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 가족 [Children]
“일어났니?”
유서영의 물음에 시국은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함으로 답을 대신했다.
시국이 말없이 그녀를 지나쳐 욕실로 들어가자 유서영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시국을 뒤로하고 나연이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연이는 천사의 쉼터에서 챙겨 온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나연아. 나연아? 일어나야지. 밥 먹고 학교 가야지.”
“우웅…….”
“일어나자, 나연 공주님.”
“우웅……5분만 더 언니…….”
“에이. 그러지 말고 일어나자.”
유서영이 나연이를 깨우기 위해 씨름하는 것을 문밖에서 바라보며 이정훈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발걸음을 옮겨 욕실로 향했다.
“있어.”
욕실 안에서 들리는 시국의 목소리에 이정훈은 잠시 그 앞에서 기다렸다.
“으으응…….”
여전히 졸린 눈으로 기지개를 켜며 나연이가 방에서 나왔다.
“잘 잤니?”
이정훈의 물음에 나연이는 하품을 한차례 한 후 대답했다.
“네, 잘 잤어요. 아저씨는요?”
왜 서영이는 언니고 난 아저씨일까? 라는 의문을 가볍게 넘기고 이정훈이 대답했다.
“그럭저럭.”
“그럭저럭?”
“그래.”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그런 건 아니고.”
“악몽 꾸셨구나?”
“그것도 아니고.”
“그럼 왜 그럭저럭?”
“글쎄?”
두 사람이 의미 없는 만담을 나누며 벽을 차츰 허무는 동안 샤워를 끝마친 시국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으며 나왔다.
“어? 오빠 언제 일어났어?”
나연이의 물음에 시국은 짧게 “좀 전에.”라고 답할 뿐이었다.
그는 이정훈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때마침 나연이의 이부자리 정리를 끝내고 나온 유서영에게도 가볍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곤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유서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이정훈의 마음은 그리 편하지 않았다.
“자, 나연이도 씻으러 가야지?”
“응, 언니.”
나연이가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이정훈은 유서영의 손을 잡았다.
유서영이 이정훈을 바라봤다.
“왜?”
“그냥…… 고마워서.”
“에이. 또 그 소리다.”
유서영이 가볍게 이정훈의 팔을 꼬집었다. 이정훈은 웃으며 가벼운 애교를 보여주었다.
“아직은 애들이 어색해할 거야.”
이정훈의 말에 유서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이런 건 원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오빠가 이야기했을 때부터 각오했었어. 그러니까 나는 나연이랑 친해질 테니까, 오빠는 시국이랑 친해져. 알았지?”
“그래. 노력해보자.”
두 사람의 대화를 문 너머에서 듣던 시국은 쓴웃음을 지었다.
거울 앞에 서서 시국은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나연이가 잘 적응하고 있어.’
천사의 쉼터에서 이곳 고척동 빌라로 온 후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
그간 나연이는 제법 잘 적응했다.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도 제법 친하다 싶은 친구를 만들었고, 집에서도 유서영이나 이정훈과 곧잘 어울리며 저녁이 되면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봤다.
‘마치 가족처럼…….’
나연이가 유서영을 언니로, 이정훈을 아저씨로 부른다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분명 그 모습은 여느 평범한 가정과 다를 바 없었다.
전생에 나연이가 갖지 못했던 것, 철이 든 이후로 늘 동경했던 것.
호칭 문제를 제외한다면 나연이는 확실히 이 집안에 동화돼 가고 있었다.
‘나까지 그럴 필요는 없겠지.’
반면 시국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그가 이정훈과 유서영의 양자로 입양된 것 자체가 전략적 선택이었기에, 이정훈과의 계약에 따라 성인이 되어 독립할 나이가 되면 이 집에서 나가 홀로 유유자적하게 전생의 김양기와 같은 삶을 살 계획이었기에.
그랬기에 구태여 가족적 유대를 쌓을 필요가 없다 판단한 만큼 당연한 행동이었다.
‘나연이도 함께 입양시킨 게 정말 제대로 된 선택이었어.’
나연이의 인생뿐 아니라 이 집안을 위해서도, 적어도 독립하기 직전까지는 살아야 하는 이 공동체를 위해서도 그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시국은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가 옷을 다 차려입었을 때 즈음 이정훈이 방으로 들어왔다.
“나연이를 데려온 게 올바른 선택이라고 생각하지?”
