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 숙청 [Spy]
“후욱-! 후욱-!”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시국은 공원 산책로를 달렸다.
몸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입에선 단내가 났지만, 시국은 묘한 흥분과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달리던 시국이 공원 산책로 입구에서 멈춰 섰다.
아침 운동을 위해 공원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그의 곁을 지나치는 가운데, 시국은 양손으로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인 채 호흡을 골랐다.
한동안 거친 숨을 내뱉던 시국은 이내 심호흡을 했고 곧 그의 호흡은 차분해졌다.
허리를 곧게 편 시국의 표정은 밝았다.
그대로 시국은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정훈의 빌라가 나타났다.
시국은 곧장 집으로 들어가 욕실로 향했다.
때마침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이정훈이 시국과 마주쳤다.
이정훈이 웃으며 말했다.
“매일같이 열심이군.”
시국 또한 웃으며 답했다.
“이렇게 계속 뛰어주고 하면서 성장판을 자극해야 키가 자랄 거 아니야.”
“그래. 이왕 어릴 때부터 운동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
“내일부터 같이 할까?”
“아니, 나는 사양할게.”
“지금부터 미리미리 운동을 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시국의 말에 이정훈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시국은 이정훈을 지나쳐 욕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정훈은 묘한 표정을 짓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땀에 젖은 옷을 세탁 바구니에 던져놓고 차가운 물을 맞으며 시국은 생각에 잠겼다.
‘본격적으로 조직을 확장하는 건 내년부터다.’
김양기가 죽고 이정훈이 조직을 접수하는 과정은 그럭저럭 매끄러웠다.
김양기 밑에서 행동대장 노릇을 하던 강봉길과 한명호는 시국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클로버의 반달들은 오히려 이정훈을 반기기까지 했다.
유일하게 이정훈이 경계하던 박현수 실장도 조용하긴 마찬가지였다.
사실 시끄럽게 굴 수가 없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미 세력을 다 잃고 그저 클로버 관리나 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내가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어야 해.’
그러나 내부 정리가 끝났다고 해서 당장 외부로 확장을 할 수는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시국이 패싸움에 참여하기엔 너무 작다는 것이었다.
‘최대한 내가 드러나선 안 된다.’
이미 강봉길이 이끄는 영남 출신 부하 셋이 시국의 정체를 알고 있다. 그들의 입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판국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시국이 당장 전쟁을 일으키고 거기에 참전한다?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또 가린다 하더라도, 조그만 체구 때문에 금세 그의 정체에 대한 의혹이 퍼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경찰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들이 날 감시하려 들겠지. 귀찮은 일이야.’
김양기를 죽이고 그의 조직을 접수하고, 이정훈을 아버지로 삼은 것은 어디까지나 2030년 이후 한국이 초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됐을 때 숟가락 얹고 편히 살기 위함이었다. 그 전까진 최대한 외부에 드러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시국의 바람이었다.
그런 만큼 아직 초인과 던전이 나타나지도 않은 2017년부터 쓸데없는 의혹의 시선을 받을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내년 하반기면 적어도 외관상으론 성인과 다를 바 없을 만큼 자란다.’
전생에 시국은 중1이 되던 해에 굉장히 빠르게 성장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150대에 불과하던 키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때 즈음엔 170대 초중반까지 컸다.
‘물론 그게 끝이었지만…….’
어쨌건, 그 정도 키만 돼도 별다른 의혹 없이 복면을 쓰고 패싸움에 끼어들어 상대 조직을 압도적인 힘으로 분쇄할 수 있을 터였다.
‘잠깐 쉬어 가는 시기라고 생각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시국은 샤워를 끝냈다.
욕실에서 나오자 때마침 나연이가 눈을 비비며 자기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응? 오빠 벌써 씻었어?”
나연이의 물음에 시국이 웃으며 답했다.
“아침에 운동하고 왔으니까.”
“우웅. 열심히 하네.”
“나연이 너도 내일부터 나랑 같이 뛸까?”
“됐어.”
그렇게 이야기하며 나연이는 시국을 지나쳐 욕실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웃던 시국은 이내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나 나연이나, 그래. 올해는 좀 편하게 지내야지. 올해는.’
물론 나연이는 내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편하게 지낼 것이라고 생각하며 시국은 등교 준비를 서둘렀다.
* * *
늦은 저녁.
구로경찰서 근처 식당.
