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미끼 [Lure]
“흠…….”
심각한 표정으로 이정훈은 자신의 노트북에서 재생되는 한 편의 포르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국은 가만히 곁에서 페퍼민트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참을 숨죽이고 영상을 보던 이정훈은 영상이 끝나자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런 이정훈을 보며 시국이 입을 열었다.
“테라스 문도 열려 있어, 떡도 거실에서 대놓고 치고 있어. 아주 편했어. 작업하기에는.”
“흐음…….”
“그래서, 감상이 어때?”
시국의 말에 이정훈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무언가를 떠올리려 애쓰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더 영상을 재생했다.
또 한 차례 더 영상을 보던 이정훈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이 여자…… 분명 낯이 익은데…….”
그 말에 시국이 영상을 확인해 보았다.
과연, 이정훈의 말대로 여자의 낯이 익었다.
촬영할 당시에는 배석재에게 집중하느라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누구더라?”
그러나 낯이 익다는 느낌만 들 뿐, 구체적으로 누구라는 확신은 좀처럼 떠오르지가 않았다.
괜히 갑갑함을 느낀 시국은 그대로 페퍼민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 특유의 청량한 향이 입과 코를 뚫을 기세로 가득 퍼지자 그제야 갑갑함이 다소 사그라지는 듯했다.
컵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페퍼민트 향을 맡으며 시국이 입을 열었다.
“됐고, 중요한 건 배석재야.”
시국의 말에 이정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국의 말이 이어졌다.
“이 정도 미끼면 배은정 부회장도 쉽게 우리 제안을 거부하긴 힘들 거야.”
“그렇겠지. 이 정도 영상을 딸 정도의 실력자가 자기를 돕겠다는데, 그걸 거절할 만큼 배은정 부회장이 멍청하진 않겠지.”
“거기다 이 자체로도 나쁘지 않은 아이템이고 말이야.”
“그렇지. 언론에 공표하긴 힘들어도 적어도 배석재의 처가는 자극할 수 있을 테니까.”
“배석재 장인이 양성일 의원이었지? 그 양선그룹 양성태 회장 동생.”
“맞아.”
“장인이 알면 뺨 맞는 정도에서 끝나진 않겠어.”
시국의 말에 이정훈이 피식 웃었다.
시국이 말을 이었다.
“어쨌건 이걸로 배은정 부회장 쪽을 한 번 찔러 봐. 근데 연락을 넣을 방법은 있어?”
“방법이야 많지.”
“그럼 그건 이 회장 알아서 하고, 나중에 만나거나 하게 되면 나한테도 이야기해 줘. 따라가게.”
이정훈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응? 왜?”
“혹시라도 저쪽에서 협상 파토내고 이 회장을 위협이라도 하면 내가 막아줘야지.”
순간 이정훈의 표정이 굳었다. 그 모습을 보고 시국은 가볍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걱정하지는 마. 재벌을 죽일 만큼 똥오줌 못 가리는 놈은 아니니까.”
시국이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정훈은 불안하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국도 구태여 그런 이정훈을 안심시켜줄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진심은 행동에서 드러나는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시국은 페퍼민트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위이이잉-!
그때 책상에 올려두었던 시국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화면에는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가 떠 있었다.
“일단 난 나가볼게.”
이정훈이 노트북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국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정훈은 그대로 방에서 나갔다.
이정훈이 방에서 나갈 때 즈음 스마트폰의 진동은 멈췄다.
‘급한 일이면 알아서 또 전화 걸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시국은 페퍼민트 차를 마저 쭉 들이켜 잔을 비웠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그리고 또다시 스마트폰이 울렸다.
발신자 번호는 같았다.
시국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뭐 한다고 전화를 안 받아?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 헐. 너 아직도 내 번호 저장 안 해뒀어?
“응?”
- 저장 좀 하래두!
“뭐야? 너야?”
- 이게 누나한테 까분다!
“누나는 무슨.”
시국은 콧방귀를 뀌었다.
“용건이 뭐야? 왜 늦은 밤에 전화를 걸고 있어?”
시국의 차가운 반응에 수화기 너머의 발신자, 박수연은 흥흥칫칫 거릴 뿐이었다.
“할 말 없으면 끊는다.”
- 할 말 있어!
“그럼 빨리 말해. 자야 하니까.”
- 넌 무슨 애가 11시에 자니?
“22시부터 02시 사이에 성장호르몬이 가장 많이 분비되는 거 수업 시간 때 안 배웠어?”
- 아 진짜 아재 같어!
“됐고 빨리 말해. 용건이 뭐야?”
- 뭐 꼭 용건이 있어야 연락하니?