들어온 이정훈을 바라보며 시국이 말했다.
이정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된 거야.”
“흐음.”
“왜?”
“서영이가 약간 걱정을 하고 있어서.”
“무슨 걱정?”
“네가 적응을 잘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더군.”
이정훈의 말에 시국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이정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서영이는 너도 나연이처럼 대하고 싶어 해.”
“그게 안 되니까 나연이도 함께 입양하자 한 거야. 분명 말했을 텐데?”
“알아. 하지만…….”
시국이 이정훈을 쳐다봤다.
“우리 계약 기억 안 나? 당신은 내 법적 부친이 돼 내 재산을 관리해주고, 난 당신을 건실한 기업인으로 만들어주고. 아닌가?”
“…… 그랬지.”
“그럼 된 거잖아. 그 계약에는 가족이니 아들이니 부모니 하는 요소가 없었어.”
“……”
“나연이하고나 잘 지내. 그 아이를 친딸처럼 키우라고. 난 10년 뒤면 이 집에서 사라지겠지만 나연이는 아닐 거니까.”
“……”
“내가 왜 나연이도 같이 입양하라 했는지를 잘 기억하라고.”
“…… 그렇게 하지.”
이정훈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가는 것을 보고 시국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난 계약에 없는 일은 안 해. 전생에 당신은 그걸 잘 알았고, 그래서 계약에 없는 일을 해 달라 하지도 않았지. 강봉길이나 한명호와는 다르게 말이야. 이번 생이라고 다를 건 없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시국은 등교 준비를 마쳤다.
* * *
학교 앞까지는 이정훈과 유서영이 함께했다.
“다녀올게. 언니, 아저씨.”
그렇게 이야기하는 나연이에게 유서영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잘 다녀와. 그리고 엄마랑 아빠라 불러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나연이가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어.”
“노력해 볼게.”
천진난만한 대답을 끝으로 나연이는 학교로 뛰어 들어갔다.
시국은 가볍게 이정훈과 유서영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나연이를 따라갔다.
두 사람의 미묘한 시선을 뒤로하고 교실로 들어간 시국은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았다.
동급생들은 시국을 힐끔거리기만 할 뿐, 먼저 다가와 말을 걸지도 시비를 걸지도 않았다.
의도적으로 시국이 배출한 미량의 마력이 자연스럽게 그런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교사도 마찬가지여서, 따로 시국에게 무언가 질문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사실 질문을 하더라도 시국이 대답 못 할 것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전생에 공부와 담을 쌓았다곤 할지라도, 최소한 초등 교육 과정에서 요구하는 지식은 갖추었으니까.
‘귀찮아.’
다만 어린아이들이 창의력을 발휘해야 할 장소에서 귀찮음에 찌든 자신이 나설 필요는 없었기에 그는 조용히 그저 창밖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일 것이며 의무 교육이 끝나는 때까지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 시국은 생각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는 것까지 그가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연이 오빠! 나연이 오빠!”
점심시간이 지나고 저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던 때에 한 여학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시국을 찾았다.
‘나연이 친구?’
하교 때 몇 번 본 적이 있었던, 양 갈래 머리를 한 조그만 여자아이가 다급히 자신을 찾자 시국은 본능적으로 무언가 문제가 생겼음을 알아차렸다.
“뭐야?”
시국이 여자아이에게 다가갔다.
여자아이는 시국을 보자마자 그의 손목을 잡았다.
“지금 나연이가…… 아무튼 빨리 좀 와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다급함과 두려움에 시국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곧장 여자아이를 따라 5학년 교실로 내려갔다.
“으아아아앙-!”
멀리서도 확연히 들리는 나연이의 울음소리.
“맞잖아! 너 고아잖아!”
그리고 나연이를 핍박하는 남자아이의 언어.
시국의 눈빛에 일순간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으아아아앙-! 나 고아 아니야! 엄마아빠 있어! 오빠도 있다고!”
“구라 치고 있네! 너 고아원에서 왔잖아! 금천초에 있는 내 친구가 다 말해 줬어!”
“아니야!”
“맞잖아!”
아이들이 만들어낸 인파의 벽을 힘으로 밀쳐내며 시국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빠! 으아아앙-!”
나연이가 시국에게 달려와 안겼다. 시국은 굳은 표정으로 나연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오빠는 무슨! 둘 다 고아면서!”
