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역사 [Original Pattern]
2018년 5월 5일.
어린이날, 아이를 가진 많은 가정이 그러하듯 이정훈과 유서영도 나연이와 함께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긴 줄이 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즐거운 표정으로 놀이기구 탈 순번을 기다렸고, 남들과 함께 떨어지는 구간에서 소리도 질렀으며, 사파리의 동물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물론 시국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몸이 아파서 말이죠.”
핑계는 그럴듯했다.
이정훈 입장에선 구태여 나가지 않겠다는 시국을 애써 끌고 갈 이유가 없었고, 유서영의 입장에서도 나연이와는 달리 여전히 데면데면한 시국과 애써 함께 가고픈 마음은 없었기에 두 사람은 시국에게 집을 맡겼다.
나연이 정도나 시국에게 같이 가자며 졸랐지만, 아프다는 오빠를 계속 붙들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식구들이 모두 사라지고 집에 홀로 남은 시국은 하루 종일 뉴스를 확인하거나 와이튜브로 영상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빠! 몸은 괜찮아?”
그리고 저녁 즈음 세 사람이 집으로 되돌아왔다.
집으로 오자마자 나연이는 시국을 찾아 방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아픈 적이 없었기에 멀쩡한 모습으로 시국은 나연이를 맞이해 주었다.
“어. 이제 좀 괜찮아. 재밌게 놀았어?”
“응! 엄마아빠랑 바이킹두 탔고 익스트림 익스프레스도 탔고 사파리도 갔어!”
“그래? 재미있었겠네.”
“오빠도 같이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난 겁이 많아서 그런 거 못 타.”
“아니야. 타다 보면 괜찮아져! 다음에 꼭 같이 가자. 알았지?”
“그래. 다음엔 같이 가자.”
그렇게 나연이는 대략 오 분 정도 자기가 사파리에서 본 곰이며 사자며 호랑이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다 씻으라는 유서영의 부름에 호다닥 자기 방으로 되돌아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국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이정훈이 자기 방으로 들어오자 시국은 그 미소를 지웠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네?”
의외라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이정훈에게 시국은 피식거리는 웃음으로 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이정훈도 씩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다가 틈틈이 폰으로 봤는데, 슬슬 인터넷에서 반응이 나오더라고.”
이정훈의 말에 순간 시국이 정색했다.
“운전 중에 한눈을 팔아?”
이정훈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올 때는 서영이가 운전했어.”
시국이 표정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훈이 말을 이었다.
“주류 언론들은 조심스럽게 반응하고 있지만, 비주류 인터넷 언론을 중심으로 이슈화를 시키고 있어. SNS나 커뮤니티 사이트로 그게 퍼 날라지고 있고.”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네 말대로 폭행당한 사람이 삼화그룹 계열사 사장 아들이면, 아마 오늘 저녁에 티비 뉴스는 아니더라도 인터넷에서는 본격적으로 주류 언론들이 가세하겠지.”
“그리고 주말이 지나고 다음 주 화요일 즈음 되면 양성일이나 배금성의 이름이 조금씩 오르내릴 거고.”
“다음 주 수요일 저녁으로 최대한 약속을 잡아 보지.”
“그래, 그렇게 해. 아, 참. 이왕이면 한식당이나 일식당으로 하라고. 저번처럼 프랑스 식당이면 솔직히 같이 앉기는 좀 그럴 것 같아.”
“동감이야. 아무튼 최대한 그쪽으로 조율하지. 정 안 되면 내가 식당을 잡든가.”
알아서 하라며 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도 얼른 와서 씻어!”
유서영의 부름에 이정훈도 시국의 방을 빠져나갔다.
가만히 방에 앉아 시국은 다시 스마트폰을 켰다.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에는 노출되지 않았지만, 실시간 검색어로 러스트 하우스와 신마적이 오르고 있었다.
이제 곧, 그가 전생에 봤던 러스트 하우스 게이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터였다.
* * *
5월 5일.
어린이날의 끝에 지친 몸을 이끌고 부모들이 아이와 함께 티비 앞에 앉았을 때, 뉴스에서는 러스트 하우스에 관한 보도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학생들과 그 날도 일한 직장인들이 자기 직전 침대에 누워 포털사이트와 커뮤니티, SNS에 접속했을 때 그곳은 러스트 하우스와 신마적에 대한 이야기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러스트 하우스? 거기 신마적이 예능에서 지꺼라고 했잖아.
- ㅇㅇ 그렇게 기억함
- 예전부터 말 많았긴 했는데 클러버들 사이에선 거기 위험하다고
- 일단 난 중립기어 박는다. 뭐 결과가 나와 봐야 알지
- 중립 같은 소리하네. 동영상 올라온 거랑 맞은 놈 SNS에 올린 거만 봐도 뭐 있구만
- ㅈㄹㄴ 무죄추정 원칙 모르냐?