테이블 가운데 불판에서 구워지는 돼지고기를 집게로 뒤집으며 한 중년인이 이야기했다.
“너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잘 안 돼? 무슨 일 있냐?”
중년인의 물음에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내, 박 실장은 굳은 얼굴로 답했다.
“좀 바빴습니다, 선배님.”
중년인, 구로경찰서 정보과장 차성곤은 그 대답을 듣곤 피식 웃었다.
“그래, 바쁘겠지. 보스가 바뀌었으니까.”
“…… 알고 계셨습니까?”
“야 임마. 그럼 동네 반달들도 다 아는 사실을 우리가 모를까? 벌써 한 달도 넘은 일을?”
“……”
“야. 다 익었다. 네가 좀 잘라.”
차 과장은 박 실장에게 집게와 가위를 건네주었다. 박 실장은 그것을 받아 들고 껍데기와 삼겹살을 자르기 시작했다.
박 실장이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 자르자 차 과장은 그의 잔과 자기 잔에 소주를 따랐다.
차 과장과 박 실장이 가볍게 건배를 한 후 술을 한 모금 넘겼다.
“크으으.”
기분 좋은 소리를 낸 차 과장이 잔을 내려놓고 고기를 집어 들었다.
별다른 야채도 없이 기름장에 곧장 찍어 한 입 먹은 차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며칠 쳐 굶기라도 했나…… 정보과면 밥도 잘 처먹을 거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박 실장은 내색하진 않았다.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단순히 고기 먹자고 부르신 건 아니신 것 같은데…….”
대신 박 실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날 왜 불러냈냐?
그 질문에 차 과장은 피식 웃으며 고기를 마저 씹어 넘기곤 답했다.
“내가 뭐, 별다른 이유로 널 부르디?”
“…… 제가 아는 정보는 이미 선배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래. 나도 다 알지. 김양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정훈이 앉은 거.”
“…… 김양기의 소재를 묻고 싶은 겁니까?”
“뭐, 보나 마나 어디 묻힌 채 썩어가고 있겠지. 이미 뒤진 놈은 내 알 바 아니야.”
“그럼?”
차 과장이 상체를 앞으로 살짝 숙였다.
“정확하게 어떻게 이정훈이 김양기의 자리를 대신한 건지, 강봉길이랑 한명호는 왜 이정훈이 대가리가 되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는지. 그걸 알아 와.”
“……”
박 실장은 입을 다물었다.
차 과장은 그 모습을 보며 그저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가 다시 고기를 집어 기름장에 묻힌 후 입으로 가져갔다.
한동안 입을 다문 채 차 과장을 바라보던 박 실장이 자기 잔에 소주를 따랐다. 그리곤 한입에 털어 넣었다.
차 과장이 집게를 들어 박 실장의 앞 접시에다 고기를 몇 점 올려 주었다.
“네가 사는 건데 좀 먹어. 나 혼자서 다 먹기엔 나도 양심이란 게 있어서.”
그러나 박 실장은 고기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가 차 과장을 보며 말했다.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이제 저한텐 그 정도 힘이 없습니다.”
“……”
“재작년에 출소한 이후로 김양기가 클로버 실장 직함을 주긴 했지만 말 그대로 실장 자리일 뿐이었습니다. 주류 및 안주 재료 재고 관리와 직원들 급여 관리 정도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뿐입니다.”
“……”
“사실상 저는 주먹 세계에선 은퇴한 상태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안 하시겠다?”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못 하겠단 겁니다. 당장 김양기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전 모릅니다. 단지 저는 앞으로 조직을 이정훈이 이끌 거라는 통보만 받았을 뿐입니다. 이게 지금 제 위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마따나 현재 조직 내에서 그의 위상은 일개 관리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당장 이정훈이 일 그만두고 다른 일을 알아보라 하면 꼼짝없이 실업자가 되는 것이 그의 처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차 과장이 요구하는 정보를 캐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걸 모르는 차 과장이 아니었기에 그는 박 실장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 과장이 자기 잔과 박 실장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차 과장이 잔을 들자 박 실장도 잔을 들었다. 두 잔이 허공에서 부딪쳤고 이윽고 소주는 두 사람의 입안으로 부어졌다.
잔을 내려놓고 차 과장이 입을 열었다.
“현수야.”
“…… 네…….”
“너 구로고 몇 기냐?”
