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 거물 [Interest]
이정훈의 입에서 스폰이란 단어가 나오자 시국은 기어코 박장대소하고 말았다.
손뼉을 치며 웃는 시국의 모습에 순간 이정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한 조직의 장으로서, 외견상 낙관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위협에 직면한 조직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었다.
그런데 함께 심각하게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시국이, 자신에게 이 길을 걷게 만든 자가 그 이야기를 듣자 미친 듯이 웃는다?
당연히 불쾌하고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정훈의 목소리에는 그러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국은 한동안 웃음을 그치질 못했다.
물론 그의 웃음에는 이유가 있었다.
“푸흐하하하하하!”
그렇게 한참을 웃던 시국이 서서히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마치 여진처럼 산발적인 웃음이 피식거리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올 정도가 됐을 때 비로소 그는 말문을 열 수 있었다.
“미안해. 갑자기 웃을 일이 좀 있어서 말이야.”
시국은 이정훈을 바라봤다. 이정훈의 표정은 얼어붙어 있었다.
“갑자기 웃을 일?”
“있어. 그럴 만한 일이.”
시국은 애써 웃음을 가라앉혔다.
그가 박장대소한 이유는 실로 단순했다.
스폰을 구해야 하지 않겠냐는 이정훈의 이야기와 그가 현재 처한 상황, 그리고 전생에 김양기에게도 똑같은 말을 지금과는 전혀 다른 처지에서 했을 거란 사실.
그 두 가지 모순과 역설에서 문득 시국은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딱히 웃기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시국은 그냥 웃음이 나왔다.
“풉, 크흠. 뭐, 어쨌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고.”
시국의 말에 이정훈은 코로 길게 숨을 내뱉곤 입을 열었다.
“그래. 어쨌건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스폰을 하나 구해야 해.”
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번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강북 신세대파나 강남 럭셔리파의 배후에는 신익겸과 배금성이 있지.’
부천인천연합이나 호남계 조직들과는 달리 강북 신세대파나 강남 럭셔리파는 거물이었다.
경찰조차도 그들이 연루된 사건을 다룰 때에는 조심스런 모습을 보일 정도의 거물.
그것이 두 조직을 상대하는 데 시국이나 이정훈이 부천인천연합이나 호남계 조직들을 상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전략을 취해야 하는 이유였다.
‘두 조직 자체는 내 손으로 와해시킬 수 있어. 하지만 그랬다간 그 배후에 있는 신익겸과 배금성이 움직이겠지.’
보통 명동 신 회장 혹은 명동 사채왕으로 불리는 신익겸은 개인 재산만 2조 원에 육박하는 재력가이고, 배금성은 재계 서열 17위의 대기업 집단인 일신그룹의 오너 일가이자 유력한 차기 회장 후보다.
그들의 후원을 받으며 그들을 대신해 온갖 더러운 일이란 일은 다 저지르는 두 조직을 친다는 것은 곧 두 거물과 싸운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금 상태에서 그 인간들과 잘못 대적하면 결국 전생과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된다.’
어쩌면 오히려 전생보다 더 험악한 처지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직은 2020년이 아니야. 던전도, 몬스터도, 초인도 없는 시대란 말이야. 그런데 지금 내가 자칫 잘못해서 초인으로서의 흔적을 남긴다면 그때는…….’
적어도 전생처럼 곱게 사형 의자에서 죽지는 못할 터였다.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에서 2020년 이전에 초인의 힘을 발휘한 시국을 어떻게든 실험실로 보내려 할 테니까.
‘그렇게는 안 되지. 그렇게는 안 돼. 어떻게 얻은 두 번째 인생인데 또 그렇게는 안 돼.’
시국은 미지근해진 페퍼민트 차를 쭉 들이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 대적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결국 그들에게 모든 걸 빼앗기고 말겠지.’
시국이 이정훈을 바라봤다.
‘나야 어차피 어디로 도망가면 될 일이야. 이 회장이나 유서영도 어떻게든 버티기야 하겠지. 둘 다 보통은 아니니까. 하지만 나연이는…….’
회귀 전에도, 지금도 유일하게 시국이 인간적인 정을 주는 사람은 오직 나연이 뿐이었다.