- 네 다음 마적단 ㄲㄲ 구마적 군대가고 음악도 안 나오는 ㅂㅅ들이 힙합은 ㅈㄹ
- 네 다음 힙찔이
인터넷은 아직까지는 두고 봐야 한다는 중립주의자들과 그럴 줄 알았다는 신마적의 안티, 평소 마적스의 음악 스타일에 불만이 있던 힙합 마니아들과 그들을 놀리는 자들 간의 싸움으로 대체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 야 러스트 하우스 조폭이 들고 있는 거라함. 아는 형이 고려일보 사회부 기자인데 이미 그쪽에는 널리 퍼진 사실이라함.
- 허언갤로
- 구라 아님 내일이나 모레쯤에 대형 언론사 인터넷판 중심으로 보도되고 다음 주 초쯤에는 공중파에서도 물 거라고 함
정체불명의 출처에서 진실의 일부가 흘러나오기도 했지만, 쏟아지는 설왕설래 속에서 그 이야기는 묻혀버렸다.
- 여기 꼭 들어가 보세요. 러스트 하우스에서 약물강간 피해당한 분이 폭로글 올리셨던 거 아카이브 딴 거예요! 지금은 원글이 지워졌어요!
그리고 5월 6일 점심 즈음부터 러스트 하우스에게 약물강간 피해를 당했다는 사람들의 폭로글이 인터넷에 올라왔고, 그것을 아카이브로 따 두었던 네티즌들에 의해 원글이 삭제됐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정보는 퍼져나갔다.
네티즌들의 분노는 끓어올랐고 중립을 이야기하던 사람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입을 다물거나 시류에 편승하여 함께 불타올랐다.
그리고 5월 7일 월요일 저녁.
공중파와 종편, 보도전문채널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에서 일제히 신마적과 러스트 하우스의 이야기를 보도하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 클럽 러스트 하우스에서 발생한 폭행 사태. 연휴 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는데요. 취재팀이 사건 피해자 이수빈 씨를 직접 만나 인터뷰했습니다. 보도에 김혜은 기자입니다.』
삼화그룹의 계열사인 삼화중공업의 사장 이남호의 아들 이수빈의 인터뷰가 공중파 뉴스를 타고 보도된 것을 시작으로 모든 기자의 눈과 귀가 러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사건을 쌍방 폭행으로 처리하려던 강남경찰서 측에서 사건 당일 가해자로 지목된 러스트 하우스 VIP 가드들은 내버려둔 채 이수빈 씨와 그 친구들만 임의동행 형식으로……』
『피해자 이수빈 씨가 임의동행 과정에서 경찰의 부당한 폭력이 있었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해 강남경찰서 측에선 사실과 무관한 일이라는 입장을 내 놓았습니다.』
러스트 하우스에 유리하게 사건 처리를 했던 강남경찰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취재 결과 클럽 러스트 하우스의 소유주로 알려져 있던 가수 신명진 씨는 사업자 등록증에 이름조차 올라 있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클럽 러스트 하우스의 실소유주는 사업가 김 모 씨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김 씨는 강남 역삼동과 논현동에 근거지를 둔 폭력조직 강남 럭셔리파의 보스로 알려져 있으며, 대규모 자본을 앞세워 준기업 형태를 갖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러스트 하우스의 실소유주가 강남 럭셔리파 두목 김세일이란 것이 밝혀졌을 무렵, 인터넷 상에서 비주류 매체를 통해 강남 럭셔리파와 일신그룹 간의 오랜 커넥션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이야기는 네티즌들의 손을 타고 SNS와 커뮤니티 등지로 퍼졌다.
그리고 5월 9일 수요일.
주류언론사의 인터넷판 보도를 통해 조심스럽게 모재벌이란 형태로 일신그룹이 언급되기 시작할 무렵, 시국과 이정훈은 배은정의 부름을 받고 청담동으로 향했다.
* * *
18시 30분.
청담동 한식당 청명.
VIP룸.
배은정이 상석에 앉은 가운데 시국과 이정훈이 각각 그녀의 좌우에 앉아 있었다.
“언론에서 아주 난리야. 아마 늦어도 내일 저녁이나 모레 아침이면 큰오빠랑 양성일의 이름이 거론될 거야.”
“삼화중공업 이남호 사장의 아들이 피해자로 연관된 사건입니다. 삼화그룹 용재형 회장 입장에선 가만히 두고 볼 일은 아니니 말입니다.”
