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
301화
마침내 뱀과의 사투가 끝이 났다.
스스스스.
가슴에 박힌 심장, 아자토스의 파편이 사라지자 중성체처럼 보이던 뱀의 몸은 본래 육신의 주인이었던 티아마트로 돌아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탑의 정복자, ‘똬리를 튼 뱀’을 해치우셨습니다.]
[지배자의 부재로 탑의 시스템이 탑에 새로운 법칙을 세우기 시작합니다.]
[시스템 갱신이 시작됩니다.]
쿠구구구구구.
예고 없이 찾아온 전조에 탑이 1층부터 100층까지 정신없이 뒤흔들리며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뭐하고 있어. 빨리 피하지 않고.
세이비어는 걱정스런 마음에 건우를 호되게 질책했다.
열흘간 이어진 기나긴 사투.
전생부터 현생까지 이어진 싸움에 마침내 결착을 냈지만, 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건우는 양손으로 티아마트를 안아들며 세이비어에게 말했다.
“앞으로 탑은 어떻게 될까요?”
탑이 지각변동을 일으킨다.
이는 곧 탑의 시련이 대폭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탑의 생계를 완전히 뒤틀어놓은 것은 역시 교란자인 건우였다.
-글쎄. 일단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네 몸부터 챙겨. 머나먼 미래의 일은 후손에게 맡기거라.
“짐은 넘기기 싫은데요.”
건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발을 뗐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종말 앞에서 모든 것을 잃었던 로한 이그너스.
다시금 반복되는 역사를 끊기 위해 최건우로 다시 태어나 기어이 종말의 길을 끊어냈다.
‘해냈어.’
그 충족감에 건우는 진심으로 입가에 웃음꽃을 피우며 천천히 자취를 감췄다.
***
뱀의 사후 3일차.
결착을 낸 건우는 곧장 발을 내딛은 곳은 라페아와 니파가 기다리고 있는 20층, 엘더리아가 아니었다.
발을 내딛은 층은 37층 위저드 킹덤, 매그놀리아였다.
스윽.
그 발걸음이 향한 곳은 아리따운 숲에서 고아들에게 강의를 펼치는 남자였다.
뿔테 안경을 쓴 어수룩한 금발의 남자.
그는 율라 학파 최후의 비전을 잇고 있는 마법사, 요한이었다.
“……누구시죠?”
요한이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건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건우는 무례인줄 알면서도 그에게 대화를 제안했다.
의외로 요한은 건우의 제안에 승낙해 아무도 없는 언덕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푸른 초목이 우거진 곳.
눈부신 태양은 지표면 곳곳에 생기를 북돋우며 생명의 기운을 뿌리고 있었다.
“저를 찾아온 목적이 뭡니까?”
요한은 여전히 경계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건우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이제 가식 그만 떨어도 돼. 네가 본체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숨바꼭질은 이제 좀 지겨워.”
“……그게 무슨?”
“아직까지 내가 너와 대화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차이트?”
“…….”
건우의 이 한 마디에 요한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스스스스.
곧 전신에서 금빛의 광채를 발하며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아아, 들켰는걸. 이렇게 보는 건 오랜만이지, 건우?”
그냥 오랜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긴 세월이 걸렸지만, 건우는 입꼬리를 피식 올리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탑에서 온 두 가지 목적을 모두 이루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뱀을 퇴치하는 것.
둘째는 탑 어디선가 자취를 감추고 있는 차이트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아, 나 찾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마법의 일환인 시드(Seed)야. 어디까지나 일회용이라는 말이지. 요한은 실제로 있는 남자야.”
건우에게 정체를 발각 당했단 사실이 어지간히 분했는지 차이트는 볼을 쀼루퉁하게 부풀렸다.
피식.
건우는 그대로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우선 죽방 한 대만 때리면 안 되겠냐? 너 때문에 많이 힘들었는데?”
“좋아. 대신에 궁금한 것에 대해서는 평생 답 안 해줄 거다.”
차이트는 오히려 쳐보라는 듯 볼을 들이댔다.
건우는 난색을 표하며 결국 주먹을 거둬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아. 진짜 얄밉네. 너, 다른 사도들한테도 이렇게 해?”
“히히. 나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일관적으로 대한다고. 아, 그래도 슈타크는 진짜로 날 죽이려고 하니까 가급적 모습은 보이지 않아. 걔는 빡돌면 진짜로 앞뒤 가리지 않고 다 뒤집어버리는 얘거든.”
“…….”
성좌 주제에 사도가 무서워서 숨다니…….
어처구니없는 진실에 건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곧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자토스의 파편 중 하나를 처치했으니까 나한테 보상을 줬으면 싶은데.”
“좋아. 원하는 게 뭐야?”
차이트는 모처럼 성의를 보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건우는 그런 차이트를 보며 말했다.
“그전에 먼저 궁금한 것부터 물어볼게. 아자토스의 파편 문제는 해결이 된 거야?”
