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8화
머릿속으로 인연이 닿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동료를 잃을 뻔했다는 아찔한 상황.
앞으로는 그것보다 더한 광경이 펼쳐질 수 있었다.
수척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렌.
관에서 영원한 잠에 빠진 라페아.
머리에 안대를 한 채, 흐느끼는 니파.
탑 밖을 벗어나 현세에 침습한 뱀으로 인해 위기에 처한 지혜와 춘삼 등.
그것은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 될 역사의 참극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초조, 그리고 적을 괴멸시키겠다는 의지가 하나로 모인 순간.
건우는 마침내 71층에 도달했다.
[71층, 똬리를 트는 뱀의 진영]
휘잉.
적의 진영은 하늘을 부유하고 있는 거대한 성이었다.
적어도 수십만은 머물 것 같은 전략적 요충지이자 이동 요새.
건우가 소유하고 있는 비마나, 스키드 블라드니르의 크기를 최대로 늘려도 저 요새 앞에는 개미 정도에 불과했다.
이제 곧 전쟁이 벌어질 것을 직감한 세이비어는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산책을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좋잖아요. 모처럼 드라이브도 즐겼고.”
푸드득.
건우는 자신을 이곳까지 안내해 준 가이드 버드를 검지에 앉힌 뒤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건우가 가이드 버드에게 요구한 행선지는 71층, 똬리를 트는 뱀의 진영.
레전드 아티팩트답게 가이드 버드는 ‘똬리를 트는 뱀’이 구축한 스타웨이로 건우를 인도해 줬고.
건우는 스타웨이를 통해 불과 반나절도 안 되는 사이에 30층 이상의 시련을 건너뛰고 단숨에 71층에 다다랐다.
-조심해라. 지금 너의 목숨은 태풍 앞에 놓인 촛불 신세니까.
[최건우]
▶직업: 시간의 어릿광대
▶레벨: 374
▶칭호: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무는 자
▶체질: 공령지체: 마나 축적을 위한 특별한 연공식 없이 마나를 쌓을 수 있습니다. 그 외 기감이나 정령과 친화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전용스킬
-복원 외 13종.
▶보유 포인트: 250,000,000pt
▶스테이터스
[근력 20,300] [민첩 31,030] [체력 10] [마력 320,000][맷집 10,300][카리스마 5,030] [행운 5,000]
*사자 소생의 대가로 체력 수치가 일주일간 대폭 감퇴됩니다.
다른 스테이터스들은 비교적 준수했지만.
제일 중요한 체력은 10.
제 아무리 교란자라고 해도 잘못 날아온 돌멩이에 애꿎은 타격을 입고 죽을 판국이었다.
미친놈이 아닌 이상, 이런 어마어마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탑에서 제일 큰 클랜을 치겠다는 결심은 감히 하지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탑에서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미친놈이 한 명 있다.
그것이 바로 교란자, 최건우였다.
피식.
건우는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최소한의 보험을 두고 침략을 감행한 거니까.”
대답 직후, 건우는 눈앞의 시스템 창을 살펴봤다.
<칭호: 생과 사의 경계를 허무는 자>
-설명: 거듭된 죽음의 위기를 회피한 뒤, 명계 왕의 손아귀에서 망자를 강탈한 자에게 주어지는 타이틀.
*이 타이틀을 사용시, HP의 개념이 적용되지 않고 데스 토큰이 10개가 쌓이면, 죽음에 이른다.
*데스 토큰: 일격에 데미지 1000 이상의 타격을 입을 시, 몸 주변으로 형성되는 검은 색 구.
*10개가 쌓이면, 예외 없이 죽음에 이른다.
*퇴치한 몬스터의 MP를 2%씩 착취할 수 있다.
엘프로드 타이틀을 포기했기 때문에, 마나는 세계수의 백업을 받을 수 없으니 리스크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건우에게는 이 타이틀을 선택하는 것 외에 선택지는 남아있지 않았다.
‘누적된 데미지가 1000만 아니라면, 데스 토큰을 카운트 할 필요도 없이 끝낼 수도 있어.’
이 말은 설령 999 데미지를 받더라도 데스 토큰은 생성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잘만 사용하면, 7성급과 비슷한 한정 불사의 영역에 다다를 수도 있다.