뚝-!
시국은 그대로 통화를 끝냈다.
“뭐 하자는 거야.”
1주일 전, 원예부 텃밭에서 시국은 박수연에게 연락처를 넘겨주었다.
그녀는 곧장 그의 번호를 저장했지만, 시국은 저장하지 않았다. 그냥 오다가다 만날 사람 정도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박수연은 매일같이 시국에게 연락을 했다.
처음에는 메신저였다.
하지만 시국은 읽기만 할 뿐 답장하진 않았다.
그러자 그다음은 전화였다.
내용은 별거 없었다.
동생이랑 학교에서 마주쳤다던데 때리진 않았냐?
곧 중간고사인데 넌 공부 안 하냐?
뭐 하냐?
한창 일신그룹 장손의 뒤를 캐며 타이밍을 잡던 시점이었던 만큼 시국에게는 그저 귀찮은 일에 불과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배석재의 비위 하나를 찾아내 배은정을 낚을 미끼를 만들었던 찰나였다.
그런 순간에 용건 없는, 통화를 위한 통화는 시국 입장에선 빠르게 쳐내야 할 일에 불과했다.
‘배은정은 제의를 받아들일 거야. 여러모로 자기한테 지금 구도가 불리하니까. 다만 얼마나 우리 쪽이 지나치게 을이 되지 않느냐는 건데…… 이건 뭐 이 회장이 알아서…….’
위이이잉-! 위이이잉-!
시국의 상념을 스마트폰 진동이 깨웠다.
시국이 인상을 팍 쓰며 스마트폰을 바라봤다.
박수연의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시국이 전화를 받았다.
“야, 너야말로 곧 중간고사라면서 밤늦게 전화질이야, 전화질이! 중3이잖아! 너 공부 좀 한다며!”
- 귀청 떨어지겠다! 왜 큰 소리야. 그리고 그건 또 어디서 들었대? 너 나 뒷조사하고 다녀?
“네 양아치 동생이 이야기해 주더라.”
- 야! 박철수! 너 이시국한테 내 이야기하고 다녀!
수화기 너머로 박철수가 뭐라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잡히진 않았다.
시국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이야기했다.
“다시 한번 더 경고하는데 용건 없이 전화 걸지 좀 마. 한 번만 더 무의미한 통화를 시도했다간 차단해 버릴……”
- 너 내일 시간 있어? 점심때? 시간 되면 내가 밥……
“없어. 끊는다. 전화 걸지 마라.”
뚝-!
시국은 스마트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침대에다 집어 던졌다.
이미 오늘 배석재와 내연녀의 영상을 찍었기에 내일 따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구태여 주말을 귀찮게 밖에서 보내고 싶진 않았다.
시국은 중단됐던 상념을 이어갔다.
‘…… 어쨌건 배은정과의 거래는 전적으로 이 회장에게 맡길 수밖에 없어. 숫자와 숫자가 오가는 비즈니스는 내 영역은 아니니까. 뭐, 배은정이 이 회장을 구속하려 들지는 않겠지만 혹시 그런 시도를 하면 적당히 경호하는 떡대들 줘 패는 걸로 실력 행사 정도는 해야……’
그때 방문이 열렸다. 시국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나연이가 고개를 빼꼼 내민 채 웃으며 이야기했다.
“오빠 내일 시간 있어?”
문득 시국의 가슴 한편에서 묘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내일? 언제?”
“점심때.”
“왜?”
“엄마랑 영화 보러 가기로 했는데 오빠 딱히 할 거 없으면 같이 가자고. 아빠한테는 물어보니까 내일 일이 좀 있다고 해서.”
시국은 입을 다물었다.
만약 내일 나연이와 유서영을 따라 영화를 보러 나간다면?
절대 영화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쇼핑을 할 것이고 시국은 두 여인의 무의미한 마네킹 놀이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나연이가 방으로 들어와 시국의 어깨를 잡고 흔들며 말했다.
“시간 있지? 같이 가자.”
시국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 미안. 선약이 있어서 말이야.”
“선약? 누구랑? 무슨 약속이야?”
“그…… 아무튼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뭔데? 혹시 여자친구야?”
“그건 아니고…… 아무튼 내일 선약이 있어서 안 되겠네.”
“칫. 알았어. 그럼 다음번엔 꼭 같이 가는 거다? 알겠지?”
“그, 그래.”
“약속한 거다.”
“응.”
나연이는 그대로 뒤로 돌아 방에서 나갔다.
“후우.”
시국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박수연으로부터의 부재중 전화 한 통과 투덜거리는 내용의 문자 서너 통이 들어와 있었다.
