초인이건 몬스터건 무관하게 마력을 남긴다는 사실이었다.

‘설마…….’

시국이 블랙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몬스터보다는 어떤 초월적 존재처럼 보이는 거대한 파충류는 자신이 만든, 깔끔하게 사라진 헌터 진영을 내려다보며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시국의 시선이 이번에는 헌터들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유일하게 이반 이바노프만이 살아남아 피를 토하며 숨을 헐떡이고 있는 곳.

그곳을 바라보며 시국은 디텍터 스킬을 펼쳤다.

이반 이바노프 주위로 마치 망령처럼 혹은 안개처럼 떠 있는 마력이 눈에 들어왔다.

구체적인 숫자로도 표시되지 않고, 그저 디텍터 스킬을 통해 안개 형태로나 볼 수 있으며, 어떻게 사용할 방법도 없기에 시국이 쭉 무시해 왔던 존재.

망자의 마력.

어쩌면 암흑 군단의 행군은 그러한 망자의 마력을 사용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시국의 뇌리를 강타했다.

* * *

“크릉!”

블랙 드래곤이 콧방귀를 뀌었다.

놈이 다시 입을 벌렸다.

벌어진 입으로 기침과 함께 미처 배출되지 못한 산성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공기마저도 오염시키는 것 같은 그 시커먼 가스를 바라보는 산 자들의 표정은 가스만큼이나 어두워졌다.

“쿨럭-!”

이반 이바노프가 각혈하고는 손등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Сука!”

욕지기를 내뱉으며 이반 이바노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구리에 찬 구급함에서 종합 물약을 꺼내 쭉 들이켜고 병은 뒤로 던졌다.

미국 제약 기업에서 만든 제품이었던 만큼 효능은 좋아서 금세 생명력과 마력이 풀로 찼다.

“우리나라 제약 기업들은 단가를 낮출 생각만 하지. 그러니까 D급 헌터들이나 처먹을 싸구려밖에는 개발 안 되는 거고. 그에 비해 미국 기업들은 싸구려 양산형부터 최고급 명품까지 다양하게 생산한단 말이야.”

누가 들어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죽음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그저 이반 이바노프는 그간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뱉어낼 뿐이었다.

“의약 부문만 그러는 게 아니야. 모든 분야에서 다 그래. 우리나라는 이제 삼류야. 그걸 인정해야 해. 그런데도 빌어먹을 노인네들이랑 국수주의자 새끼들은 일류였던 소련 시절만 생각하지. 멍청한 새끼들. 핵무기 말고는 모든 분야에서 미국은커녕 한국한테도 밀리는 게 조국의 상황인데 말이야. 눈 내리는 나이지리아란 말이 괜히 나온 줄 알아?”

이반 이바노프가 왼팔에 차고 있던 원형 방패를 풀어 집어 던졌다.

“내가 왜 러시아 대통령인데 아이템은 전부 다 미제 아니면 독일제로 쓸까? 믿을 수가 없으니까 그런 거야. 하다못해 중국산 아이템들도 러시아산보다는 더 믿음직스럽겠다.”

그가 구급함 반대편에 맨 주머니에서 조그만 둥근 막대기 같은 것을 꺼냈다.

거기다 마력을 주입하자 15cm 정도의 막대기는 순식간에 3미터짜리 장창이 됐다.

“방패도 미제, 갑옷도 미제, 창은 독일제. 이게 러시아 대통령이자 조국의 방패라는 자가 쓰는 무기의 현실이야.”

이반 이바노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높은 곳에서 블랙 드래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반 이바노프가 반쯤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소리 질렀다.

“A급 헌터가 됐을 때 이런 엿 같은 조국의 현실을 어떻게 바꿔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결국 여기서 너 새끼한테 뒤지게 됐구나. 그래도 그냥은 안 죽어. 마지막 발악은 하고 죽지.”

이반 이바노프가 웃음을 멈추었다.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전투 자세를 취하며 블랙 드래곤을 노려봤다.

블랙 드래곤은 그런 이반 이바노프를 내려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반 이바노프가 블랙 드래곤을 바라보며 어쩌면 이 세상에서 남길 마지막 말이 될 수도 있는 소리를 내뱉었다.

