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낚시 [Alpha Woman]
일신그룹 본사 빌딩은 전체 48층이며 최고층에는 회장실이 있고, 그 아래 47, 46층에는 주총 등의 행사를 위한 대형 홀이 있다.
그리고 45층에, 이 건물에 단둘뿐인 부회장들을 위한 부회장실이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서쪽에는 건설·제조·중공업 분야를 총괄하는 배금성의 사무실이 있고 동쪽에는 유통·엔터테인먼트·레저 분야를 총괄하는 배은정의 사무실이 있다.
공식적으로 두 곳은 건설·제조·중공업 총괄본부장실, 유통·엔터테인먼트·레저 총괄본부장실로 칭해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식 서류나 발언대에서나 나오는 단어일 뿐, 이곳 본사 근무자 중 두 곳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사람들은 배금성의 사무실은 서쪽에 있으니 서 부회장실, 배은정의 사무실은 동쪽에 있으니 동 부회장실이라 불렀다.
2018년 4월 15일 17시 37분.
일신그룹 본사 45층.
동쪽.
유통·엔터테인먼트·레저 총괄본부장실. 통칭 동 부회장실.
석양이 은은하게 내부를 물들이는 곳에서 숏컷을 친 중년 여인이 심각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녀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한 남성이 공손히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번에 국민연금 이사장으로 양성일 의원의 전직 보좌관이 내정됐다고 합니다.”
“그래서? 판세에 영향은?”
“아무래도 양 의원의 측근인 만큼, 그리고 당사자가 여의도 입성에 대한 꿈이 있는 만큼 후에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면 국민연금은 배금성 부회장의 손을 들어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
“현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배금성 부회장의 손을 들어줄 경우 배금철 이사장은 자연스럽게 배금성 부회장에게 붙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
“배금철 이사장이 한직으로 밀려나 있다곤 해도 보유한 그룹 지분이 2%는 되니, 배금성 부회장 입장에선 적당히 계열사 몇 개 맡기는 선에서 협의를 볼 수도 있을 것이라 예상됩니다.”
“결국 큰오빠가 모든 걸 다 가져갈 것이다. 그런 이야기인가?”
“…… 현재로서는 그 이외의 다른 예상 결과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여자, 일신그룹 부회장 배은정이 깊은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뿜곤 꽁초가 다 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녀가 비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신임 국민연금 이사장, 어떻게 회유해 볼 수 없을까?”
“저희도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 계산을 해 봤지만 불가능하단 결론을 내렸습니다.”
“양성일이 가방모찌하던 친구라?”
“그런 것도 있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낙하산으로 꽂아준 사람과 오다가다 몇 번 본 사람 중 양자택일 하라 하면 어쨌든 전자를 선택할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하긴…….”
배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50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졌다.
“명동 신 회장은? 그 영감님이 차명으로 보유한 그룹 주식이라든가 이것저것 동원하면 국민연금하고 붙었을 때 비등비등하지 않겠어?”
“수치상으로만 보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입니다. 하지만 명동 사채왕의 경우 이미 현역에서 반 은퇴한 사람입니다. 2세들의 일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못 박아두기도 했고 말입니다.”
“부민강 의원을 끌어들이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신 회장 사위면서 후계자잖아.”
“그것도 하나의 가능한 시나리오이긴 합니다. 하지만 부민강 의원이 과연 신 회장을 설득할 수 있을지, 설득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대가로 부회장님께 어떤 무리한 요구를 할지가 변수로 있어 쉽게 선택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무엇보다도 부민강 의원은 여당 주류 계파의 방계입니다. 주류인 양성일 의원과 비교했을 때 다소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결국 당장 우리가 확실하게 진행할 시나리오는 없다…… 이건가?”
“…… 네, 부회장님.”
배은정은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 피워 물었다.
“후우…….”
깊은 한숨과 함께 그녀의 폐부 깊숙이 들어갔던 연기가 그녀의 코와 입을 통해 바깥으로 뿜어져 나왔다.
한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뿜던 배은정이 별안간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결국 이렇게 당하는 거야? 손도 못 써 보고 전부 다 뺏기는 거야? 큰오빠한테?”
