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빌런의 인생2회차-64화 (64/200)

064 준비 [Go to Russia]

2028년 7월 14일 13시 45분.

인천 국제공항 VIP 라운지.

경찰과 초인 협회 요원들이 경계를 서는 가운데 오늘 러시아 모스크바로 출국하는 4인의 초인들과 그들의 가족 및 지인들이 출국 전 마지막 회포를 풀고 있다.

“큰아버지, 걱정 마십쇼. 제가 달리 날돈입니까? 아주 그냥 몬스터들이 설치면 하늘에서다가 막!”

큰아버지 양성태 양선 그룹 회장과 연예인으로 보이는 여자 셋 앞에서 허세를 떠는 양승준.

“걱정하지 말라니까. 내가 뭐, 죽으러 가? 울긴 왜 울어?”

말없이 눈물만 흘리는, 이제 겨우 임신 6주 차인 아내를 위로하는 삼화 길드 마스터 이동석.

“마, 너무 걱정하지 마라. A급 던전이 어려워 봐야 결국 던전 아이가? 국제 공격대 숫자만 415명이다. 이 정도 전력이면 막말로 미군하고 다이다이 깨도 이기고 백악관에다 깃발 꽂을 수 있다카이. 마 엄마는 고마 내 귀국하면 청국장 한 사바리 끓이다 줄 준비나 하고 있으소.”

올해 칠순이 된 노모를 안심시키지만 그 눈빛 속에 묘한 불안과 공포가 서려 있는 현성 길드 마스터 배현일.

그리고.

“너희 둘, 나 없다고 개판 치고 그러면 그땐 박헌이 너희들 척추 접어 버릴 거니까, 알아서 처신해라.”

나름 환송식이라고 꽃다발을 들고 온 한명호와 강봉길에게 엄중히 경고하는 시국.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는 JH 길드 사무장 박성준과 JH 그룹 회장 이정훈, 그의 부인 유서영.

그리고 키득거리는 나연이와 전역모를 쓴 채 양승준 곁에 있는 연예인들을 힐끔거리는 황준기까지.

각양각색의 모습이 펼쳐지는 공항 VIP 라운지에는 A급 던전 공략을 위해 출국하는 공격 대원들과 그들의 가족 및 지인들이 뿜어대는 긴장과 간절함, 적당한 가벼움이 혼재돼 있었다.

“왜, 쟤들하고 사진 찍고 싶어?”

한창 강봉길과 한명호를 갈구다 씩 웃으며 그들의 어깨를 툭툭 쳐 준 시국이 여전히 양승준 곁의 연예인들을 힐끔거리는 황준기에게 물었다.

“아, 아닙니다. 형님.”

“아니긴, 새끼. 잠시 있어 봐.”

시국이 자리에서 일어나 양승준에게 다가갔다.

“제가 저번에 트롤 대가리에다 파이어볼을……. 어? 이시국 마스터! 헤헤헤.”

한창 떠들던 양승준이 이시국을 발견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시국은 그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양성태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어이구. 이거, 내 조카 환송해주느라 이 마스터를 못 봤어요. 허허허.”

양성태가 시국에게 손을 내밀었고 시국은 그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양승준의 곁에 있던 연예인들이 시국을 힐끔거리며 자기네들끼리 무어라 소곤거렸다.

시국은 그녀들을 무시하고 황준기에게 손짓했다.

황준기가 살짝 당황하며 나연이의 눈치를 살피다 그녀가 가보라 하자 허겁지겁 시국에게 달려갔다.

“제 여동생 남자 친구입니다. 8년? 9년? 아무튼 징하게 오래 사귀고 있는 놈이에요.”

시국이 황준기를 소개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황준기라고 합니다. 오늘 전역했습니다.”

뜬금없이 자기가 전역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황준기의 모습에 여자 연예인들이 키득거렸다.

시국이 황준기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양승준에게 이야기했다.

“얘가 아직 군인 물이 덜 빠져서 그러는지 연예인들 보면 눈이 휙휙 돌아가나 봅니다. 새끼, 여자 친구 앞에서 확 눈알을……. 아무튼 그래서 이왕 이렇게 같은 공간에 있는 거 사진이라도 한 장 찍으면 어떨까 해서 부탁 좀 드리려는데, 괜찮겠습니까?”

시국의 말에 양승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사진 정도야.”

그렇게 황준기는 예정에 없던 연예인과의 포토타임을 가지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고, 나연이의 표정이 점차 싸늘해져 갈 때 즈음 황준기는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아갔다.

