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계약 [Sponsor]
이정훈이 떨리는 눈으로 시국을 바라봤다.
『재벌은 폭력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이곳으로 오는 길에 차 안에서 이정훈은 시국에게 몇 번이고 당부했다.
『재벌은 김양기처럼 멱 따서 땅에 묻어버린다고 묻히는 존재도 아니고.』
합리적인 듯 미친 짓을 하고 미친 듯 합리적인 짓을 하는 시국이 혹여나 미쳐 날뛸까 싶어 걱정이 앞섰다.
『때린다고 굴복하는 존재도 아니고 협박한다고 뜻대로 움직여주는 존재도 아니야. 그러니까……』
계속되는 이정훈의 당부에 시국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걱정하지 마. 그 정도로 사리 분별 못 하는 놈은 아니니까.』
못 미더웠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정훈은 믿었다. 시국이 자극적인 행동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시국은 재벌이 보는 앞에서 그의 머슴을 짓밟고 있다.
선글라스를 껴 그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정훈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국은 배은정을 노려보고 있다.
‘막아야 해. 배은정은 김양기가 아니야. 땅에 묻어도 온 세상이 찾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는 그런 존재야. 막아야 해.’
이정훈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어떻게든 배은정의 수행원을 밟고 있는 저 발을 땅바닥으로 내려놓아야 했다.
“그래, 믿는 구석은 있다 이거지?”
배은정의 말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이정훈의 손이 덜덜 떨렸다.
‘막아야 해. 이대로 가면 조직 전체가 일신그룹을 적으로 돌리게 돼.’
이정훈이 막 자리에서 엉덩이를 살짝 땠을 때였다.
“아하하하하하하!”
갑자기, 정말 뜬금없이, 배은정이 웃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뼉을 쳐가며, 손바닥으로 원탁을 두드려가며, 배꼽을 잡아가며 미친 듯이 웃었다.
이정훈의 시선이 시국에게서 그녀에게로 옮겨갔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자신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이정훈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배은정은 한참을 웃었다.
한동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수습하려다 못해서 또 터지고, 그러다 수습을 시도하고 또 실패해서 또 터지길 몇 차례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웃음을 멈췄을 때, 시국의 발도 수행원의 가슴팍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있었다.
“너희들은 별실에 들어가서 대기하고 있어.”
배은정의 말에 바닥에 누워 신음하던 수행원이 가슴팍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는 불안한 눈초리로 시국과 이정훈을 번갈아 보다가 배은정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곤 밖으로 나갔다.
“너는 여기 와서 앉아.”
그녀의 말에 시국은 이정훈을 바라봤다.
선글라스 너머로 그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있음을 느낀 이정훈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시국이 성큼성큼 걸어 배은정과 이정훈 사이 의자에 앉았다.
이정훈이 시선을 배은정에게로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걸렸지만, 머릿속은 혼란했고 심장은 벌렁거렸다.
‘왜 갑자기 웃은 거지? 뭐가 웃기다고?’
이정훈이 그렇게 생각할 때에 배은정이 담배를 피워 물고 시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보디가드?”
대답은 시국이 아니라 이정훈에게서 나왔다.
“그렇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배석재 상무의 약점도 저 친구가 잡아냈습니다.”
“대답은 이쪽한테서 듣고 싶은데 말이야.”
배은정의 시선이 잠시 이정훈을 향했다가 다시 시국에게로 갔다.
시국은 별다른 대답 없이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말이 별로 없는 친구인가 봐? 이건 별로 마음에 안 들어.”
순간 이정훈은 긴장했다.
날 때부터 특권 계급이었고 죽을 때에도 특권 계급일 재벌 2세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살인귀의 기 싸움이었다.
자칫 누구 하나가 기분이 상해버리는 순간 어마무시한 후폭풍이 뒤따를 수도 있는 그런 기 싸움 말이다.
바짝 긴장한 채 이정훈은 시국과 배은정을 번갈아 쳐다봤다.
“뭐, 비장의 무기 같은 건가 본데. 그래, 오히려 이런 사람은 말수가 적은 게 더 좋을 수도 있는 법이지.”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그녀는 이정훈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 말에는 시국과 이정훈에 대한 인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캐치한 이정훈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배은정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이정훈에게 말했다.
“이번에 서남권 깡패들 통합했다면서?”
순간 시국과 이정훈이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배은정이 피식 웃었다.