“하긴, 이남호 사장이 재형 오빠 후계구도 작업에 큰 도움을 줬으니까. 중공업 실적 없었으면 재형 오빠가 삼화그룹 회장 될 수나 있었겠어?”
“아무튼 배금성 부회장이나 양성일 의원 입장에선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겁니다.”
“그렇겠지.”
배은정과 이정훈이 러스트 하우스 게이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시국은 호화로운 한식 코스 요리를 실컷 맛보고 있었다.
그가 만족스런 얼굴로 떡갈비와 고기산적을 먹고 있을 때, 한참을 러스트 하우스 게이트에 관한 이정훈의 견해를 듣던 배은정이 시국을 쳐다봤다.
그녀의 시선이 시국에게로 향함에 따라 이정훈은 입을 다물었다.
‘왜 저 둘이 서로를 의식하면 긴장이 될까?’
어김없이 올라오는 불안감에 이정훈은 살짝 떨리는 손으로 물을 한 컵 쭉 넘겼다.
배은정이 미소를 지으며 시국에게 말했다.
“우리 보디가드씨, 여기 음식이 만족스럽나봐? 대화에는 일절 신경도 안 쓰고 드시고만 계시네?”
그녀의 말에 시국은 그녀를 바라보며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기왕 웃는 거 눈도 보여주면 좋겠는데 말이야. 뭐, 그러기 싫다면 억지로 보여줄 필요는 없어.”
그녀가 고급스런 청자 사기로 만든 술병을 들었다.
“보디가드씨는 술 할 줄 알아?”
배은정의 물음에 이정훈이 대신 대답하려 했다.
“아, 제 보디가드는 술을 안……”
하지만 그 말을 시국이 잘라냈다.
“좋아합니다.”
마치 동굴에서 울리는 것 같은 굵직한 중저음의 미성에 배은정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고, 이정훈은 흠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 보디가드씨 목소리 참 좋다. 좋아. 내가 직접 한 잔 따라 줄게.”
“감사합니다.”
배은정이 시국의 잔에 술을 채워 준 후 이정훈의 잔에도 부어주었다.
“제가 따라 드리겠습니다.”
이정훈의 말에 배은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시국을 보며 말했다.
“보디가드씨가 따라줘 봐.”
순간 이정훈은 긴장했다.
그가 시국을 바라봤다.
다행히 시국은 별달리 기분 나빠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시국이 배은정으로부터 병을 받은 후 그녀의 잔을 채워주었다.
세 사람의 잔이 모두 차오르자 배은정이 잔을 들었다.
“항상 수고하는 이정훈 사장과 보디가드씨 그리고 나를 위하여.”
배은정의 간단한 건배사가 이어졌고 세 사람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곧 세 사람은 잔을 비웠다.
‘음?!’
금방 딴 과일의 상큼하고도 싱그러운 향 뒤에 달달한, 마음을 간질거리는 그런 달달한 맛이 뒤따랐다.
그리고 알코올의 향취가 약간 올라올 때 즈음 액체는 깔끔하게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내려갔다.
시국이 입을 벌린 채 술잔을 바라봤다.
전생에 술을 자주 마셨고 또 제법 다양한 종류의 술을 마셨지만, 이런 술은 처음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배은정이 씩 웃었다.
“어때?”
시국은 대답 대신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강주라고 고급 전통주야. 특별히 장인이 손수 담근 술이라 맛이 제법 좋아. 그래서 집에 몇 병 가지고 있기도 하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창 그녀가 말을 하고 있을 때, 그녀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폰을 꺼내 확인한 배은정이 살짝 인상을 썼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 전화 좀 받고 올 테니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며 VIP룸을 나갔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자 이정훈이 시국에게 물었다.
“그 목소리는 또 뭐야?”
이정훈의 물음에 시국이 피식 웃었다.
“목소리 변조 정도는 뭐, 기본 아니야?”
시국의 목소리는 아까의 중저음에서 다시 변성기가 온 청소년의 목소리로 되돌아가 있었다.
“별 재주가 다 있네.”
그렇게 이야기하며 이정훈은 말없이 고기산적을 뜯어 먹었다.
곧 배은정이 다시 들어와 상석에 앉았다.
“하여튼 이 인간들은 내가 없으면 진행이 안 되나? 실무적인 사항은 자기들한테 전권을 줘도 이 모양이니. 에효.”
그렇게 이야기하는 배은정의 잔을 이정훈이 채워주었다. 곧 시국의 잔도 찼고 이정훈의 잔도 채워졌다.
배은정이 입을 열었다.
“다시 일 이야기로 돌아가자고.”
배은정이 이정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동영상하고 주사기를 확보해 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