“만약에라도, 진짜 만약에라도 내가 살아서 나간다면 유리 글레롭스키 그 새끼는 반드시 족친다. 어떻게 여기가 A급 던전이냐? 등급 외 던전이지.”

그 말을 끝으로 이반 이바노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크릉-!”

블랙 드래곤은 그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놈은 마치 들어와 보라는 듯 이반 이바노프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한동안 숨죽인 채 돌진할 타이밍을 재던 이반 이바노프.

온통 빈틈인 것 같지만 어디 하나 찌를 틈이 보이지 않는 블랙 드래곤의 몸 전체를 쭉 훑기를 5분, 마침내 그가 최후의 일격을 위해 한 발짝 앞으로 내디뎠을 때였다.

‘…….’

“크릉?”

이반 이바노프도, 블랙 드래곤도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최종 집결지가 있는 언덕으로 모이기 시작하는 거대한 마력을.

이반 이바노프의 시선이 블랙 드래곤의 시선을 따라 언덕으로 향했다.

‘…….’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언덕에 서서 양팔을 활짝 편 시국과 그의 앞에 구형으로 뭉치기 시작하는 거대한 마력의 덩어리를.

* * *

판타지가 현실이 된 시대에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던 용도 사람들의 눈앞에 심심찮게 나타났다.

B급 던전의 보스 몬스터로 혹은 A급 던전의 몬스터로.

정말 아주 가끔 나오는 용의 능력은 무시무시했다.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며 불 혹은 산성 액을 뿜어대는 그 위용은 숱한 헌터들로 하여금 레이드를 포기하게 만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 봐야 몬스터였다.

고급 아이템으로 무장한 상위등급 초인의 공격 앞에선 가죽이 찢어지고 피를 흘리며 죽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모스크바의 사신이란 이름을 부여받게 될 블랙 드래곤은 기존에 헌터들이 사냥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사냥할 용들과 비교해 봤을 때 확연히 궤를 달리하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애초에 그 정도 보상이 걸린 의뢰가 쉬웠을 리는 없었어.’

시국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가 이반 이바노프를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는 블랙 드래곤을 쳐다봤다.

‘오히려 보상이 짜다 싶을 정도로, 말도 안 되게 강한 놈이야.’

시국이 양팔을 벌렸다.

‘만약에라도 잡게 된다면……, 만약에라도 이 스킬이 내게 희망이 된다면…….’

물약 섭취로 마력과 생명력을 풀로 채워놓은 상태에서 블랙 드래곤을 똑똑히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암흑 군단의 행군.’

그 순간, 시국의 마력 전부가 빠져나갔다.

빠져나간 마력은 그의 전방 50미터 지점 허공에 둥근 구형으로 뭉쳐졌다.

보랏빛을 뿜어대는 구형의 마력 덩어리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전하는 구형의 마력 덩어리를 중심으로 사방에 안개처럼 깔린 망자의 마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후방의 열대 우림에서 죽은 존재들의 마력과 전방의 분지에서 죽은 존재들의 마력을 마치 스펀지처럼 흡수하며 마력 덩어리는 점차 덩치를 키웠다.

“크릉?”

처음에는 그저 별거 아닌 발악 정도로나 여기며 무시하던 블랙 드래곤이 처음으로 의구심을 지닌 채 시국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놈은 화들짝 놀랐다.

“크릉?!”

놈의 흉흉한 황금빛 눈이 흔들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마력 덩어리는 점점 더 거대해지더니 마침내 블랙 드래곤을 집어삼킬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구체가 돼 허공에 떠올랐다.

“크르르르릉…….”

블랙 드래곤이 놈답지 않게 잔뜩 경계하며 구체를 바라보았다.

한참 회전하던 마력 덩어리가 돌아가는 속도를 점차 늦췄다.

곧 그것이 완전히 회전을 멈추었다.

강한 긴장감이 구체와 블랙 드래곤 사이에 맴돌았다.

“크우우우우우-!”

블랙 드래곤이 포효하며 구체를 향해 산성액을 토해냈다.

산성액은 그대로 쭉 날아가 구체를 정통으로 때렸다.

그러나 구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크르릉…….”

자신이 지닌 최강의 무기에도 멀쩡한 구체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블랙 드래곤이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구체가 한 차례 빛을 발하더니 수만 개로 나뉘었다.