“…… 25기입니다.”
“그래. 넌 25기, 난 13기. 우리가 비록 경찰과 달건이의 관계이긴 해도, 더 깊게 파고들면 같은 동문 아니겠냐?”
“……”
“내가 아무렴, 후배를 단순하게 프락치로만 써먹으려 하겠냐?”
차 과장이 박 실장을 바라봤다. 박 실장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3년 전에 김양기 대신해서 네가 빵에 들어갔을 때, 강봉길이랑 한명호가 네 밑에 있던 애들 싹 정리했었지.”
“……”
“출소했을 때 너 마중 갔던 인간은 아무도 없었고.”
“……”
“단순히 팔다리 다 잘려서 써먹기 편하단 이유 하나만 가지고 내가 널 프락치로 삼았겠니?”
“……”
차 과장이 박 실장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그리고 그의 접시에 고기를 또 몇 점 더 얹어 주었다.
“현수야.”
“……네.”
“이정훈 재끼고 네가 클로버 먹어라.”
박 실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무슨…….”
“말 그대로야. 네가 클로버 먹고 박현수파로 만들어라.”
“…… 진심이십니까?”
“그럼, 내가 벌써 술에 취했겠니?”
“……”
“네가 적당히 정보만 캐오면 그 뒤론 내가 다 알아서 요리해 줄게. 김양기의 시체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 새끼를 시체로 만든 인간들에겐 관심이 있거든.”
“……”
“이정훈, 강봉길, 한명호. 이 셋이 분명 김양기 재끼는 데 연루가 돼 있을 거야. 네가 증거가 될 만한 정보만 가져와 주면, 약속하겠는데 1년 내로 그 세 놈 다 빵에 넣는다. 그럼 그때 네가 조직 전체를 홀라당 먹으면 되는 거고.”
“……”
박 실장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차 과장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젓가락을 들어 고기만 집어 먹을 뿐이었다.
한동안 박 실장은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말도 하지 못했다.
‘…… 독약이다. 이거 독약이야.’
분명 매력적인 제안이긴 했다.
이정훈과 강봉길, 한명호를 모두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기를 올려 주겠다는 것.
단순한 관리직 직원에서, 보유 자산 규모가 30억에 달하는 조직의 보스가 된다는 것.
분명 그것은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문제는 그 제안을 한 주체가 경찰이라는 것.
‘보스가 돼도 난 경찰 따까리 짓이나 해야 한다. 하지만…….’
박 실장의 뇌리로 강봉길과 한명호가 스쳐 지나갔다.
불과 3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자기 앞에서 실실 웃으며 아부하기 바빴던 인간들.
하지만 그가 김양기 대신 감옥에 갔다 온 후 모든 세력을 잃자 박 실장, 박 실장 거리며 깔보기 시작한 인간들.
‘어린놈 새끼들이…….’
식탁 아래 무릎 위에 올려진 박 실장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이정훈도 마찬가지야. 학벌만 좋은 샌님 주제에 이건 왜 계산이 틀렸냐, 재고 수량 확인 다시 해라, 인건비가 왜 이렇게 많이 나갔냐…….’
팔다리 다 잘린 후 자신을 업신여기던 세 사람의 태도를 떠올리자 박 실장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잔을 들더니 한입에 소주를 털어 넣었다.
그리곤 젓가락을 집어 들고 접시에 놓인 고기를 그대로 집어 빠르게 입에 가져갔다.
제대로 씹지도 않고 고기를 모조리 삼킨 박 실장.
그 모습을 바라보는 차 과장의 입 꼬리가 크게 위로 올라갔다.
“…… 시간을 좀 주십시오. 당장엔 힘듭니다.”
박 실장이 이야기했다.
차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 나도 뭐 급하게 정보를 가져오란 건 아니었으니까. 기다리지.”
“…… 선배님 독단입니까?”
“뭐가?”
“날 조직의 보스로 올리겠다는 것 말입니다.”
“아직까지는. 근데 네가 정보만 가져오면 바로 본청에다 올릴 거야.”
“……”
“야 임마. 내가 설마 안 되는 일을 갖다가 너한테 이야기하겠니?”
“……”
“야, 고기 탄다. 빨리 먹어.”
차 과장이 고기 몇 점을 박 실장의 접시에 올렸다. 박 실장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하나씩 집어 먹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차 과장의 웃음은 더욱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