“대포폰 추적하면 당연히 차명이 나오겠지. 난 그렇게 허술하게 일 안 해. 대포폰 추적도 하면서 동시에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할 인간이 누가 있을까? 후보군도 추려보지.”
“그 후보군에 제가 있었고 말입니다. 하하. 이거 참.”
“그래도 확신은 없었어. 후보 중에서도 가장 후순위에 있던 사람이 당신이었고.”
이정훈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안은 바짝바짝 말랐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배은정의 얼굴엔 더 진한 미소가 맺혔다.
“자, 그래서 우리 서남권 주먹 대장께서는 왜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하셨을까?”
“솔직 담백하게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간단합니다. 생존을 위함입니다.”
“생존이라…… 좋아. 바람직한 목표야. 근데 말이야. 왜 하필 날 선택한 거야?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나보단 큰오빠가 더 회장 자리에 가까운 사람인데.”
“그래서 선택한 겁니다.”
“뭐?”
순간 배은정이 의혹 어린 시선으로 이정훈을 쳐다봤다.
이정훈은 곧장 말을 이어갔다.
“배금성 부회장에게는 이미 강남 럭셔리파라는 심부름꾼들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번에 사돈인 양성일 의원 쪽 사람이 국민연금을 장악하면서 대권 구도에서 유리해졌고 말입니다.”
“큰오빠한테는 별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네, 그렇습니다.”
“둘째 오빠도 있을 텐데?”
“배금철 이사장의 경우 세력이 너무 미미합니다. 일신의료재단이 소유한 지분이 있고 또 개인적으로도 매집한 물량이 있기야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대권 구도가 박빙일 때 스윙보터의 역할을 할 수준에 불과합니다. 결코 단독으로 대권가도를 걸을 수준은 아닙니다.”
배은정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이정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세 분의 개인적인 성향도 제 선택에 제법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개인적 성향?”
“배금성 부회장이나 배금철 부회장은 모두 구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들입니다. 두 사람의 경영 스타일만 보더라도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며 이는 저뿐 아니라 언론에서도 공공연하게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럼 나는?”
“반면에 부회장님의 경우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신시대적 사고를 가진 분이십니다. 경영 스타일부터 해서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드러난 기업의 미래에 관한 비전까지 종합해 봤을 때 말입니다.”
배은정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묘한 표정으로 이정훈을 바라보았다.
이정훈이 살짝 고개 숙였다.
“혹여나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는 바입니다.”
배은정이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뭐, 약간 아부성 발언이 있기는 했지만, 평가 자체는 정확했어. 그런데 말이야.”
배은정이 무심한 표정으로 이정훈을 쳐다봤다.
“그럼 내가 깡패들 끼고 경영할 사람이 아니란 것도 알 텐데?”
이정훈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배은정이 자신에게 마지막 시험을 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잠시 미소를 지으며 배은정을 바라보던 이정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도 계속 깡패로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면?”
“부회장님이 회장 자리에 오르실 때, 저도 깡패 두목에서 기업가가 될 생각입니다.”
한동안 배은정은 말없이 이정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정훈 또한 입을 다문 채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등 뒤로는 식은땀을 흘리며,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을 꽉 쥐며 배은정을 바라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배은정이 씩 웃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식사하면서 하는 게 어때?”
“좋습니다.”
“프랑스 요리 좋아해? 두 사람 다?”
“바게트 정도를 빼면 프랑스 요리를 먹어 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습니다.”
배은정이 스마트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이야기했다.
“아마 앞으로 자주 찾게 될 거야.”
* * *
루이 드 루앙의 공식적인 영업 종료 시각은 23시이며 주문 마감 시간은 22시였다.
하지만 배은정 같은 VIP들에게는 그러한 원칙이 통하지 않았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래, 오늘 요리 괜찮았어.”
“감사합니다!”
“수고해.”
“네. 살펴 가십시오!”
하루가 지난 4월 21일 00시 03분.
루이 드 루앙의 사장과 주방장은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멀어지는 배은정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배은정은 그들을 보며 한차례 웃은 후 앞으로 나아갔다.
배은정의 곁에서 이정훈은 미소를 유지한 채 걸었다.
“음식 맛은 어땠어?”
“훌륭했습니다. 과연 부회장님이 애용하시는 곳답습니다.”