시국의 시선이 남자아이에게 향했다.
뭘 처먹었는지, 5학년 주제에 덩치가 중학생만 한 놈이었다.
시국은 놈의 눈을 노려봤다.
“뭐! 쳐다보면 뭐! 좁밥처럼 생긴 게.”
남자아이의 말에 주변에 있던 다른 남자아이들 몇이 낄낄거렸다.
“나연이 좀.”
시국은 양 갈래 소녀에게 나연이를 넘기고 남자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뭐? 쳐다보면 뭐 어쩔 건데!”
남자아이의 호기로운 말에
“야 그냥 발로 차!”
“완전 좁밥 새끼잖아!”
“내가 대신 싸워줘?”
주변 남자아이들의 부추김 속에서
“우리 오빠 좁밥 아니야!”
나연이의 항변과
“진영이가 6학년이랑 싸우나 봐.”
“선생님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6학년인데 덩치가 별로 안 크잖아. 질 것 같은데?”
“뭐 해? 선생님 불러.”
중립인 척하는 방관자들의 소곤거림을 들으며 시국은 남자아이 앞에 섰다.
“너, 이름이 뭐야?”
시국의 물음에 남자아이가 웃었다.
“오진영! 내가 이래 봬도 구로초 5학년 짱이야. 너랑 쟤랑 금천초 나왔지? 거기 5학년 짱이 내 친구야. 같은 도장 다녀.”
“느그 부모 돈 많니?”
“졸라 많지!”
“그래서 애새끼를 개새끼로 키웠구나?”
“뭐?”
남자아이, 오진영이 발끈했다.
그의 어깨가 움찔했다.
하지만 그의 주먹이 날아오기 전에 시국의 마력이 먼저 그에게 쏘아졌다.
“……!”
오진영은 주먹을 날리려던 자세 그대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숙련된 초인이 아니면 감당하기 힘든 힘을, 기껏해야 초등학교에서 짱이니 뭐니 하는 애가 감당할 순 없었다.
“으으으…….”
근원을 알 수 없는 공포가 해일처럼 오진영에게 밀려들었다.
모든 생명체가 지닌 생존 본능이 오진영에게 경보를 보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에게는 그러한 경보를 받아내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의지나 능력은 없었다.
대신 원초적이고 육체적인 반응만이 있을 뿐이었다.
“으으으……”
오진영의 바지춤이 축축해졌다. 지린내가 복도에 퍼졌다.
하지만 시국은 거기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쥐어팰 가치도 없지.’
마력이 더더욱 오진영을 압박했다.
뿌직-!
오진영의 바지 뒷부분이 불룩해졌다.
지린내보다 독한 구린내가 복도에 퍼졌다.
그제야 시국은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자신을 압박하던 힘이 사라지자 오진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진영의 바지를 불룩하게 했던 것이 눌리고 밀리며 놈의 바지 밖으로 새어 나왔다.
“으! 오진영 똥 쌌어!”
“헐~”
“으으.”
“웩!”
“아 진짜! 카레 먹었는데!”
마력은 오로지 오진영에게만 집중됐기에, 그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시국과 오진영이 눈싸움을 하다가 오진영이 오줌을 지리고 곧장 똥을 지린 것으로만 보였다.
“쌌네, 쌌어.”
“똥쟁이!”
“똥장군!”
여기저기서 오진영을 놀리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시국은 망연자실한 표정의 오진영을 내려다보며 한마디 툭 던졌다.
“똥싸개 새끼가.”
그리고 나연이에게로 갔다.
훌쩍이던 나연이는 어느새 코를 막은 채 웃고 있었다.
“똥 쌌대요! 똥 쌌대요!”
“똥싸개 새끼!”
“똥싸개 새끼!”
여기저기서 오진영을 향한 놀림이 날아들었다.
오진영의 충실한 따까리를 자처하던 아이 중 일부조차도 거기에 가담했고, 가담하지 않은 아이들은 그저 멍한 표정으로 오진영을 바라보기만 했다.
“씨! 아니야! 똥싸개 아니야!”
오진영이 항변했지만,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똥싸개래요! 똥싸개래요!”
“아니라고!”
결국 오진영은 오열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되었고, 그제야 교사가 뛰어왔다.
하지만 이미 교사가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교사는 오진영을 급하게 씻기고 체육복으로 갈아입힌 후 양쪽 보호자에게 차례로 연락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