-부질없는 희망이다. 목숨을 가볍게 여기지 말거라. 네가 벌이려는 건 어디까지나 이 탑에서 두 번째로 벌이고 있는 도박이다.
건우의 생각을 읽었는지, 세이비어는 엄중히 경고했다.
“가볍게 여긴 적 없어요. 저도 이제는 좋아하는 사람이랑 알콩달콩 살고 싶다고요.”
-얼씨구.
결단을 마친 건우는 마격, 리바이던을 높이 들어올렸다.
[메테오를 시전했습니다.]
스슥, 스슥, 스슥, 스슥.
하늘 끝에서 별처럼 수놓인 운석들이 리바이던이 겨냥한 공중 요새를 향해 단숨에 추락했다.
***
콰아아아앙!
하늘 끝에서부터 쇄도해오는 메테오의 세례에 클랜원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뭐, 뭐야?”
상공 30km, 절대 침투 불가에 나타난 순간, 모든 것을 괴멸시키는 그들의 요새가 어이없게도 운석에 파묻혀 사라질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뭣들 하고 있어! 빨리 요격해!”
클랜에 중진들은 사태를 일찌감치 간파해 명을 내렸고.
클랜원들은 하늘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메테오를 요격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푸르게 빛났던 하늘은 거대한 폭발과 함께 폭발의 잿더미와 연기로 뒤덮여 우중충한 색깔로 변모했다.
그래도 탑의 최강의 클랜답게 대처에서 여유가 묻어나왔다.
뚜벅뚜벅.
때마침 성채에서 모습을 드러낸 플레어는 빠득 이를 갈며 메테오의 파편이 튀는 곳을 제멋대로 누비기 시작했다.
“프, 플레어님. 다, 다치십니다.”
“다친다고? 누가 그런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희번득 눈을 뜬 플레어의 얼굴에는 푸른빛 문신이 잔뜩 도사려 있었다.
오싹!
그 모습을 지켜본 클랜원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금세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걱정해 준단 말인가.
십존, 상위 랭킹 3위, 아크로드 플레어.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진 플레이어로 종족은 다름 아닌 반신이었다.
스스스.
플레어는 스키드 블라드니르에 타고 있는 건우를 유심히 노려보다 손길에 서서히 새하얀 빛을 집결시켰다.
“……목숨도 위태로운 주제. 뱀이 우습게도 보였나 보군.”
콰아아아아앙!
전신의 힘을 끌어올린 플레어는 손아귀에 집약된 빛을 쏟아냈다.
열여섯 갈래 쪼개져 흩어진 섬광은 메테오를 지워버리며 스키드 블라드니르를 향해 거침없이 쏟아졌다.
***
존재 그 자체를 지워버리는 새하얀 플레어.
고온이 밀집한 강렬한 빛은 주변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며 이내 스키드블라드니를 향해 다다르고 있었다.
[루체테를 시전했습니다.]
그것을 요격하기 위해 리바이던에서 생성된 유사 오러와 함께 빛이 난사됐지만.
콰드드드득! 콰앙!
빛 무리는 루체테마저 가뿐히 지워버리며 건우를 향해 집결했다.
[나선의 경계를 시전했습니다.]
건우는 어쩔 수 없이 권능을 발해 전함 전체를 경계로 감쌌고.
콰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앙!
강렬하기 그지없는 플레어는 경계에 가로막혀 허무하게 소멸했다.
‘위험하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건우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이 브렌넨을 사냥할 때보다 더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상대는 탑 내 최강의 클랜을 결성한 상위급 플레이어들.
저 전력의 총체라면, 고생은 하겠지만 충분히 7성급 브렌넨을 사냥할 수도 있으리라.
콰아아아아앙!
그 증거로 플레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섬광을 끝없이 난사하며 스키드 블라드니의 접근을 막아서고 있었다.
-녀석들은 이미 너의 정보를 꿰차고 있다. 네가 저 땅에서 발을 내딛어 브레넨을 소환한 순간,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것을 인지하고는 전력으로 막아내는 거야.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면, 전략을 긴히 수정해라. 이대로 수세를 굳혀봤자, 너는 마력 고갈로 죽도 못 쑤는 신세가 될 게다.
“어쩔 수 없겠네요.”
세이비어의 충고에 건우는 눈을 감다가 리바이던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대신, 양손에 두 자루의 사인참사검, 적과 청을 꺼내들었다.
