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급 빌런의 인생2회차-18화 (18/200)

018 졸업 [New Era]

아무리 정보 경찰이라 할지라도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알아낼 수 있는 정보 또한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차 과장은 스스로가 지닌 확신을 기반으로 이정훈을 조사했다.

그러나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그가 박 실장에게 빨대를 꽂았던 사람임을 알고 있는 만큼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차 과장은 조사 방향을 바꾸었다.

이정훈에 대한 별다른 혐의점을 찾지 못한 그는 서남권 폭력 조직 세력분포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진행했다.

정보국장도 그 정도는 허가해 주었다. 특정 인물에 대한 표적 내사가 아닌 통상적인 정보 경찰의 업무였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추가인력이나 비용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정훈 또한 조직 내부 개혁 작업이나 조용히 하며 부천인천연합과 호남계 조직에 대한 정보만 수집할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2017년 하반기는 큰 사건 없이 지나갔다.

* * *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은 아니겠지요. 다시 만나기 위한 약속일 거야.”

시대가 변함에 따라 졸업식 풍경도 달라졌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졸업식 노래는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로 시작하는 슬픈 선율의 곡이었지만, 2010년대 후반에는 다양한 가요들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것은 시국의 졸업식도 마찬가지여서, 가수 015B의 <이젠 안녕>이 강당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확실히 요즘 분위기가 많이 달러.”

유서영의 말에 이정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때만 하더라도 졸업식이면 5학년이고 졸업생이고 죄다 참여했었는데…….’

곳곳에 비어 있는 자리를 바라보며 이정훈은 새삼 시대가 변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 이렇게 한 시대가 지나가고 새 시대가 오는 거야. 그런 만큼 나도, 우리 조직도…….’

이정훈의 시선이 졸업생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향했다.

유달리 커다란 아이 하나가 때마침 이정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큰 아이, 시국을 향해 이정훈은 가볍게 웃어 보였다. 시국도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이로써 구로초등학교 54회 졸업식을 마치겠습니다.”

이런저런 절차가 끝나고 마침내 사회자가 졸업식의 폐회를 선언했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간간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학부모들은 모두 자기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이정훈과 유서영 또한 시국에게로 걸어갔다.

“축하해.”

유서영이 시국을 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약간은 굵어진 목소리로 시국이 대답했다. 유서영은 그를 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국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연이는요?”

시국이 나연이를 찾음과 동시에

“오빠!”

강당 출입구에서 나연이가 꽃다발을 든 채 환히 웃으며 달려왔다.

“졸업 축하해! 자, 선물!”

꽃다발을 받으며 시국이 환히 웃었다.

“고마워. 이거 사려고 나갔던 거야?”

“응! 엄마가 준 용돈 모아서 산 거야.”

“최대한 오래오래 피어 있게 할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시국은 이정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정훈이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축하한다.”

“고마워요.”

그때 한 남자가 헐레벌떡 강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건설업자 오 사장이었다.

“아이쿠. 우리 이 회장님 아드님 졸업 축하드립니다.”

오 사장은 이정훈에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맙소.”

이정훈도 웃으며 그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이러고 계실 게 아니라, 기념사진 한 번 찍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찍어 주시겠소?”

“아, 물론입니다.”

이정훈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오 사장에게 건넸다.

이정훈과 유서영이 뒤에 서고 시국이 둘 사이에, 나연이가 유서영의 곁에 섰다.

“자, 찍습니다!”

빠르게 세 장을 연달아 찍은 오 사장이 그대로 이정훈에게 스마트폰을 건네주었다.

“고맙소.”

“하하. 아닙니다. 항상 회장님 덕을 많이 보는데 이 정도야 뭐,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하하.”

이정훈과 오 사장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나연이가 유서영에게 이야기했다.

“엄마. 우리 고기 먹으러 가자. 응? 고기.”

“그럴까?”

“응!”

“무슨 고기 먹으러 갈까?”

유서영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시국에게로 돌렸다. 시국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시선을 이정훈에게로 돌렸다.

때마침 오 사장과 대화를 대강 끝낸 이정훈이 자신을 향한 세 사람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모습을 보며 시국이 이야기했다.

