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SS급 리커버리 마도사-292화 (292/308)

292화

[42층, 린데바움]

스크랩 마운틴을 떠나 건우가 도달한 곳은 아직 개척이 되지 않은 거대한 산의 정상이었다.

해발 9210m.

산을 타고 불어오는 곡풍에 몸 곳곳에 서리가 낄 만큼 서늘한 고지대였지만, 밑에서 펼쳐진 장엄한 광경에 기분이 좋은지 건우는 피식 입 꼬리를 올렸다.

-국기는 꽂아야지. 이놈아.

무심코 건네온 세이비어의 농에 건우는 아쉬운 표정으로 답했다.

“태극기를 챙겨오지 못했네요.”

-챙겨오면 진짜 또라이라고 할 뻔했다.

“그건 평소에도 자주 하는 말 아닌가요?”

-크흠.

찔리는 게 없잖아 있었는지 세이비어는 헛기침을 하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건우에게 물었다.

-……린드버그 일은 어떻게 된 일이냐?

이미 건우가 린드버그의 몸을 재구축한 것은 알고 있지만, 건우는 정확히 그가 어떤 존재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정확히 자신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머리로 정리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생각이 어느 정도 정리됐다고 확신했는지 세이비어가 그 이유를 물었다.

건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차이트의 힘을 얻은 순간 무심코 확신이 들었어요. 린드버그의 에고는 활동이 불가능해 소멸 직전에 놓인 거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요.”

-그래서?

“하지만 원래 상태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 에고만 살린다는 가정 하에 몸을 재구축했고, 에고에 담긴 기억은 모조리 리셋이 돼버린 거죠.”

몸을 재구축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했다.

튜토리얼 보상을 통해 얻은 재창조 스킬을 사용해 린드버그의 몸을 에고에 맞게 재구축하면 되는 것뿐이니.

하지만 가장 까다로운 것은 에고를 만지는 과정이다.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렸다가는 사라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에고를 살리는 것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기존에 살았던 린드버그 자체의 기억은 소실돼버렸다.

이야기를 들은 세이비어는 진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찌 보면, 환생이란 개념이 더 걸맞겠구나.

“저도 거기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이걸로 잘 된 건가?

어쩌면 어린 크루아에게 부담이 되는 짐을 떠안긴 건 아닐까?

라는 우려스런 표정을 지을 때.

-아마 너에게 감사할 게다. 인연은 결코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한 것일 테니.

세이비어의 격려에 건우는 안심이 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뭐, 다 좋지만, 우선은 네가 불행하지 않기를 차이트에게 기도하마.

“기도해야 되는 대상이 틀린 것 같은데요?”

자신의 성좌이기는 하지만, 장난꾸러기인 녀석은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상황이 재밌게 굴러갈 것인가? 그런 악랄한 고민에 빠질 놈이었다.

-하긴.

세이비어는 착잡한 표정으로 건우의 말에 공감했다.

-하지만 이제 곧 너한테 큰 재앙이 들이닥칠 것 같구나.

“에이, 설마. 제가 속을 썩이긴 했어도 죽이지는 않겠죠.”

-너의 연인들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들인 걸 잊었나보구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후웅! 콰아아아아앙!

느닷없이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산 정상을 향해 휘몰아쳤다.

쿠구구구구 콰아아아앙!

회오리바람이 빗어낸 풍압이 주변 일대를 휩쓸어 눈사태까지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앙!

“…….”

졸지에 두 개의 재앙을 눈앞에 둔 건우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베드 엔딩 아니냐?

“잘 수습해봐야죠.”

대답과 동시에 건우는 손을 슬쩍 들어올렸다.

[나선의 경계를 시전했습니다.]

반경 30km 안에 있는 눈사태 지대는 기다랗게 생성된 나선의 경계에 갇혀 더 이상 무너지지 않고 가로막혔다.

휘이이잉! 콰아아앙!

그러나 그보다 빠른 속도로 접근한 회오리바람은 나선의 경계를 피해 암벽까지 깎아버리며 건우를 향해 휘몰아쳤다.