“……”
“내가 이때까지 키워놓은 걸?”
“…… 죄송합니다.”
배은정은 허탈하게 웃으며 담배를 쭉 빨아들였다. 회색 담뱃재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속마음과 같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길게 연기를 입으로 뿜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비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플랜 B를 가동하는 게 옳지 않나 생각합니다.”
“……큰오빠와 협상해서 내 몫이라도 지켜내라?”
“지금으로선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그 인간이 나랑 협상하려 할까? 국민연금이 자기편이 됐는데?”
“…… 그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하아…….”
힘없이 한숨을 내쉬며 배은정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그녀가 새 담배 한 개비를 꺼내려 할 때였다.
위이이잉-!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어차피 하루에도 셀 수 없을 만큼의 전화와 문자, 메신저 톡이 오는 것이 그녀의 폰이었기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그 메시지를 받자마자 확인한 건, 잠시라도 지금의 서글픔과 무력함을 잊기 위함이었다.
일종의 긴장 이완을 위한 행동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메시지를 확인했을 때, 오히려 그녀는 더 강하게 긴장하게 됐다.
‘이, 이게 뭐야?’
단 한 장의 사진이었다.
커다란 거실의 소파 위에서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의 위에 올라탄 채 거칠게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포르노그래피에 준하는 사진.
그러나 그것을 단순한 스팸메시지로 치부하기에는 사진 속 남자가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석재?’
그녀의 약간 모자란 조카.
큰오빠가 항상 한탄하면서도 외동아들이라 어쩔 수 없이 밀어주는, 서른이 됐음에도 자질이 한참 모자라는 이름만 상무인 한량.
배석재.
‘이게 뭐야?’
난데없이 날아든 배석재와 어느 여인의 애정행각이 담긴 사진에 배은정은 당황했다.
그녀가 미처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메시지가 동일한 발신자로부터 날아왔다.
<촬영일자 2018년 4월 13일, 촬영장소 논현동 샹파뉴 빌라 12층 펜트하우스 거실, 등장인물 일신건설 상무이사 배석재, 일신건설 전속모델 신인배우 김혜진>
배은정의 눈빛이 떨렸다.
<부회장님을 뵙고 이와 관련하여 긴밀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풀버전의 공유와 더불어서 말입니다. 부회장님 편하실 때 불러주시면 어디든 찾아뵙겠습니다.>
배은정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실적이 부진한 계열사 사장에게 실적 부진의 사유에 대한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타당한 근거를 대라며 압박할 때의 그 차가운 눈으로 배은정은 다시 한번 사진과 메시지를 확인했다.
“부회장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비서의 물음에 배은정이 검지만 올린 채 손을 들었다. 조용히 하란 뜻이었다. 비서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배은정이 입을 열길 기다렸다.
한동안 뚫어져라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던 배은정.
잠시 후 그녀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담배를 꺼내 피워 문 후 의자에 몸을 푹 눕힌 채 눈을 감았다.
말없이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녀를 바라보는 비서의 표정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사람의 그것처럼 잔뜩 긴장돼 있었다.
침묵이 부회장실에 내렸다.
그 침묵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끔과 동시에 배은정이 깼다.
“010-xxxx-xxxx. 이 번호 주인 누군지 좀 알아봐.”
차갑게 가라앉은 그녀의 목소리에 비서는 그 어떠한 군말도 달 수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저 따르는 것만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 *
“읽씹당했군.”
이정훈의 말에 시국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애초에 바로 답장을 바라고 보낸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해.”
“자, 그럼 우린 배은정의 다음 행동을 예측해 봐야겠지?”
이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국이 말을 이었다.
“일단 무조건 발신자 정보를 캐내려 할 거야.”
“하지만 나오는 건 서울역 노숙자일 거고.”
“양성일이 국민연금을 장악하면서 경영권 확보에 어려움이 생긴 이상 이런 호재를 무시하긴 어렵지.”
“결국 배은정 부회장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엔 없고.”
“이번 주 안으로 답장이 온다.”
두 사람은 입을 다문 채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시국이 입을 열었다.
