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장소를 옮겨 이야기가 시작된 곳은 한 여관의 테라스였다.
찌릿!
두건의 남자는 아직도 건우를 경계하고 있었고.
반면, 건우는 상당히 놀랍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미지 회복이 빨라. 십존까지는 아니지만 이 녀석도 탑에서 분명 하이랭커야.’
-하긴 네 양팔을 단숨에 두 박살냈으니 보통 녀석은 아닐 게다.
그와 벌인 타격전을 떠올린 건우는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방심을 한 점이 있다면, 그와 밀접해 초근접전을 벌였다는 것뿐이다.
지축조차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근력과 파괴력.
아마 다시 한 번 붙는다면, 그와 거리를 일절 좁히지 않고 원거리전으로 농락했으리라.
-너 방금 전에 치사한 생각했지?
‘그럴 리가요.’
건우는 모른 척 시치미를 떼며 대화를 시작했다.
“서로 자기소개를 해 볼까? 내 이름은 최건우야. 너희는?”
안경을 낀 마도사 여인은 두건의 남자의 눈치를 살피다 입을 뗐다.
“제 이름은 샤를리제, 그리고 이분은 헤라우스예요. 눈치채셨다시피 저희는 뱀에게 대항하는 클랜, 은빛 날개의 일원입니다.”
“왜 터무니없는 짓을 하는 걸까? 녀석의 힘은 잘 알 텐데.”
건우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그들의 행동 목적을 물었다.
-네 자신한테 해야 될 말 아니야?
세이비어는 그 말을 또 비꼬아 던졌지만, 건우는 눈 한 번도 깜박하지 않았다.
후룩.
두건의 남자, 헤라우스는 차를 들이켠 뒤, 천천히 입을 뗐다.
“……헛된 발버둥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너는 모른다. 녀석의 힘에 유린당한 세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한순간이지만, 건우와 헤라우스의 눈빛에 구슬픈 느낌이 담겨 있었다.
렌과 샤를리제는 직감적으로 그 분위기를 감지했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그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보였다.
그러나 경계가 어느 정도 풀렸는지, 헤라우스는 물어보지 않았던 이야기마저 술술 풀어나갔다.
“37층에 온 목적은 발할라가 이곳에서 엄청난 실험을 은밀하게 진행 중이기에 그것을 막으려고 온 거다, 율라 학파에 전해진 비전이라면 그것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잠깐만. 어째서 그렇게 이야기를 술술 푸는 거야?”
건우는 이해가 되지 않은 듯 이야기를 제지했다.
헤라우스는 시크하게 웃으며 말했다.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거다.”
그렇게 말하고는 그는 은근슬쩍 렌을 쳐다봤다.
후룩.
달콤한 코코아를 후룩 들이켜면서도 이 대화에 관심이 쏠려 렌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펫 시터.”
“누가 펫 시터야!!”
건우의 장난 어린 답변에 렌은 발끈 소리치며 일어났다.
요 근래, 코콘의 탄생으로 가장 고생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럭 성질을 내는 것도 잠시.
렌은 곧 차분한 표정으로 자신의 소개를 했다.
“렌이에요. 나이는 14살이고요.”
“……아직 어리군.”
헤라우스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건우와 렌에게 말했다.
“……블루 티어즈는 건네주지. 대신 조건이 있다.”
“…….”
이미 뺏었으니까 주고 말 것도 없는데.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헤라우스의 진지한 눈빛에 건우는 진지하게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이미 말했지만 37층, 매그놀리아는 현재 위험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발할라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너희는 이곳을 떠나라.”
“걱정해 주는 거야?”
“천만에. 방해가 되는 것뿐이다.”
차가운 말투와 달리 그 안에 담겨 있는 감정이 상냥함이라는 것을 눈치챈 건우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흔히 말해. 그런 건가? 츤데레. 이 정도면 우리 쪽 동료인 니파보다 심한데?”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
헤라우스는 소매를 걷어붙이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고려해 볼게. 근데,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뭐지?”
“발할라는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거야?”
“기밀이라 전부 말해 줄 수 없지만 녀석은 자신이 모시고 있는 성좌와 동격의 존재가 되려 하고 있다.”
“…….”
헤라우스의 말에 건우는 발할라의 음모가 어느 정도 엿보였다.
그것은 발할라를 안다기보다 그가 모시고 있는 성좌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발할라의 성좌는 ‘똬리를 튼 뱀’
뱀의 정체까지 간파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이어진 뱀의 힘은 아마 무언가를 창조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었다.
세이비어 역시 같은 생각을 했는지 생각했던 답을 내뱉었다.
-예를 들어 7성급 몬스터라든지.