건우는 당황하지 않고 다음 권능을 발휘했다.

[디스트릭 필드를 시전했습니다.]

순식간에 뻗쳐나간 금빛의 장막에 회오리바람 스킬은 마치 없었던 것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순식간에 두 가지 재앙으로부터 벗어났지만, 경고를 가하는 세이비어의 목소리는 한층 날카로워졌다.

-방심은 금물이다. 진짜는 이 다음이다.

쇄액!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서는 미네르바를 창의 형태로 빚은 라페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설원에 발을 사뿐히 내딛는 그녀의 모습은 흐드러진 꽃처럼 아름다웠다.

“오, 오랜만이야.”

그런 그녀에게 건우는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지만.

타앗!

라페아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건우에게 창을 휘둘렀다.

풍압을 일으키는 그 기세가 실로 날카로웠다.

카앙!

하지만 건우는 어렵지 않게 팬텀 스피릿 소드로 이를 막아내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끼기기기기깃! 카아아앙!

라페아는 지지 않겠다는 듯 능수능란하게 창을 휘둘렀다.

근거리에서 펼쳐지는 창술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교한 솜씨.

건우는 종이 한 장 차이로 창의 궤도를 빗겨냈다.

끼이이이익!

불똥이 튀기며 철과 철이 맞닿는 소음이 고막을 심히 자극했지만.

라페아의 기세는 꺼지지 않고 더욱 더 강해졌다.

휘이이잉.

어느 순간.

그녀의 창날에는 서서히 소용돌이가 맺히며 기동력과 관통력이 한층 더 높아졌다.

후우우웅! 카아앙!

이윽고 그녀의 창날에서 폭풍과도 같은 찌르기가 시전되자 건우는 니제르 십식, 위천을 활용해 그녀의 공격을 빗겨냈다.

끼기기깃! 콰아아앙!

아슬아슬하게 빗겨간 창격은 산의 일부를 함몰시키며 다시금 눈사태를 불러일으켰다.

[회귀의 링을 시전했습니다.]

건우는 즉각 권능을 발해 산이 파괴되기 전의 모습으로 되돌렸다.

타앗!

그리고는 더 이상 사태가 커지기 전에 무기를 버리고 그녀의 양손을 붙들며 그대로 넘어졌다.

라페아는 안간힘을 주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했지만, 우악스러운 건우의 힘을 이기지 못해 곧 새침한 표정으로 운을 뗐다.

“이제는 연약한 여자를 힘으로 억압하는 구나.”

“‘연약한’이랑 ‘억압’이란 표현은 잘못된 것 같은데. 너무 그렇게 무섭게 나오면 도망간다고.”

“도망가지 못하게 팔, 다리를 다 자르면 될 일이지.”

오싹!

농담이라고 치기에는 살벌한 그녀의 표정에 건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라페아는 새침한 표정을 풀지 않고 그런 건우에게 말했다.

“도망가지 않고 먼저 해야 될 게 있을 텐데.”

그녀의 충고에 건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만 용서해줘.”

“흥!”

어림없다는 듯 라페아는 고개를 홱 저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우면서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던 건우는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걱정끼쳐서 미안해.”

나름 진심이 와 닿았는지, 라페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바보.”

“앞으로 더 바보 같은 짓을 많이 저지를 거야.”

상쾌하게 웃는 건우의 얼굴을 보며 라페아는 슬며시 건우의 뺨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

한순간,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의 동공이 맑은 호수에 파문이 일어나는 것처럼 정신없이 뒤흔들렸다.

스윽.

이윽고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히려는 찰나.

“흐흠.”

가까스로 정상 등반에 성공한 니파가 불편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움찔!

깜짝 놀란 건우는 민망한 표정으로 니파를 쳐다봤다.

“와, 왔어?”

“……분위기 좋네.”

니파는 시샘 어린 눈길로 라페아와 건우를 쳐다봤다.

라페아는 뚱한 표정으로 니파에게 말했다.

“눈치 없이 끼어들다니…….”

“눈치가 있어서 끼어든 거거든.”

찌릿!