‘그 아이만큼은 행복해야 해. 전생처럼 그런 비참한 결말을 맞이해서는 안 돼.’
가만히 생각에 잠긴 시국을 바라보며 이정훈이 입을 열었다.
“옛날에 우리보다 앞서 서남권을 통합했던 신백제 씨. 그 양반이 전성기 때 보유했던 재산이 자그마치 200억이었어. 거기다 지역구 정치인들과 친분을 다진 상태였지. 그래서 그 양반은 버틸 수 있었어.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에 비해 너무나도 미약한 처지야. 재산은 80억뿐이고 지역구 정치인과의 접점은 거의 없는 형편이지.”
이정훈의 객관적인 평가에 시국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훈이 말을 이었다.
“당장에야 강북 신세대파도, 강남 럭셔리파도 밀고 들어오진 않을 거야. 서로 눈치 게임을 할 테니까. 하지만 적당히 정리가 되고 나면 그때는 망설임 없이 밀고 들어오겠지.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걸 잃겠지. 이 회장과 봉길이, 명호, 이민철이는 사이좋게 감방에 들어갈 거고.”
“…… 그렇게 되겠지.”
“그걸 막기 위해선 우리도 스폰을 구해야 하는 거고. 맞지?”
시국의 말에 이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국이 텅 빈 잔에서 올라오는 페퍼민트 향을 맡으며 말을 이었다.
“명동 사채왕이나 일신그룹 부회장과 비슷한 체급의 거물. 그런 사람을 우리 스폰으로 잡아야 하는데…….”
시국이 이정훈을 바라봤다.
이정훈이 말했다.
“그런 사람은 흔치 않지.”
“하지만 흔치 않기 때문에 후보군을 좁히기도 편하고.”
시국의 말에 이정훈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맺혔다.
“리스트를 한 번 뽑아보지.”
“서둘러야 할 거야. 길게 잡아 봐야 올해 하반기부터 저놈들이 작업 치기 시작할 거야. 빠르면 5월이나 6월부터 그 짓을 하겠지.”
“최대한 빨리하지.”
“그래. 수고 좀 해.”
시국의 말에 이정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시국이 소각장에서 박철수 패거리를 구타한 사건은 바로 그다음 날 아이들의 입을 타고 빠르게 퍼졌다.
“이시국이란 신입생한테 2학년 일진들이 쳐발렸다.”
처음에 소문은 부정당했다.
“에이. 1학년이 2학년을? 그것도 한 명이 패거리를? 말도 안 돼.”
하지만 소문의 당사자 중 하나인 박철수가 이틀 연이어 결석하고, 그 패거리들이 소문에 대해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 않으면서 소문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와 그 박철수가?”
“복학생 아니야?”
“아니 아무리 복학생이라도 어떻게 혼자서 여러 명을 때려눕혀?”
“운동부란 말도 있던데?”
“유도부야? 아니면 태권도부?”
“걔들 근데 병신들이잖아?”
그리고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메신저에서 메신저로 퍼지며 차츰 과장되기 시작했다.
“신입생이 박철수를 장애인으로 만들었다더라!”
“박철수는 지금 내장이 파열됐고 갈비뼈가 다 으스러진 상태라더라!”
“팔다리를 모두 못 쓰게 됐다고 하더라!”
“혼수상태로 응급실에서 오늘내일한다더라!”
소문은 마침내 구로중앙중 학생들 사이에서 거대한 괴물을 만들어버렸다.
‘……’
3교시 수업이 끝나고 목이 말라 매점으로 들어간 시국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곤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우연찮게 그와 눈이 마주친 몇몇 남학생들이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후우…….’
속으로 남몰래 한숨을 내쉰 시국은 그대로 자판기로 가 음료 한 캔을 뽑았다.
그리고 캔을 따 한 모금 들이켜며 매점에서 나가려던 때에, 때마침 매점으로 오던 박철수 패거리와 마주쳤다.
“히끅!”
한 놈은 시국을 보자마자 딸꾹질을 했다.
몇 놈은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았고 한 놈은 도로 매점을 나가버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매점에 있던 학생들은 소문이 진실임을 확신했다.