7성급의 몬스터, 대재앙의 마물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것들은 과거 인류 멸망 직전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크게 부각시켰다.
창빙의 궁주, 세피아.
이럽션 웨일, 브렌넨.
심연을 삼키는 뱀, 프리메라.
거미의 여왕, 아라크네.
생긴 것도 지니고 있는 힘도 가지각색이지만.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들조차 공포에 빠뜨리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뱀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힘을 보인 적은 없지만.
이런 엄청난 마수들을 창조하는 것만으로도 그 힘은 구태여 상상할 필요는 없다.
만약 발할라가 뱀과 동격의 존재가 되려 한다면 그 역시 7성급의 몬스터와 버금가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게 틀림없었다.
“……설마?!”
생각이 여기까지 다다르자, 머릿속으로 33층에 있었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라크네의 허물로 만들어진 구울.
자신의 스승이 탑에서 최강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마법사라고 발언한 네크로맨서, 뤼제.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럼 우리는 이만 가보지.”
용건을 마쳤는지 헤라우스와 샤를리제가 자리에 일어섰다.
건우는 쓴웃음으로 그들에게 이별을 고했다.
“몸조심 하라고.”
“너희들이야말로.”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두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등을 쳐다보지 않았다.
‘……어딘가 묘하게 닮았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렌은 뒷머리를 긁적이다 헤라우스의 등을 쳐다봤다.
“……형. 나 잠깐 저 사람이랑 이야기하고 와도 돼?”
“너무 멀리 가면 안 된다.”
“응.”
건우의 허락에 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면에 폴짝 떨어져 헤라우스를 쫓았다.
‘갑자기 왜 저러지?’
건우는 렌의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후륵 차를 들이켰다.
뚜벅.
바로 그때, 일부러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듯 로브를 몸에 둘러쓴 사내가 허락도 없이 테라스에 진입하더니 건우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아직까지 얌전히 있어 주는군. 교란자여.”
“…….”
일순간, 건우의 눈빛은 싸늘해졌다.
정체를 물으려고 하는 찰나. 그는 스스로 자신의 로브를 벗었다.
스윽.
다부진 체격에 멋들어지게 길들어진 턱수염. 상반신은 거대한 근육이 온전히 드러나 있어 무척이나 야만적이 분위기를 풍겼지만.
지니고 있는 눈빛은 지혜와 명철을 두드린 것만 같이 고결해 보였다.
“37층의 플로어 마스터, 거대거인, 발할라다.”
“아, 그러셔. 겁도 없이 나한테 왔네.”
예기치 못한 적의 등장.
더군다나 이렇게 얌전히 모습을 드러낼 줄은 상상도 못한지라.
혹여나 적의 함정에 걸려 든 게 아닐까 하고, 건우는 내심 상당히 동요했다.
발할라는 그런 건우의 생각을 간파한 듯 입을 뗐다.
“안심하게. 클랜에서 너란 존재는 확실히 고가치 표적이지만, 나한테 있어서는 이야기를 나눌만한 몇 안 되는 강자 중 한 명이니. 예우를 갖추고 대할 걸세.”
“그럼 꺼져 줄래?”
지금 당장 맞붙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이지만.
건우는 애초에 37층의 목적, 블루 티어즈 획득했기에 크게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건우의 경고에 따라 줄 의사가 없다는 듯 발할라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럴 수는 없지. 지금부터 자네에게 이곳의 시련을 가르쳐줄 참이거든.”
“가르쳐 준다고?”
반문하기 무섭게 발할라는 테라스 지면에 맵을 소환했다.
“37층의 시련. 그것은 단순히 말하면 전략전 ‘큐브’라네. 맵에는 지형만 표기된 상태이며 적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탐지마법이나 아티팩트, 혹은 아군 플레이어의 시야범위에 있어야 식별이 가능하지.”
설명하기 무섭게 느닷없이 맵에서 푸른색 빛깔의 점이 세 개가 표시됐다.
싸아아아아.
불길한 징조를 감지한 건우는 발할라를 노려봤다.
“이 세 명은 누구지?”
“뱀에게 반역하는 무리들이지.”
타앗!
발할라의 수작을 간파한 건우는 즉각 발을 박차 테라스 밖을 벗어나려고 했지만.
[시련이 시작됐습니다. 해당 무대에는 참가한 플레이어 외의 타플레이어 접근은 용인하지 않습니다.]
시스템창과 함께 건우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 막혔다.
씨익.
발할라는 미소를 띤 채, 건우의 반응과 상관없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시련에 참가한 플레이어 진영에는 다섯 개의 큐브가 주어지네. 큐브에는 어떤 마법도 인챈트가 가능하며 플레이어는 상황에 따라 큐브를 개봉해 위기를 탈피하거나 적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지.”