그와 동시에 스키드 블라드니르를 감싸던 나선의 경계도 해제했다.
콰아앙!
그것을 기회로 여겼는지, 플레어의 하얀 빛줄기가 덮쳐왔고 건우는 지체 없이 검을 휘둘렀다.
니제르 십식, 위천(暐踐:Illusion trample)
쇄애애애액!
대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검은 오러의 참격.
‘요격은 소용없어. 어차피 위력으로 날 따라잡을 수 없어.’
그 광경을 지켜본 플레어는 한껏 비웃음을 날리다가……
콰아아아아앙!
이내, 건우의 검격이 그의 섬광을 빗겨내는 것을 보고는 경악했다.
“뭐?!”
끼깃!
플레어의 빛 무리에 올라탄 검은 검격은 기괴한 마찰음을 자아내더니, 곧 그의 빛줄기를 올라타 궤도를 비틀어버렸다.
제 몫을 다한 검격은 그대로 소실됐지만.
기세를 업어 탄 스키드 블라드니르가 성채를 향해 단숨에 돌진하고 있었다.
쇄액! 콰앙! 쇄액! 콰앙!
어떻게든 그것을 요격하기 위해 플레어가 섬광을 난사했지만.
건우는 같은 방법으로 공격을 빗겨내며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교란자를 잡아!!! 이 땅에 이럽션 웨일을 소환시켰다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는다!”
“흐아아아압!!!”
플레어의 다급한 경고에 클랜원들은 일제히 의기투합했다.
크아아아아앙!
함성에 맞춰 본 드래곤을 탄 망자의 군단이 건우를 급습하기 위해 무수히 하늘에 떠올랐다.
족히 봐도 수천에 이른 군세.
둘러싸여 있다가는 건우는 끊임없는 공중전을 치러야 될 판국이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이 중첩됐지만.
피식.
건우는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입을 뗐다.
“브렌넨만 생각했다가는 큰 오산이야. 멍청이들아.”
[게이트가 생성됐습니다.]
갑판 위에서 생성된 거대한 게이트에서는 두 마리의 보스, 네메시스와 세피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라라라라
소환되기 무섭게 건우의 의도를 알아챈 네메시스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앙!
노랫소리를 들은 망자들은 급격히 혼란에 빠졌고, 그로 인해 제어가 사라진 본 드래곤들이 제멋대로 날뛰며 기껏 구축한 진형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다.
이것은 다음 공격을 가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는 건우의 전략이었다.
“……세피아.”
[찰나의 복원을 시전했습니다.]
건우의 권능에 둘러싸인 세피아는 천천히 전성기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과거, 인류를 멸망시킨 7성급 대재앙의 마물이라 불렸던 모습이었다.
두근.
[데스 토큰이 생성됐습니다.]
그녀를 소환한 대가로 1000 이상의 데미지를 입은 건우의 머리 위로 검은 구체가 형성됐다.
적이 아닌 아군에 의해 자신의 생명줄을 앞당긴 결과를 불러왔지만.
앞으로 불러올 파급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고통이었다.
게다가 이그너스 연공식이 9성에 이른 지금.
7성급의 세피아를 유지하는 일도 아직까지 여력이 충분했다.
카앙!
검자루에 힘을 연신 쥐었다 풀던 건우는 그대로 세피아에게 명령을 내렸다.
“부숴버려.”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피아는 손가락을 퉁기자,
싸아아아아아아.
허공에는 똬리를 튼 뱀의 성채와 크기도 모양도 완전히 똑같은 얼음의 성채가 그들의 진영 바로 위에서 거꾸로 뒤집혀 생성됐다.
수십만이 머물 수 있는 거대한 창공의 요새.
그것과 크기도 모양도 똑같은 얼음의 성채가 하늘을 뒤덮자, 클랜원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이, 이게 7성급.”
“무, 무슨 수로 막아. 저걸?!”
압도적인 스케일의 공격에 넋을 놓는 순간.
콰콰콰콰콰콰쾅!
얼음의 성채는 그대로 부서져 똬리를 튼 뱀의 진영을 덮쳤다.
크아아아아앙!
드래곤들과 라이더는 손 쓸 새도 없이 빙괴에 파묻혀 그대로 사라졌고.
이윽고 눈사태가 들이닥친 것처럼 클랜의 성채마저 빙결에 파묻혔다.
279.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