자신을 향해 집중되는 시선에 마셨던 음료가 역류할 것 같아 시국은 도망치듯 매점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매점에서 빠져나왔다 하여 그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교실에서도 불편한 시선은 이어졌다.
그저 과묵한 자발적 아싸 정도로 여겼던 동급생이 2학년 일진들을 일방적으로 구타하고, 대장 노릇 하던 놈을 반병신(?)으로 만든 괴물이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었다.
물론 그들에게 대놓고 시국을 쳐다보거나 말을 걸 담력은 없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시국을 몰래 힐끔거리며 자기네끼리 쑥덕거릴 뿐이었다.
“내 친구의 학원 친구가 쟤랑 같은 초등학교 같은 반이었다는데, 그때부터 애들 오지게 패고 다녔데.”
“진짜?”
“자기랑 눈을 3초 이상 마주쳤다고 그 자리에서 눈을 찔러 실명시켰다던데?”
“헐.”
가만히 책상에 엎드려 있던 시국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주 소설을 써라, 소설을 써. 에효. 애새끼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아이들의 수군거림과 힐끔거림은 수업 시간에도 이어졌다.
자연히 분위기는 산만해졌고, 그것을 알아차린 교사들이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젠장…… 이래서 학교는…… 확 엎어버려? 누구 하나 대놓고 줘 패버리면 조용해지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시국은 3교시를 굉장히 예민한 상태로 보내야 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너희들 오늘따라 좀 산만한 것 같다? 무슨 일 있어?”
수업이 끝나갈 때 즈음 교사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거나 하진 않았다.
“어쨌건 다음 수업 때는 집중 좀 하자. 알겠니?”
교사의 당부와도 같은 물음에 아이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왜 하필 이때로 회귀했을까? 이왕 회귀할 거면 성인이 되고 나서, 아니면 최소한 자퇴를 해도 되는 고등학생 때에라도 했다면 지금보단 좀 더 자유로웠을 텐데…….’
아이들과 교사를 바라보며 시국은 그렇게 생각했다.
‘딱 3년만 참자.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등학교는 안 가고 만다.’
잠시 후, 4교시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스피커를 통해 전교에 울려 퍼졌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급식실로 달려갔다.
시국은 가만히 아이들이 다 빠져나가길 기다렸다가 가장 늦게 교실에서 나갔다.
밥을 먹을 때만큼은 최대한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국의 의도는 그런대로 적중했다.
그가 급식실에 들어섰을 무렵은 대다수의 학생이 식사를 끝낸 상태여서 급식실에는 아이들이 거의 없었다.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에서 시국은 밥을 받아 창가 쪽 구석 자리에 가 앉았다.
몇몇 학생들이 자기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시국은 말없이 천천히 수저를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창 시국이 홀로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앉아도 돼?”
한 여학생이 시국에게 물었다.
시국은 가만히 여학생을 바라봤다.
긴 생머리에 새침한 인상의 미녀가 시국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박수연?’
시국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팍에 달린 명찰로 향했다. 빨간색이었다.
‘3학년?’
시국이 다시 여학생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표정과 눈빛에선 그 어떠한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국은 입안의 음식을 삼키곤 대답했다.
“여기 내가 전세 냈어? 앉으려면 앉아.”
“고마워. 그럼 앉을게.”
시국의 말에 여학생은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밥을 먹을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여학생, 박수연은 식판도 수저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시국의 맞은편에 앉아 팔짱을 낀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뭐 하는 년이야? 에이.’
시국은 그녀를 무시하고 밥을 먹으려 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노골적으로 자신을 향한 박수연의 시선에 결국 그는 수저를 놓고 말았다.
시국이 박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밥 먹는 사람 처음 봐?”
다소 신경질적인 시국의 반응에 박수연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너 아까부터 계속 반말이다? 너 1학년 아니야?”
“그러는 그쪽은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오늘 처음 봤어. 아, 어제 매점에서 한 번 본 적 있으니 두 번째구나? 뭐,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긴 하네.”
시국은 인상을 찌푸린 채 박수연을 빤히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며 박수연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 서로 말 놓으면 되겠네.”
시국은 말없이 수저와 식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박수연이 시국을 올려다보며 이야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