그렇게 두 여인이 눈을 마주치며 많은 감정을 나눌 때, 건우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슬며시 발을 뗐다.

그러다…….

“또 어딜 도망가!”

라페아와 니파가 한 목소리로 다그치자 건우는 그대로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광경을 유령의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던 세이비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탑에서 교란자라고 불려도, 자기 여자들에게는 한없이 약캐일 뿐이니. 쯧쯧.

나름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란 그로서는 이해하고 싶은 일이 아니지만.

두 여인에게 구박을 받는 그 모습은 한없이 정겨워 보였다.

-양손에 꽃이라니. 에잇! 쯧쯧! 천벌 받을 놈.

이 이상 같이 붙어 있어봤자 분위기만 깨는 눈치 없는 노인 취급을 받을 테니, 세이비어는 슬며시 뒤로 물러나며 자취를 감췄다.

***

정상 위에 지어진 통나무로 지어진 오두막.

타닥, 타닥.

건우는 불쏘시개로 난로의 불을 피우며 재회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참이었다.

“자.”

건우는 라페아에게는 홍차를, 그리고 니파에게는 코코아를 건네주었다.

“왜 나만 단 거야.”

니파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코코아를 가리키자 건우는 피식 웃으며 답해줬다.

“어른스런 척을 해도 니파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잖아. 단 것도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는 모습이 보기 안타까워서.”

“…….”

취향을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니파의 얼굴이 곱게 상기됐다.

후룩.

그리고 애써 부끄러움을 감추려 코코아를 들이켰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라페아는 눈매를 지그시 좁히며 건우에게 말했다.

“니파까지다.”

“?”

생뚱맞은 그녀의 말에 건우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라페아는 설명해주지 않고 후룩 홍차를 들이켰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지?’

두 여인의 미묘한 기류에 건우는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었지만, 곧 본격적인 용건을 꺼내들었다.

“볼프강이랑 렌은?”

“건우, 네가 말한 대로 스크랩 마운틴에 도착해 터를 잡고 있는 중이야. 이참에 클랜, ‘은빛의 날개’도 그곳에 정착할 생각인 것 같아. 조금 힘든 여정이겠지만 말아. 1층에 있는 렌의 어머니, 시야는 라페아의 부하가 데리고 오기로 했어.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니파의 설명에 건우는 안심한 듯 웃어보였다.

자신의 영지라고 린데바움의 주민들에게 큰소리를 쳤지만, 정작 관리를 안 하면 그 위신이 크게 떨어져 덤프 칠드런이 다시금 크게 위협을 당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무위도 신망도 높은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줘야 했다.

여기서 건우가 선택한 이들이 바로 볼프강과 은빛 날개의 무리였다.

그들은 탑에서 뱀에게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단체로, 늘 고난을 겪으며 방랑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건우는 그런 그들에게 은둔할 수 있는 아지트로 스크랩 마운틴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덤프 칠드런의 보호를 부탁했다.

‘렌 녀석도 행복하게 살겠네.’

건우는 피식 웃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다음 질문을 건넸다.

“다른 특이한 사항이 있을까?”

니파는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상층에서 강림한 성좌들이 하층 곳곳에서 불쑥 튀어나와 시련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어. 얼마 전에 나타났다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신들을 척살하며 소문이 뜸해졌지만…….”

‘내 예상을 뛰어넘은 신들이 하계에 강림했나보네.’

건우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소문으로 보아하면, 펜리르가 무척이나 빠른 속도로 신을 제거해가고 있었지만, 이 사태가 온전히 수습이 될 지는 아직까지 미지수였다.

하지만 니파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뭐가 있어?”

“한 남자가 너를 찾아왔어.”

“누군데? 그 사람은 지금 어디 있는데?”

‘이 시기에 나를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지?’

니파는 곤란한 표정으로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여기에 왔어.”

“여기에 있다고?”

똑똑.

반문하기 무섭게 노크 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가워. 당신이 교란자인가. 과연 풍채가 보통이 아닌걸.”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칼을 가진 미청년으로……

양 끝에 날개가 달린 모자와 신발, 두 마리 뱀이 휘감긴 독수리 날개의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293.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