그것을 무시하고 시국은 스마트폰 연락처 화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봉길이나 명호랑 점심때 만나자고…… 아니야. 토요일 점심을 그 새끼들하고 보내는 건 좀 아니야. 밥 처먹다 체할 일 있어? 그리고 어쨌건 그 새끼들도 요즘 바쁠 테니까. 그러면…….’
한동안 시국은 망설였다. 그의 표정이 오락가락하고 안색이 여러 차례 변했다.
결국 그는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통화음이 가더니 곧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 뭔데? 쓸데없는 일로 전화하지 말라면서.
“그…… 내일 점심때 말인데. 시간 될 것 같아서.”
- …… 진짜?
“그럼 내가 이런 걸로 구라를 치겠어?”
- 진짜지?
“그래.”
- 그럼 내일 12시까지 신도림역 1번 출구로 와.
“…… 그래. 끊는다.”
뚝-!
시국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그대로 침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래, 밥만 빨리 먹고 집으로 오는 거야.’
* * *
2018년 4월 14일 11시 58분.
북적이는 토요일 점심, 신도림역에서 내린 시국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국은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각까진 이제 겨우 2분 남아 있을 뿐이었다.
‘대충 밥이나 먹고 가야지. 에이.’
그렇게 생각하며 시국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이시국!”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을 호명하자 시국의 시선이 음성의 진원지로 향했다.
공원 벤치에 앉은 여학생, 박수연이 시국을 부르며 손짓했다.
시국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여전히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그쪽으로 걸어갔다.
“딱 맞춰 왔네?”
박수연의 말에 시국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2분 일찍 왔어.”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 좀 앉아.”
“됐고,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뭐 먹을지 좀 찾아봐야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좀 앉아 있어. 햇빛 가리잖아.”
시국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벤치에 앉았다. 박수연과 거리를 둔 채.
박수연은 스마트폰으로 계속해서 주변 맛집 검색을 했고 시국은 불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박수연을 쓱 쳐다봤다.
군청색 스키니진에 흰 티셔츠, 그 위에 걸친 베이지색 가디건 그리고 화장한 얼굴까지.
시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를 찼다.
박수연이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시국을 바라봤다.
“왜?”
그녀의 물음에 시국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이가 몇 살인데 화장이야? 그리고 스키니진 입으면 혈액순환에 별로 안 좋다는 말도 못 들었어? 에휴.”
“이게 또 아재 같은 소리 한다. 그래도 난 차려입기라도 했지, 넌 패션이 그게 뭐니?”
그녀의 말에 시국은 잠시 자기 옷을 내려다봤다.
헐렁한 청바지에 대충 주워 입은 검은색 후드 티.
“밥이고 뭐고 너 옷부터 먼저 사주고 싶을 정도야. 그러니까 아재 같은 소리 하지 말고 너도 맛집 좀 찾아보고 해 봐.”
그러면서 박수연은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시국도 별생각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무의미하게 인터넷 뉴스나 볼 뿐이었다.
“야, 야. 이거 좀 봐봐.”
박수연이 시국의 어깨를 손으로 찌르며 이야기했다. 시국이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시국에게 가까이 다가와 자기 스마트폰 속 화면을 보여줬다.
블로그에 있는 일본 가정식 전문점 리뷰였다.
“여기 고로케가 그렇게 괜찮다는데, 가 볼까? 여기서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한다고 하네?”
문득 미나모모가 떠오르는 시국이었다.
‘안 가본 지도 꽤 됐네. 뭐 한다고 그렇게 됐지? 내일 저녁에 이 회장 데리고 오랜만에 미나모모에서 밥이나 먹을까?’
당연히 생각이 다른 곳에 가 있으니 박수연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야. 왜 대답이 없어?”
박수연이 시국을 살짝 밀며 이야기했다.
시국의 시선이 박수연의 얼굴로 향했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시국의 시선에 박수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왜?”
“오늘 누가 계산하는 건데?”
“응?”
“네가 날 불러냈으니 네가 계산하는 거겠지?”
일본 가정식 전문점 어떠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에 역으로 누가 계산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박수연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몇 번 깜빡이다 입을 열었다.
“으, 응. 당연히 내가 계산해야지. 처, 철수 정신 차리게 해 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불렀으니까.”
“그럼 네가 알아서 정해. 얻어먹는 입장에서 이래라저래라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으니까.”
“……”
그렇게 대략 20여 분 정도를 박수연은 블로그를 뒤지며 주변 맛집을 검색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곳을 찾을 때마다 시국에게 바짝 붙어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네가 알아서 정해.”
결국 12시 35분이 돼서야 박수연은 처음 봤던 일본 가정식 전문점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