차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
“아니. 아직 해결하고 있어. 내 본체도 그것 때문에 제법 고생하고 있고.”
“…….”
건우는 그 말을 생각 외로 무겁게 받아들였다.
차이트가 고생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진정한 적이 있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천덕꾸러기지만 이 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벌이며 정의를 실천하고 있는지는 건우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차이트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건우가 염려하는 부분에 대해서 솔직담백하게 말했다.
“너희들이 있어서 내 할 일이 줄어드는 건 맞아. 그리고 너는 그 사도들의 리더로 선택받은 존재고. 앞으로도 고생할 수밖에 없어.”
“…….”
짓궂은 말투에 건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했다.
‘하긴, 지금까지 만난 사도들 중에서는 내가 가장 정상인 축에 속하기는 하지.’
속으로만 한 생각이지만, 그 생각을 정확히 캐치한 차이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그건 아니야. 셋 다 또라이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나마 건우 네가 적합해서 선택한 것뿐이야.”
[사멸의 링을 시전했습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차이트의 목에 칠흑의 링이 휘감겼다.
“어허!”
차이트는 단숨에 그것을 파훼하고는 싱긋 웃어 보이며 건우를 야단쳤다.
‘못 말리겠군.’
그 장난스런 성격에 장단을 맞춰주기 정말 어려웠지만, 건우는 가까스로 인내심을 발휘하고는 차이트에게 말했다.
“두 번째 소원은 세이비어를 지박령에서 해방시킨 뒤, 성불해주는 거야.”
“그도 많이 반성했으니 그렇게 할까.”
차이트도 고개를 끄덕이며 세이비어에게 가한 제약을 해금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누구 맘대로 날 성불시켜! 죽으려고!
유령의 모습으로 튀어나온 세이비어가 차이트를 적극 만류하고는 건우에게 호통쳤다.
“……할아버지, 여행의 목적이 성불 아니었어요?”
건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과 눈싸움을 벌이는 세이비어를 쳐다봤다.
세이비어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내 목적은 네 인생 막바지까지 너를 지켜보는 거다.”
“오호! 세이비어, 가족애가 애틋한데?”
차이트의 감탄에 세이비어는 얼굴을 화끈 붉히며 소리쳤다.
-죽을래?!
“하하하. 아마 난 죽지 않을걸. 그래도 너보다는 건우와의 약속이 먼저야. 세이비어.”
차이트는 바로 세이비어의 구속을 해제하고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만 성불은 세이비어, 네가 원하는 때에 언제든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나 대신 건우를 인생 막바지까지 챙겨줘.”
“정말 인생 끝까지 쫓아오려고요?”
건우가 질색하며 세이비어를 쳐다보자 세이비어는 흥, 콧소리를 내며 자신의 포부를 말했다.
-당연하지, 인마. 언젠가 손주들에게 할아버지 소리도 들어봐야지.
그는 이미 건우가 꿈꾸지도 못한 이후의 여생을 상상하는 것 같았다.
스슥.
바로 그때, 차이트의 몸 주변에 금빛 서기가 피어오르며 서서히 신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시 인간인 요한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짐작한 건우가 차이트에게 말했다.
“나에게 힘을 줘서 고마워. 차이트.”
차이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 고유의 힘이야.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앞서 말했지만, 대비해야 할 거야. 진짜 종말 전쟁은 네가 아직 살아있을 때 일어날 테니까.”
때 아닌 예언에 건우는 이맛살을 좁히며 말했다.
“평생 싸우면서 살라는 건 아니겠지?”
“행복하게 살되, 쉽게 긴장은 놓지 말라는 거야. 그 종말이 수 년 뒤에 벌어질지, 수십 년 뒤에 벌어질지는 나도 예측이 안 돼. 다만 그때까지 너는 꼭 행복해줬으면 좋겠어.”
“안 그래도 난 행복하게 살 예정이거든.”
건우의 말에 차이트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마침내 그의 전신은 금빛으로 뒤덮여 연령도, 성별도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변모했다.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최건우.
그렇게 차이트는 마지막 한 마디를 마치고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
쿠구구구 콰앙!
탑에서 지각변동이 일어난 후, 건우가 비틀어놓은 진리가 다시 한 번 뒤죽박죽 섞이며 탑에 파란을 불러왔다.
3년 동안 평화를 유지했던 지구에서도 5성급 이상의 몬스터가 출몰해 긴박한 사태를 맞아야만 했다.
이는 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종로의 중심지.
상공 30미터 너머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키에에에엑!
결계 안쪽에서는 구두룡이라고 일컬어지는 30미터 크기의 히드라가 꿈틀거렸다.
등급만 해도 무려 6성급.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이런 어마어마한 레이드를 치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각 길드의 S급 헌터들은 안색을 굳히며 눈앞에 들이닥친 던전 브레이크를 대비했다.
콰칭!