시커먼 갑옷에 검은 칼과 방패로 무장한, 얼굴 없는 병사들의 집단이, 암흑 군단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크우어어어어-!”

소리도, 얼굴도, 의지도 없는 이 순수한 마력 덩어리들은 빠르게 블랙 드래곤을 향해 날아가 놈의 몸에 붙었다.

푹-! 푹-! 푹-!

“크우어어어어-!”

암흑 군단 병사들은 말없이 칼로 블랙 드래곤의 피부를 찔러댔다.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칼 앞에서 블랙 드래곤의 피부는 너무나 쉽게 갈라졌고 찢어졌다.

“크우어어어어-!”

블랙 드래곤이 고통에 포효하며 날개를 펼쳤다.

하지만 놈의 날개는 이미 피막이 너덜너덜해져 있었기에 날아오를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크우어어어-!”

블랙 드래곤이 고통에 포효했다.

순간 허공에 시커먼 가시 같은 것들이 암흑 군단 병사의 숫자만큼 생기더니 쏜살같이 놈의 몸에 붙은 암흑 군단을 향해 날아들었다.

푹-! 푸푹-! 푸푸푹-!

“크허어어엉-!”

그러나 암흑 군단은 순식간에 흩어지며 그 공격을 피했고, 블랙 드래곤은 자신이 만들어낸 독 가시가 온몸에 박히는 고통을 느끼며 비명을 질러댔다.

흩어졌던 암흑 군단은 다시 블랙 드래곤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리곤 더 사정없이 블랙 드래곤의 피부를 쑤셔댔다.

“크허어어엉-!”

블랙 드래곤이 마침내 바닥에 드러누웠다.

이미 암흑 군단 중 상당수가 놈의 찢어진 피부를 뚫고 내부로 들어가 안에서부터 몸을 갉아 먹는 상황이었다.

“커헉-!”

시국이 피를 토해냈다.

이미 눈과 귀, 코에서 줄줄이 흘러나온 검붉은 피보다 더 시커먼 피가 다시 한 번 더 입으로 터져 나왔다.

생명력: 15300/15300, 마력: 0/7300, 집중력: 30%

30%까지 떨어진 집중력은,

“크허허어어…….”

블랙 드래곤의 포효가 점차 구슬퍼질 때 즈음, 17%로까지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시국의 뇌리로 텔레파시가 하나 날아들었다.

[도대체 넌 뭐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았지만 시국은 자신에게 텔레파시를 보낸 존재가 누구인지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거래, 거래를 하자. 너희 넷을 깔끔하게 바깥세상으로 돌려보내 주겠다. 그리고 나는 이대로 너희 세계와의 사이에 만들어낸 문을 닫겠다.]

마치 헌터들을 바퀴벌레나 개미 취급하던 블랙 드래곤이 사실상 항복 선언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국은 그와 거래를 할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할 정신이 없었다.

“크헉…….”

또다시 피를 한 바가지 토해낸 시국.

텔레파시는 더욱 다급해져 갔다.

[이대로 가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둘 다 죽기보단 둘 다 사는 게 좋다. 그러니 어서 거…….]

‘죽여!’

시국의 그 단순한 의지는 고스란히 암흑 군단에게 전해졌다.

“크후어어어어어어-!”

블랙 드래곤의 내부에 침투해 들어간 암흑 군단은 놈의 장기를 닥치는 대로 찔러댔다.

엄청난 마력을 품고 있다는 드래곤 하트가 찢어졌고, 산성 액 주머니라 할 수 있는 위장이 길게 갈라졌다.

일부는 뇌를 향해 올라갔다.

푹-! 푹-! 푹-!

블랙 드래곤의 거대한 뇌를 암흑 군단의 칼이 무자비하게 찔러댔다.

“크어어어어어어어어-!”

블랙 드래곤은 마지막으로 길게 포효했다.

생명력: 15300/15300, 마력: 0/7300, 집중력: 1%

집중력이 1%가 되며 시국의 의식은 완벽하게 외부 세계와 차단됐다.

블랙 드래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시국은 이제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자기 자신이 생각한다는 것을 제외한 모든 인지 기능이 사라진 상태에서, 그 인지 기능마저도 점차 흐릿해질 때 즈음.

[의뢰 성공, 던전 클리어, 보상 지급.]

영혼을 울리는 메시지를 끝으로 시국은 완벽하게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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