“미나모모로 가서 점심이나 먹어요, 아버지.”

“그, 그럴까?”

“나연아. 너 미나모모 가 봤어?”

“미나모모?”

“일식집인데, 거기 회가 정말 맛있어. 나연이 회 좋아하지?”

“진짜 좋아하지!”

“그럼, 거기 갈까?”

“좋아!”

그렇게 네 사람은 미나모모로 향했다.

눈이 녹지 않은 정원이 눈에 들어오는 방에 앉아, 가족은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점심을 들었다.

‘평화로워.’

여전히 어색한 감이 있지만, 그런대로 무난하게 잘 지내는 시국과 유서영, 그들 사이의 어색함을 녹여주고 활기를 북돋아 주는 나연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정훈은 평안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시국에게로 향했다.

불과 반년 만에 13cm나 성장해, 앳된 얼굴만 제외하면 겉보기엔 성인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그를 바라보며 이정훈은 생각했다.

‘이럴 때 보면 그냥 덩치 큰 청소년인데…….’

나연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는 시국의 모습.

그 모습에서 과연 누가 광기 어린 살인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까?

‘과연 넌 정체가 뭐지?’

분명 시국은 이야기했다. 2020년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될 거라고. 그러니 별다른 의문을 품지 말라고.

그러나 이정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어떠한 사물이나 현상에서도 합리적인 혹은 최소한 개연성 있는 무언가를 발견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탓이었다.

때마침 시국의 시선이 이정훈에게로 향했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세요? 할 말 있어요?”

“으, 응? 아니야. 잠깐 뭐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런 이정훈을 시국은 씩 웃으며 바라봤다.

다시 나연이와 유서영 간에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시국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정훈은 생각했다.

‘그래. 2020년까지 기다리자. 어쨌건 난 계약을 했고, 서로가 그 계약에 충실하면 그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정훈은 회를 몇 점 집어 초장에 찍어 입에 가져갔다.

오늘따라 더 싱싱한 미나모모의 광어회를 씹으며 이정훈은 그저 이 상황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 * *

2018년 2월 9일 21시 39분.

클로버 VVIP룸.

상석에는 이정훈이, 그의 우측에는 시국이, 좌측에는 강봉길과 한명호가 앉아 있었다.

강봉길과 한명호가 시국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축하합니더.”

“축하합니다.”

시국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가?”

두 사람이 웃으며 대답했다.

“졸업했다 아입니꺼.”

“제가 가 봤어야 했는데 그때 하필 바빠서.”

시국은 그저 피식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자, 자. 축하는 나중에 하고.”

이정훈의 말에 강봉길과 한명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정훈이 양주를 따 강봉길과 한명호의 잔에 따라 주었다. 그가 술병을 시국에게 건넸지만, 시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신 그는 콜라를 잔에 가득 부었다.

“지가 따라드리겠심더.”

강봉길이 술병을 받아 이정훈의 잔을 채워주었다.

잔이 모두 채워졌지만, 그들은 그것을 곧장 들이켜지 않았다.

이정훈이 시국을 바라봤다. 시국이 이정훈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시선을 강봉길과 한명호에게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예정보다 반년 일찍 작전을 개시하려고 해.”

순간 두 사람의 표정이 굳었다.

시국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동안 밑 작업은 다 돼 있었잖아. 시간을 길게 끌어봐야 좋을 것도 없고.”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둘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시국이 이야기하는 작전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만큼, 두 사람이 느끼는 심리적 중압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한명호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 혹시 왜 시한을 앞당기셨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쪼까 알고 싶은데,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시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답은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시국은 이정훈을 바라봤고 대답은 그의 입에서 나왔다.

“부천인천연합을 중심으로 호남계가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네?”

가장 놀란 것은 한명호였다.

“아, 아니 시방 그게 뭔 소리냥께요? 그 후라덜 새끼들허고 호남계 오야붕들이 하나로 합친다고라?”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우리 쪽에서 꽂아 둔 프락치들의 보고가 일치하니까.”

“아니 가, 갑자기 그 양반들이 와 그런다요? 죄다 쥐약이라도 처먹은 것도 아니고 말이여라.”