“결과적으론 저쪽이 갑이 되는 거긴 하지만, 우리가 지나치게 을이 되어서도 안 돼. 우리가 구축해야 할 관계는 배금성과 강남 럭셔리파의 관계가 아니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이정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그래.”
* * *
3교시가 끝나고 시국은 매점으로 향했다.
이제는 약간 습관이 된 3교시 이후 음료 한 잔.
오늘은 어떤 걸 마실까 사소한 고민을 하며 시국은 터덜터덜 매점으로 걸어갔다.
여전히 몇몇 아이들이 자신을 힐끔거리긴 했지만, 이제 대부분의 아이들은 더는 시국을 이전처럼 의식하지 않았다.
2학년 일진들을 박살 낸 것이 사실로 확인이 됐지만, 그 이후에 시국이 어떤 액션을 취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국은 여전히 혼자였고 과묵했으며 특별히 자신의 힘이나 싸움 실력을 자랑하지 않았다.
아이들 입장에선 약간 특이한 이력의 과묵한 자발적 아싸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편이 시국 입장에선 편했다.
조용히 매점으로 들어간 시국은 순간적으로 시선을 회피하는 박철수와 그 패거리를 무시한 채 자판기로 가 음료를 뽑았다.
그걸 들고 매점을 나서려던 때, 뒤에서 한 여학생이 그를 불렀다.
“이시국!”
시국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 야!”
뒤에서 여학생이 호다닥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국은 구태여 빠르게 달리지도 않았고 그녀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저 천천히 자기 갈 길을 갈 뿐이었다.
“야! 부르는 소리 안 들렸어?”
시국의 앞을 가로막고 박수연이 물었다.
시국은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아니면 원래 이렇게 말이 없는 거야?”
“……”
“사진은 마음에 들었어? 나름 잘 나온 거 골랐다고 골랐는데 너 표정이 전부 다 그 모양이어서. 다음엔 좀 웃으면서 찍자.”
“……”
“그리고 토요일에 그렇게 가버리면 어떻게 해. 카페 가서 할 이야기도 있고 그랬는데.”
“……”
“이번 주 토요일에 뭐 해? 시간 되면 그때 카……”
“박수연.”
“이게 누나한테 까분다!”
“너 나 좋아해?”
“…… 뭐?”
박수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파르르 떨렸다.
“너 나 좋아하냐고.”
“……”
얼굴을 붉히며 침묵하는 박수연.
떨리는 그녀의 눈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직시하며 시국이 말했다.
“왜 대답이 없어?”
“…… 그러는 넌?”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 그런 것 같아.”
그녀의 얼굴이 술이라도 마신 듯 시뻘게졌다.
그러나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시국의 표정은 더더욱 차가워졌다.
박수연이 다시 물었다.
“넌?”
“그냥 귀찮아.”
“응?”
박수연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귀찮다고? 아니 뭐가?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그냥 귀찮다고.”
“아, 아니…… 아니 좋으면 좋은 거고 싫으면 싫은 거지, 귀찮은 건 도대체…….”
“그냥 싫지도 좋지도 않아. 단지 귀찮을 뿐이야.”
“뭐, 뭐가 그렇게 귀찮은데?”
“이런 모습 때문에.”
“……”
박수연이 황당하단 표정으로 시국을 바라봤다.
시국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넌 내 스타일도 아니야.”
박수연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때마침 4교시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 울려 퍼졌다.
시국은 자기 앞에서 부들거리는 박수연을 지나쳐 교실로 되돌아갔다.
박수연은 멀어져가는 시국의 뒷모습을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야, 뭐 해? 수업 시작이야.”
매점에서 나오던 박수연의 친구가 그녀를 불렀다.
박수연은 허탈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야. 나 방금 까였다? 1학년한테?”
“응?”
한편, 교실로 되돌아온 시국은 창가 맨 뒤에 있는 자기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펴놓기만 한 채 창밖을 바라보며 음료수를 마셨다.
교사가 그 모습을 힐끔 째려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수업을 진행했다.
바람 따라 허공에 휘날리는 벚꽃을 바라보며 시국은 그렇게 4교시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