예상대로 게이트의 결계는 곧장 깨졌고,
키에에에에엑!
나타난 히드라가 독이 깃든 숨결을 내뿜어 주변의 철골들을 녹이고 민가까지 큰 피해를 끼쳤다.
“……더 이상은 안 되겠어.”
우연찮게 집 근처에서 발생한 대규모 게이트에 춘삼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다가가다 곧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한국에 정말 말도 안 되는 규모의 피해자가 발생할 게 너무나 뻔했다.
‘형님은 가급적 사용을 자제해달라고 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심지를 굳힌 춘삼은 건우가 탑으로 떠나기 전 주었던 아티팩트, 이터널 큐브를 꺼내 발동했다.
딸칵.
“응?”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큐브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우라질! 설마 고장 난 거야?! 이런 빌어먹을!”
쿠쾅!
절규하는 춘삼을 향해 때마침 히드라의 9개의 머리 중 하나가 그대로 춘삼을 집어삼키려 달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 춘삼의 귓가에 의미심장한 음성이 스쳐지나갔다.
“갸우.”
“갸우?”
마치 어린 아이 같은 음성에 당황한 춘삼이 옆으로 고개를 홱 돌리려던 때,
스스스슥! 콰아앙!
히드라 머리 사이에서 생성된 거미줄이 히드라의 움직임을 구속했다.
키에에에엑!
히드라는 어떻게든 거기에 저항하려고 했지만.
“갸우.”
은백발을 휘날리는 여아가 자아내는 실뜨기에 둥그런 구체의 형태로 강제로 구속당하고 말았다.
유일하게 현장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춘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경악했다.
“서, 설마 6성급 몬스터를 저렇게 만든 거야?”
“뭐가 그렇게 이상하냐? 7성급이 6성급을 농락하는 건데…….”
의문에 대한 해답은 바로 곁을 스쳐가는 남성이 해주었다.
“혀, 형님?!”
그 낯익은 음성에 춘삼은 눈을 부릅뜨며 뒤를 쳐다봤다.
스릉.
헌터들 사이를 스치고 건우가 히드라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니제르 일식, 암섬.
쇄애애애액! 콰아아앙!
검이 빚어낸 검은 오러가 마치 광선처럼 쏘아져 히드라의 몸을 가루로 분쇄해버렸다.
쿠구구구 콰아아앙!
히드라의 독과 피, 그리고 뼈가 그대로 안개로 화돼 주위 사람들의 호흡기로 파고들려 했으나…….
스읍!
이를 지켜보고 있던 코콘이 입을 벌려 안개를 모조리 흡입해버렸다.
“갸우!!!”
모처럼 진미를 맛봤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무척이나 생글생글했다.
“뭐, 뭐야?! 저 사람……!”
웅성웅성.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뒤늦게 건우를 쳐다봤고, 어깨에 루나 다이크를 걸쳐든 건우는 춘삼을 향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나 왔다.”
***
종로에 위치한 한적한 공원.
재회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기 전.
슬쩍.
춘삼은 건우 일행을 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먼저 벤츠 안에서 배달시킨 산더미 같은 도시락을 코콘이 허겁지겁 먹고 있었다.
젓가락은 엉성하게 쥐었는데, 반찬을 집어 입에 넣는 속도는 기가 막히게 빨랐다.
다음으로 늑대 귀를 가진 소년, 렌은 건우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무척이나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건우의 곁에 있는 아리따운 여인, 라페아와 니파.
무심코 산책을 나온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녀들을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춘삼은 그녀들과 건우 사이가 무언가 애틋한 관계라는 것을 어렴풋하게 눈치 챘다.
‘에이, 설마 고자라고 소문날 정도로 둔탱이인 형님이 진짜로 뭔가 있겠어?’
“……너, 뭔가 내가 굉장히 짜증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찌릿!
건우가 눈매를 지그시 좁히며 노려보자 춘삼은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전 언제나 기특한 생각만 하기로 유명한데요.”
‘하여간 저 입 하나는 절대 죽지 않지.’
늘 변함없는 마이페이스에 건우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춘삼은 라페아와 니파를 번갈아 쳐다보다 건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님, 다양한 사람들을 사귀었다는 건 알겠는데, 우선 저분들이 어떤 분들인지 소개를 해주시는 게 어떨까요?”
“아 그, 그게…….”
건우는 얼굴을 화끈 붉히며 한순간 말을 더듬다 가까스로 그녀들의 소개를 했다.
“내 아내가 될 사람들이야.”
“?”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춘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에라, 될 대로 되라지.’
건우는 부끄러움을 무릅쓰며 다시 한 번 입을 뗐다.
“나 장가간다고.”
“둘 중 누가 형수님인가요?”
춘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건우는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둘 다.”
“…….”
춘삼이 머릿속에서 건우의 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까지 잠시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모든 것을 이해했을 때.
“네?!!!!”
춘삼은 경악하며 턱을 떨어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