그 모습을 쭉 보며 시국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심각해져 있던 이동석과 배현일도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도 잠시나마 긴장을 풀고 웃을 수 있었다.

“헌터님들, 가족분들, 시간 됐습니다.”

협회 요원의 이야기에 헌터들은 자리를 정리했다.

“몸 간수나 잘하고 있어. 용 회장님이 특별히 보살펴 주신다 했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갔다 와서 마, 같이 청국장이나 묵자.”

“갔다 와서 바로 여의도로 가겠습니다, 큰아버지. 너희들은 나 귀국할 때 공항에 마중 나와 있고. 알았지?”

이동석과 배현일, 양승준은 그렇게 가족과 지인들에게 이별을 고하며 요원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크게 걱정은 안 되긴 하지만 그래도 몸조심해. 알았지? 그리구 이왕 던전 들어갔다 나오는 거 B급 몬스터 시체 하나 정도는 온전하게 들고 와서 연구소에 기증 좀 하구.”

나연이의 농담 갖지 않은 농담을 들으며 시국은 씩 웃었다.

시국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조그만 체구는 그녀의 밝은 표정과는 달리 떨리고 있었다.

“걱정 마. 시시하게 트롤 시체 같은 거 기증하진 않을 거니까.”

시국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불안에 떠는 나연이를 달래주었다.

“상품성은 트롤 시체가 더 좋은……. 죄송합니다.”

한 차례 한명호를 째려본 시국은 황준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 부탁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황준기는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남자 대 남자의, 묵언의 대화였다.

‘알겠습니다, 형님. 잘 다녀오십시오.’

황준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국이 박성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 없다고 너무 농땡이 피우진 말고. 사무실 잘 지키고 있어. 아, 그리고 저번에 내가 이야기한 거, 스킬 페이퍼 위시 리스트. 혹시라도 매물 올라오면 바로 경매 들어가서 최고가 불러서라도 구매해놓고.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국은 이정훈과 유서영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요원을 따라 라운지 밖으로 나갔다.

네 사람은 경찰과 요원들이 세운 인간 방벽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된 출국장 게이트 입구였다.

“오?! 오!”

“왔다, 왔어!”

“와아아아아!”

이동석, 배현일, 양승준 그리고 시국 순대로 네 헌터가 등장하자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와 모여든 군중의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네 사람은 차례로 서서 카메라와 군중을 바라보다 그들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들이 허리를 펴자 여기저기서 그들을 응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국 오빠!”

“파이팅!”

“시국 오빠, 여기 좀 봐 줘요!”

그중에서도 단연 압권은 시국을 향한 소녀들의 환호성이었다.

마치 연예인 팬덤이라도 되는 양 조그만 플래카드를 든 채 주변 사람들 귀청이 찢어져라 함성을 내지르는 그 모습에 양승준은 대놓고 부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건 다른 두 헌터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당사자인 시국은 겉으론 웃으며 소녀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지만, 속으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 애들…… 나중에 내가 자기들 뒤통수쳐도 저렇게 나한테 환호할까?’

영웅이 될 생각이 없는, 헌터보단 여전히 빌런에 가까운 자신의 속내와 계획을 모른 채 그저 외모만 보고 혹은 하는 행동의 단면만 보고 환호하는 군중의 모습이 시국의 눈에는 그저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

‘정치인들이 괜히 대중을 개돼지 취급하는 게 아니지.’

시국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또 한 번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대통령 현웅렬이 무대 위로 등장한 것이었다.

자연스러운 미소와 걸음걸이로 헌터들에게 다가선 현웅렬은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어깨를 한 차례씩 두드려 주었다.

“인류의 평화를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손을 잡으며 태연히 그런 이야기를 하는 현웅렬을 보며 하마터면 시국은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대한민국 헌터의 위상을 전 세계에 드높이고 오겠습니다.”

속에도 없는 말을 하며 시국은 그의 손을 놓았다.

시국의 곁에서 현웅렬이 마이크를 잡고 짧은 연설을 했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달변가로 손꼽혔던 만큼 그의 연설은 깔끔하고 명확했으며 다분히 선동적이었다.

“헌터님들의 무운과 무사 귀환을 바라며 여기서 말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웅렬이 말을 끝내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바람잡이 몇 놈 섞여 있네.’

군중 속에 섞인 현웅렬 측의 바람잡이를 확인하고서 시국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대국민 쇼를 한 차례 하고 헌터들은 비행기를 타러 이동하기 시작했다.