눈 밑에 그늘이 진 건우는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계속 설명해.”
“시련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두 가지. 첫 번째는 상대측이 지니고 있는 큐브를 모두 소진시키거나 파괴할 때고, 두 번째는 각 진영에서 아군 플레이어 들을 통솔하는 사령관을 죽이는 것. 지금 같은 경우는 어디까지나 맛보기이기 때문에 사령관 대신 파티의 리더가 죽는 걸로 룰을 적용시켰지.”
“설명 고맙다. 근데 난 딱히 이런 고리타분한 시련을 할 생각이 없거든. 개새끼야.”
설명을 끝마치기 무섭게 건우는 발할라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사멸의 링을 시전했습니다.]
시커먼 링이 단숨에 그의 몸을 감쌌지만.
콰아아아아아아!
데미지는 그에게 전혀 전해지지 않고, 여관 바로 옆에 있던 애꿎은 건물이 와해되며 무너져 내렸다.
“……?!”
깜짝 놀란 건우는 눈을 부릅떴고 세이비어는 순식간에 방금 전에 벌어진 사건의 내막을 파악했다.
-33층에서 봤던 네크로맨서가 쓰던 마법이다. 아무래도 데미지를 흘려보내는 환각마법과 공간굴절마법을 혼합해서 쓴 걸게다.
빠득!
부아가 치미는지 건우는 이빨을 빠득 갈았고, 발할라는 털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듣던 대로 성격이 거칠구먼. 교란자여. 내 이름은 정확히 발할라 로키. 한때, 신을 농락했던 거인의 왕, 우트가르트 로키의 아들이자, 제자. 난 아버지의 모든 마법을 전수받았다네.”
예상치 못한 네임드의 거론에 건우는 눈매를 좁혔다.
우트가르트 로키.
북유럽신화에서 그는 최강의 뇌신, 토르를 마법으로 농락한 마법의 황제였다.
신과 버금가는 종족이라고 일컬어지는 거인.
그는 그중에서 최고신인 오딘과 나란히 최강의 마법사라고 손꼽히는 이 중에 한 명이었다.
‘레브리카랑 비교자체가 불가능한 녀석이야.’
십존 중 가장 끝 반열에 들어서서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그는 그 전 랭킹 10위, 필리프 4세, 그리고 6위, 레브리카를 월등히 초월한 존재였던 것이다.
“……자네는 이곳 탑에 들어오면서 참 떠들썩했더군. 분명 수많은 고화력의 마법을 발휘하는 마도사라고 칭송했지만, 나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단 말이지. 율라도 그리고 너도 결코 내 발끝도 못 쫓아 와.”
“설마 여기까지 온 이유가…….”
“생각대로네. 그래서 이렇게 직접 자네 앞에 당도했다네. 자네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어리석은 존재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 일단 은빛의 날개가 정리되고 난 뒤에 나와 자네를 사령관으로 둔 큐브게임을 시작합세나.”
발할라 로키가 본격적으로 탑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 이유.
그것은 교란자에 대한 흥미 때문이었으며 그는 이 순간을 유희처럼 만끽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도발은 충분히 먹혔겠지.
발할라가 희열로 눈초리가 꿈틀거리려는 순간.
피식.
그 순간, 마주친 건우의 입꼬리는 얄궂게 올라가 있었다.
‘웃고 있어.’
“지랄하고 있네. 미친놈. 네 마음대로 될 것 같아?”
건우는 얄궂게 웃으며 두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찢어진 티켓을 들어 보였다.
“무슨 수작이지?”
발할라가 슬며시 눈을 좁히는 순간.
[복원을 발동했습니다.]
건우의 권능에 의해 티켓이 완전히 복원이 이루어졌고, 이어 시스템창이 연달아 갱신됐다.
[룰 개정권이 발동했습니다.]
[룰 개정으로 인해 양 팀 플레이어 사령관은 ‘교란자, 최건우’와 ‘거대 거인, 발하라’로 임명됐습니다.]
찢어진 티켓.
그것은 이미 소진한 룰 개정권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건우에 의해 내구도가 완전히 회복되어 다시 한번 룰 개정이란 참사를 일으켰다.
“……네, 네놈!”
이것은 발할라 역시 예상 못했는지 입을 쩍 벌렸고.
건우는 인벤토리에서 거대한 완드, ‘마격 리바이던’을 꺼내 들며 발할라에게 말했다.
“마법사의 싸움이 뭔지 보여 주마. 애송아.”
271. 돌아가기SSS급 리커버리 마도사