“뭐 여러 이유가 있겠지. 최근 대림동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는 조선족 흑룡파 애들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거고, 또 우리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거고 말이야.”

“우, 우리가 말이여라?”

“그래.”

“아니 우덜이 뭘 혔다고 그런다요?”

“뭘 했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뭘 할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하는 거지.”

이정훈의 말에 한명호는 기가 찬다는 듯 연신 “워매.” 소리만 냈다. 강봉길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술잔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정훈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때마침 여러 가지 타이밍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일정이 앞당겨진 것뿐이야.”

이정훈의 말에 강봉길과 한명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 회장님 말씀이 맞심더. 어차피 그 인간들하고는 언젠가는 결단을 내야 했심더. 이왕 이렇게 된 거 마, 후딱 해치우고 싸그리 잡아먹읍시더.”

“그라제이. 강 사장 말대로 그 후라덜 인간들이 고딴 식으로 나오면 우덜이 먼저 선빵을 갈겨야 한당께요.”

강봉길과 한명호는 길길이 날뛰며 부천인천연합과 호남계 두목들을 성토했다.

말이 좋아 성토지, 사실상 그들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에 가까운 욕설이었다.

이정훈과 두 사람이 성토와 비난, 대응책 논의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시국은 그저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타이밍이 절묘했어. 내가 키가 빨리 자라서 좀 앞당긴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작전이 예정보다 빨리 진행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 부천인천연합과 호남계의 통합이 아닌, 시국의 빠른 성장이었다.

‘어차피 그놈들끼리 합친다 해도 뭐, 절대 올해 상반기 안에는 불가능하지.’

다만 절묘한 타이밍에 그들의 통합 행보가 포착됐기에 그것을 명분으로 하여 일을 앞당긴다는 통보를 할 수 있게 됐던 것뿐이었다.

‘마력의 영향인가? 전생보다 반년 정도 성장이 빨라졌어.’

전생에 시국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즉 2018년 7월과 8월 사이에 부쩍 자라 그 키가 죽을 때까지 유지됐다.

이번에도 그렇게 되리라 생각했기에 시국은 작전 개시를 2018년 하반기로 잡았었다.

그러나 2017년 가을부터 눈에 띄게 자라기 시작한 시국은 2018년 2월 9일 현재 이미 전생의 키를 모두 따라잡은 상태였다.

‘그래. 어쩌면 마력 때문일 수도 있어. 전생에는 성인이 돼서 각성을 해 초인이 됐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전생의 이맘때에는 갖지 못했지만, 지금은 가지고 있는 것.

초인으로서의 능력.

어쩌면 그것의 영향으로 성장이 빨랐을 수도 있다 생각하며 시국은 상태창을 불러냈다.

생명력 : 3300/3300, 마력 : 2400/2400, 집중력 : 100%

스킬 : 전투 감각(B), 사안(C), 살인검(B)

B급 초인의 힘을 나타내는 문자와 숫자의 나열이 시국의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아직은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현재까지는 오로지 시국만이 가지고 있는 이 환상적인 능력.

그것을 바라보는 시국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그래. 마력 때문이건 아니면 아침마다 운동한 덕분이건, 그것도 아니면 미나모모에서 자주 회를 먹어서건 앞으로 더 크기나 해라. 이왕 이렇게 된 거 180은 넘어 봐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시국은 상태창을 도로 거두어들였다.

때마침 이정훈이 잔을 들었다. 강봉길과 한명호도 잔을 들었고 시국도 자연스럽게 콜라가 담긴 잔을 들었다.

이정훈이 셋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오늘 이 상무 졸업식에서도 본 거지만, 이제 시대가 변했다. 시대가 변한 만큼 우리도 변해야만 살아남는다. 그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가장 깡패다운 행동을 해야 한다. 다들 마음 굳게 먹고 정신 바짝 차리길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

“건배!”

“건배!”

우렁찬 강봉길과 한명호의 대답과 동시에 네 사람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래. 이번을 끝으로 나는, 우리는 더 이상 깡패가 아니게 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이정훈은 잔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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