시국의 시선이 VIP 라운지로 향했다.

헌터들의 가족들과 지인들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황준기가 자신을 향해 경례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를 향해 한 차례, 씩 웃어준 후 시국은 그렇게 게이트를 통과했다.

“우와. 아까 여고생들 이시국 마스터보고 환호하는 거 보셨습니까들? 진짜 이래서 헌터도 잘생기고 봐야 하는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헤헤헤.”

“나중에 귀국하시면 걔들 몇 명 꼬셔서 아다라도 깨 주십쇼. 보니까 꼴리게 생긴 애들도 몇 있던데. 헤헤헤. 저도 불러 주시면 감사히 찾아뵙겠지만, 뭐, 안 불러 주셔도 됩니다. 헤헤헤.”

퍼스트 클래스의 편안한 좌석에 앉아 양승준의 개소리를 들으며 시국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어차피 뒤질 거 러시아 가서 실컷 떡이나 치다 뒤져라.’

그리고 시국은 수면 안대를 쓰고 귀마개를 한 후 스르륵 잠에 빠졌다.

* * *

13시간을 날아 한국 헌터들이 모스크바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현지 시간으로 7월 14일 21시였다.

입국장 출입 게이트 앞에는 늦은 밤이었음에도 교민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고국의 헌터들을 환영합니다!>

이런 플래카드를 들고서 그들은 한국 헌터들을 환영했고, 헌터들은 교민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각자에게 주어진 리무진에 올라타 숙소로 향했다.

성 바실리 대성당과 크렘린이 좌우로 보이는 최고급 호텔에 도착한 헌터들은 저마다 짐을 풀자마자 개성에 맞는 행동을 보였다.

“어…… 푸드…… 아임 헝그리…… 어…… 썸…… 어…… 치킨. 오케이? 치킨. 오케이?”

이동석은 어설픈 영어로 러시아인 호텔 직원에게 야식을 주문했다.

고급 호텔인 만큼 영어 교육이 충분히 돼 있던 직원은 곧장 주방으로 가 치킨 한 마리와 러시아산 보드카를 이동석의 방으로 보냈다.

“아, 예. 엄마, 내 모스크바다. 잘 도착했다. 거기 지금 몇 시고? 3시? 그럼 낮이겠네? 뭐?! 새벽?! 잠 안 자고 뭐 하노? 내 전화 말라 기다리노. 노친네. 걍 디비자지. 전화 끊을게. 자라. 아침에 병원 가야 한다 아이가.”

배현일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고국의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사지 좀 불러라니까! 9시잖아! 이 시간에 아가씨가 없는 게 말이 되냐고!”

“I’m sorry, but I don’t understand what you’re saying Korean.”

“아, 썅. 뭐라는 거야? 마사지 좀 불러 주라고! 이 새끼가 진짜! 야, 너 내가 누군지 몰라? 너희 호텔 쳐 망하게 해 줘? 양선그룹이 러시아에다 투자하는 게 얼마인지 모르지? 마사지 불러 달라고!”

양승준은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호텔 직원에게 한국어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마사지 콜걸을 부르라 생난리를 쳐댔다.

그 덕분에 같은 층에 투숙 중이던 헌터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방에서 나오는 사태가 일어났고,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 헌터에 의해 양승준의 뜻은 호텔 직원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호텔 직원은 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최대한 헌터들에게 편의를 제공해 주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마사지 콜걸을 불러 넣어 주었다.

“…….”

시국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샤워부터 했다.

깔끔하게 씻고 나와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는 이동석처럼 야식을 시키지도 않았고, 배현일처럼 한국의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지도 않았으며 양승준처럼 콜걸을 부르라며 갑질을 하지도 않았다.

“…….”

시국은 가만히,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좌측에는 러시아 하면 떠오를 만큼 잘 알려진 성 바실리 대성당이,

우측에는 소련 시절부터 현대 러시아 연방에 이르기까지 미국 중국과 더불어 세계를 움직이는 강대국 러시아의 모든 정책을 결정하는 크렘린이 있었다.

그리고 두 건축물 사이에, 높이 40미터, 전후좌우 폭 15미터의 A급 던전 게이트가 음산한 빛을 일렁이며 붉은 광장을 반으로 가른 채 자리하고 있었다.

전생에 인류의 역사를 뒤흔들어 놓은 존재.

그리고 이번 생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할 존재.

그 존재를 바라보는 시국의 얼굴엔 싸늘한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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