식사에 관한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은 그렇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미리 대기 중이던 배은정의 수행원 하나가 차를 몰고 그녀 앞으로 왔다. 다른 수행원이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배은정은 가만히 서서 이정훈과 그의 곁에 있는 시국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번에는 보디가드 선글라스 벗은 모습도 좀 보고 싶어. 밥 먹는 자리에서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게 좀 보기 불편했거든. 목소리도 들어봤으면 좋겠고.”
“노력하겠습니다.”
이정훈의 대답에 배은정은 씩 웃었다.
“잘 들어가. 앞으로도 꾸준히 타깃들 동향 보고 정기적으로 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네, 알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그래. 다음에 또 봐.”
배은정이 차에 올랐다.
수행원들이 앞과 뒤의 세단에 올라타자 그녀가 탄 롤스로이스는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정훈은 차량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워후. 쫄려 죽는 줄 알았네.”
이정훈이 부들부들 떨리는 두 다리를 손으로 붙잡으며 거칠게 심호흡을 했다.
애써 미소로 감추어 놓았던 긴장이 한 번에 풀리며 일순간 그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가까스로 버티고 서 있던 이정훈이 천천히 자기 차로 이동했다.
그가 먼저 뒷좌석에 올랐고 시국이 이어 올라탔다.
시국을 곁에 두고 이정훈은 시트에 몸을 그대로 내맡겼다.
시국은 선글라스를 벗어 안주머니에 넣고는 입을 열었다.
“프랑스 요리는 역시 별로야. 내 입맛에 안 맞아.”
“나도 마찬가지야.”
“다음번에 배은정하고 약속을 잡을 때 이왕이면 일식집이나 한식집으로 잡아 봐. 하다못해 프랑스 요리 전문점은 피하라고.”
“노력해보지.”
이정훈이 피식 웃었다.
그가 시국을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말이야. 아까는 왜 그랬던 거지?”
“뭐가?”
“왜 배은정 부회장이 보는 앞에서 수행원을 밟았던 거냐고. 그때 진짜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배은정 부회장이 웃어넘기길 천만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지금쯤 우리 이렇게 편하게 못 있었을 거야.”
시국은 피식 웃었다. 이정훈이 말을 이었다.
“분명 그건 배은정 부회장이 우릴 시험한 거였긴 했어. 아무래도 긴가민가했을 테니까.”
“그랬겠지.”
“때려눕히는 것까진 그래, 좋았어. 실력을 보여줄 필요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수행원을 눈앞에서 밟을 필요는 없었잖아? 자칫 도발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이었어.”
“도발한 거 맞아.”
“뭐?”
이정훈의 눈이 떨렸다.
시국이 그를 바라보며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 회장이 말했지. 재벌은 구름 위의 존재라고. 구름 위에서 아래를 향해 비도 내리고 우박도 떨어뜨리는 그런 존재라고 말이야.”
“그랬었지.”
“그런 오만한 종자들한테 수동적으로 대응하기만 하면 결국 끌려다니게 될 뿐이야. 이쪽에서도 능동적으로 저쪽을 도발하기도 해야 비로소 그나마 대화라는 걸 할 수 있게 되는 거고.”
“……”
이정훈은 입을 벌린 채 시국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시국을 바라보던 이정훈이 피식 웃었다.
그가 다시 시트에 몸을 파묻은 채 이야기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배은정 부회장한테 배금성의 수족을 다 잘라낼 거라고 한 만큼 뭔가를 보여줘야 할 텐데 말이야.”
시국도 시트에 몸을 파묻은 채 답했다.
“양성일을 족쳐야지. 그러면 배금성은 국민연금의 도움을 받지 못해.”
“흠…… 어떤 식으로?”
시국이 씩 웃었다. 그의 치아가 어둠 속에서 주차장 조명을 받으며 반짝였다.
“생각해 둔 바가 있어. 양성일과 배금성 그리고 강남 럭셔리파를 한 큐에 묶어서 날려버릴 방법이 말이야.”
이정훈이 시국을 바라봤다.
“그 셋을 한 번에?”
시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훈은 강한 의문을 품은 채 시국을 쳐다봤다.
“어떻게?”
시국은 그저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답을 하지 않았다.
시국이 입을 열지 않자 이정훈도 더는 물을 수가 없었다.
잠시 후, 대리기사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이정훈은 그에게 자기 위치를 알려줬고 곧 대리기사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대리기사가 도착하자 시국은 마스크를 꼈다.
차는 곧 강변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나아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주말 밤 한강의 풍경과 그 너머 빌딩의 불빛을 바라보다 시국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